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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먹고사는 행운이 내 것이 아니라해도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영어 과외로 생계를 꾸리며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먹고 살기 위한 일은 사람을 정말 병들게 할까?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현암사, 2014)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 살의 백수 ‘다이스케’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매달 부자인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타 쓰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캥거루족’, 혹은 속된 말로 ‘부모 등 쳐먹고’ 살아가는 ‘밥버러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가 이렇게 ‘놀고’ 있는 게 딱히 취직이 안돼서도, 남보다 게을러서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학벌도 높고 소위 ‘빽’도 있는 남자다. 게다가 세상과 인간사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 나름의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일하지 않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노동 그 자체를 위한 노동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결국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병들게 한다는 게 그가 이야기하는, 돈벌이를 하지 않는 이유다.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그 수단이라면 먹고 살기 쉽게 일할 방법을 찾아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러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그저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이 나지 않을까? (...) 오다 노부나가(일본 전국시대의 무장)가 유명한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그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처음으로 먹어보고 너무 맛이 없어서 크게 혼을 냈다는군. 요리사로서는 최고의 요리를 내놓고 야단을 맞은 셈이지.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적당하게 이류나 삼류의 요리를 주인에게 만들어 주었더니 내내 칭찬을 받았다고 하네. 그 요리사의 일을 생각해보게. 자신의 생활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점에서는 빈틈이 없지만 자신의 기술인 요리 자체를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불성실하고 타락한 요리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책, 108쪽.)

 

한 마디로,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 결정적인 순간 일이 아닌 먹고 사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나는 그런 '불순한' 노동 따윈 하지 않겠다'는 것이 주인공 다이스케의 주장이다. 그가 이토록 당당(?)하게 나오니, 평소 다이스케를 걱정하고 또 한편으론 불편하게 생각해온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더욱 ‘미쳐버릴’ 지경이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일자리도 없이 빌붙어 살면서,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철학이라 말하다니!

 

게다가 이 소설이 출간된 때는 청년 실업으로 인해 ‘백수’ 인구가 폭증하고 있는 요즘도 아닌 100년 전 일본, 그러니까 서양을 모방하여 한창 경제 발전에 열을 올리던 메이지 유신 시대의 일본이다. 그 당시에 자발적으로 무직자가 되겠다는 다이스케의 선언은, 아무리 소설 속 이야기라 하더라도 뭇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는 그런 다이스케의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가 처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일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일을 할까? 나한테 일은 어떤 의미지?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면서 살아야 할까? 주인공 다이스케의 말처럼,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이상 나는 일을 통해 '타락'할 수밖에 없는 걸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질문들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글을 써줄 수 있는가 하는, <일다> 기자로부터의 청탁이었다. ‘어, 내 고민을 어떻게 아셨지?’ 희한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운명에 순응하는 마음으로, 나는 글을 쓰겠다고 했다. 이참에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을 좀 정리해 보고 싶었다.

 

수십 통의 이력서가 거절당한 뒤
 

▲   유학시절 내 친구의 핸드폰.  © 유월 
 

나는 3년 전 대학을 졸업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나는 공부가 정말 하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갔던, 근래에는 보기 힘든(?) 학생이었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에 내 장래에 대해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고 또 졸업을 하면서,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차차 깨닫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경제적인 자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학 생활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나 자신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그 어떤 것보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즐거워서 평생을 하게 될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지금도 그 확신은 여전하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이리저리 모색했던 것 같다. 논문을 번역하고, 출판사 등에서 여는 공모전에 소설을 공모하기도 하고, 작사가 콘테스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러다 운이 좋으면 가뭄에 콩 나듯 월간지에 글을 실을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월세는커녕 생활비로 쓰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졸업을 앞두고 자립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졌다. 결국 나는 글을 쓰는 일은 잠시 보류해 두고,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 전공과 관련된 회사들을 중심으로, 나중에는 전공과 전혀 무관한 곳까지 포함한 각종 기업과 단체에 수십 장의 이력서과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를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한답시고, 취업을 위한 자격증이나 경력을 하나도 준비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서 했던 공부라는 건 기업들이 선호하는 전공과는 거리가 먼, 고고학과 인류학, 언어학 같은 인문 계열의 공부였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거기서 굴하지 않고 수십, 수백 통의 이력서를 더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그때부터 자격증과 어학 시험 준비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나의 친구들은 그렇게 했고, 그래서 지금은 크고 작은 기업체나 단체에서 비록 직책은 낮아도 한 달에 100~200만원의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몇 십 통의 이력서가 거절당한 뒤에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회사로부터 뽑히기 위해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양 나를 부풀리고, 사실은 자립을 위한 돈이 필요해서 일하려는 것인데 마치 그것 이상의 대단한 비전과 열정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일을 더 이상 견뎌내기가 힘이 들었다. 게다가 그 괴로운 일련의 과정들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일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때 내가 어떤 특별한 소신이 있어서 취업을 관뒀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거기에는 운이 따라주었다. 당시 나는 지인을 통해 영어 과외 자리를 하나 소개받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과외 자리가 몇 개 더 늘어나면서 당장의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싫든 좋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또 다른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필요한 만큼의 돈만 벌고 나머지 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지난 봄 도봉산에 올라 찍은 사진. 매주 월요일 아침, 친구들과 서울에 있는 산을 돌아가면서 오른다. 주말에 비해 텅 빈(?) 산을 오르는 건 나 같은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다 .  © 유월 
  

현재 나는 일주일에 세 번, 두 시간씩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 - 그러니까 책을 읽고 좋은 글들을 베껴 쓰고, 나의 생각을 글로 적고 친구들을 만나는 등등의 일들 - 을 하면서 지낸다.

 

언제까지 이 생활이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의 일상이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남에게 잘 보이고 더 유능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기보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내 심성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진실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겐, 이력서를 쓰면서 괴로워했을 때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임에 틀림없다.

 

돈은 사람 사이의 ‘중매쟁이’일 뿐

 

여기서 나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의 말처럼, 먹고 살기 위한 일은 사람을 정말 병들게 할까? 지난 3년 간 영어 과외를 하면서 겪은 일들을 되짚어 볼 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Yes'이기도 하고 'No’이기도 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의 진짜 고민은, 먹고 살기 위한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먹고 살기 위한 일 이외의 다른 일에도 어떻게 먹고 살기 위한 일을 할 때만큼 충실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돈만 바라는 과외 선생이고 싶지 않은 동시에,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대강 글을 쓰고 대강 책을 읽는 사람이고 싶지도 않다.

 

물론 나는 3년 전,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필요해서 영어 과외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스타트를 그렇게 끊었을지언정 사람이 돈만을 보고서 어떤 일을 계속해나갈 순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즉, 어떤 일을 꾸준히 해나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새로운 종류의 동기 부여가 있어야 한다.

 

설사 정말 돈만을 벌기 위해서 일한다 하더라도 그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속 새롭게 동기 부여를 하지 않는 이상, 단순히 돈을 위한 돈을 벌기란 쉽지 않다. 만약 그렇게 돈을 벌게 된다 하더라도 그 돈은 분명 나를 병들게 할 것이다. 그때 나의 노동은 돈을 위해 소모되는, 돈의 노예적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과외 일을 하면서 병들지 않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건 나로선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내가 가르치는 세 명의 아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부모의 강압에 의해서나, 아니면 단순히 명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나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다면 나는 정말 힘들었을 거다. 배움에 열정이 없는 아이들 앞에서 혼자 떠드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와 영어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 자체를 재밌어 하고 또 그 언어에 호기심이 많다는 건 아주 잠깐만 같이 공부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평소 다른 사람과 한 마디만 대화를 나눠보아도 상대방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즐거움 때문에 영어를 공부했고, 지금도 같은 이유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렇게 재밌어 하는 한, 나는 과외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졸지 않고 열심히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부하는 재미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일뿐이다. 

 

             ▲  자립을 위해 좌충우돌 하다보니 어느 덧 십 년. 나의 길었던 20대도 이제 곧 안녕~   © 유월 
  

하기야 과외라는 게 계약서 한 장 없이 시작하는 일이라 간혹 마음 아픈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한 번은 가르치는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당장 다음 주부터 나오지 말아 달라는 통보를 문자로 받은 적이 있었다.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가르쳤던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이였는데, 무엇보다 정들었던 학생과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헤어진 게 가장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수업료는 선불로 받는 관례가 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그만큼 과외 학생과 나의 관계가 결코 돈만으로 맺어진 건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 돈은 항상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관계들의 ‘중매쟁이’일 뿐이다. 나는 처음엔 돈이 필요해서 과외를 시작하지만, 일단 학생과 학부모와 관계가 맺어지고 나면 그건 돈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돈은 내게 노동의 목적이 아닌 학생과의 관계에서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어떤 매개물로 변모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게 삶의 전부는 아니야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다. 나한테 돈이란 게 정말 일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에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것이라면, 만약 과외 학생이 갑자기 돈을 못 내겠다거나 지금보다 적게 내겠다고 해도 나는 그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물론 지금으로서 이건 하나의 단순한 가정인지라, 실제 그런 일이 생긴다 했을 때 나는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정이 무엇이 됐든, 나는 미래의 나 역시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병들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먹고 살 방법은 다양하다. 다만 먹고 사는 일로 내가 병들지 않기를, 또 그것에만 안주하지 않기를!  ©유월  

 

비록 <그 후>의 다이스케는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 그 일 자체에 충실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돈벌이를 거부했지만, 나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일은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지금 시대에 누군가에게 속박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경제적인 자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이 내 삶에 적절한 긴장과 활력을 주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단순히 먹고 사는 게 목적이 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경제적 자립이 해결되었다 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멈춘다거나, 먹고 사는 일에 매여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무한정 미뤄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삶이 좋다. 먹고 살만큼 돈을 벌고, 늘어지지 않을 만큼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니까.

 

다만 언젠가 글을 써서 먹고 살만큼의 돈까지 벌 수 있다면 그때는 더 뿌듯할 것 같다. 내 평생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로선 별 수 없겠지만! ▣ 유월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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