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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도, 살림도, 집수리도 내 힘으로…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아파트 키드’ 하정의 귀촌이야기 (기록: 달리)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제가 힘이 좀 세긴 하죠.” 스물 셋에 귀농한 하정은 이곳 건축협동조합의 첫 여성 일꾼이 되었다. ⓒ촬영: 달리


시골의 건축협동조합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하정


하정이 산내에 돌아왔다. 땅도 귀하고 땅값도 비싼 산내에서는 도저히 농사짓고 살 수 없어서 농부의 꿈을 그릴 수 있는 곳을 찾아 야심차게 떠난 지 2년 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축이다. 하정은 산내에 있는 건축협동조합에 첫 여성 일꾼이자 ‘시다’로 취직했다. 하정답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20대 여성인 하정이 ‘아재들’ 판인 건축 현장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사실 하정만이 아니라 어떤 20대 여성이라도 농촌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하정은 공사 현장에서 쌓인 먼지를 툭툭 털듯이 말했다.


“그런 시선(여자는 못 한다)에 굴복하지 않고 보란 듯이 내 힘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는 건축하는 여자를 모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됐다.


-농사를 짓다가 어떻게 건축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려면 살림부터 집 관리까지 모든 걸 다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성역할 규범이 강하니까, 보통 여자가 살림하고 남자가 바깥일이나 집 관리를 하죠. 저는 지금도 혼자고 앞으로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남자가 해주길 기대하고 살 게 아니라 내가 기술도 익히고 다 할 줄 알아야겠더라고요. 농촌에 정착하려면 의식주 중에 ‘주’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동네 아주머니들은 여자 혼자는 못 산다, 농사짓고 싶으면 땅 있는 남자랑 결혼하라시는데…(웃음)”


-산내 오기 전에 친구 집을 같이 지어봤다면서요?


“장흥 살 때 친구 둘이랑 같이 연습 삼아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동네 분이 저를 보시곤 친구에게 ‘이런 분도 도움이 되냐’고 묻는 거예요. 내가 뻔히 듣고 있는데…. 또 그날 다른 동네 분도 제가 집 지으러 왔다니까 특이하다면서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어요. 여자가 집을 짓는다고 하면 그런 반응들을 맞닥뜨리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내가 이상한가 생각하게 되고 자신감도 떨어져요. 나는 집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싶은 건데, 이게 오버인가 싶기도 하고요.”


-용감하네요. 그런 말을 계속 들어도 꿋꿋하게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런 편견에 굴하면 안 되겠다고 다시 힘을 냈어요. 지금 회사에서 저를 받아준 게 고맙기도 해요. 처음 이 자리 소개받았을 때, 여자인데도 괜찮냐고 제가 먼저 물어봤어요. 보통 건축일 하면 전국을 돌아다니니까 여자는 안 받아준대요. 성별 때문에 방을 하나 더 잡아야 해서 경비가 더 들잖아요. 지금 다니는 곳은 출장 안 가고 이 지역 안에서 대부분의 일을 소화하니 다행이죠. 처음 건축 일 알아볼 때 다들 그랬어요. 뭐 하러 힘든 거 하냐, 차라리 도배를 배워라, 타일에 시멘트 넣는 일을 해라…. 그런 건 보통 남편이랑 짝을 이뤄서 여자들이 많이 하거든요. 주위에서 그런 조언할 때마다 겁도 나고 내가 목수의 길을 잘 갈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일단 지금은 시골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요.”


▶ 여자는 안 된다는 편견과 주위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하정은 시골에서 목수의 길을 가고 싶다. ⓒ촬영: 달리


-시골 와서도 사는 게 팍팍한가 봐요. 도시에서랑 비교하면 어때요, 하정의 시골살이는?


“도시에선 엄마랑 같이 살기도 했고 부모님께 기대는 마음이 있었죠. 사실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 건, 장흥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그 전에 지리산 생명평화대학이나 해남 미세마을에 살 땐 공동체 안에 있어 보호막이 튼튼했죠. 공동체에 있던 처음 2년간은 진짜 시골살이나 농사에 대한 현실감이 제로였어요.”


-하정은 농촌에 살아본 적도 없는데 남들보다 일찍 귀농한 편이잖아요.(하정은 스물셋에 농촌으로 이주했다) 처음에 어떻게 오게 됐어요?


“어쩌면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서 시골에 오게 된 것 같아요. 저는 도시에서 ‘아파트 키드’로 자랐고 친척들도 다 도시에 살아서 농촌에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뒷산에서 미꾸라지 잡고 흙장난하고 도롱뇽 알 보고 그런 걸 되게 좋아했거든요. 어릴 때 막연히 내 미래를 상상하면 시골집 마당에서 닭 키우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고등학교 때 적성검사 해도 ‘농부’가 나오고.(웃음) 그래서 농대 갈까 하고 이과를 갔는데, 수리영역 성적이 안 된다고 학원에서 잘리는 바람에….”


-결국 스스로 길을 찾게 된 거네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남들은 다 대학 간다고 난리인데 전 뭘 해야 될지를 몰랐어요. 그때 제 짝꿍이 디자인 전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가 종이접기 하는 걸 보더니 소질 있는 것 같다고 미술학원에 데려갔어요. 엄마도 공부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예체능으로 가라고, 그렇게 입시 때문에 조소를 전공하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니 재미도 없고 적응을 잘 못 했어요. 우울증 진단 받고 휴학했다가,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연 귀농학교에 참여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다 생명평화대학 통해서 산내에 처음 오게 된 거예요.”


-비록 다시 학생의 신분이 됐지만 드디어 꿈에 그리던 농촌에 입성하게 된 건데, 처음 왔을 때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대학에서는 마음공부를 위주로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 많았어요. 그래서 1학년 때는 계속 울면서 보낸 것 같아요. 그해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더 힘들기도 했고… 지금 떠올려보면 좀 웃기기도 한데 울음에 취해 있었다고 해야 되나?(웃음) 도시에 살 때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었다 싶어요. 타인과 같이 사는 경험도 처음 해봤죠. 매일 같이 밥 해 먹고 공부하고. 그게 재밌을 때도 있지만 빡칠 때도 있고.(웃음) 그런데 한 공간에 있으니 피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연속적인 관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운 덕분에 다른 공동체에도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정이 졸업 앞두고 진로 고민할 때가 기억나네요.


“졸업하고 대학에서는 제가 그곳에 남아주길 바랐지만, 활동가나 프로그램 운영 같은 일들은 제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당시 대학에서는 사회 변혁의 주체이자 마을일꾼 같은 타이틀로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했는데, 저에겐 너무 거창하고 심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일이나 관계에 있어 귀농 1세대 선배들의 방식을 배우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청년이 공동체의 주체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 ‘아파트 키드’로 자랐고 농촌을 경험한 적도 없지만, 하정은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면 시골집이 연상되었다고 한다. ⓒ촬영: 달리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싶어 해남으로 갔지요?


“대학에서는 주로 머리 쓰는 활동을 했는데, 저는 몸을 쓰고 싶어 근질거렸거든요. 몸과 머리의 균형이 안 맞아 좀 힘들었달까. 해남 미세마을에서는 농사 경험에 있어서 만족도 크고 많이 배웠어요. 제가 ‘한 힘’ 하는데, 힘을 실컷 썼죠, 하하. 한편으로는 공동체로 같이 농사짓는 게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유기농업하는 입장에서는 생협에 납품하기 위해 일하는 구조가 기계처럼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좀 힘이 빠졌고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생계를 담은 농사를 같이 짓는 게 참 어렵구나, 나는 돈 되는 농사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혼자 소농을 해야겠다고 결론 내렸어요.”


-농사일로 생계가 해결이 됐어요?


“제가 있을 땐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받았어요. 농사가 잘 안되면 20만 원 받기도 하고. 숙식이 제공되니까 씀씀이가 크지 않으면 버틸 만해요. 겨울에 절임배추 하면 목돈(50만 원)이 생겼고요.”


-둘 다 공동체 생활이긴 하지만, 해남과 산내는 또 달랐을 것 같은데…


“해남에서는 좀 더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같이 사는 언니들이 영화나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많이 나누고요. 산내에 처음 왔을 때는 석 달간 생리도 안 나왔어요. 원인은 잘 모르겠는데 그때 제가 많이 긴장했나 봐요. 동네 한의원에 가니까 요즘 힘들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한의사샘 앞에서 저도 모르게 막 울었어요. 산내에서는 올바른 것, 진중한 주제의 이야기, 평화, 이런 걸 강조하는 분위기이니 욕도 함부로 못 하겠고…(웃음) 나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미세마을에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나도 좀 더 편하고 솔직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었어요.”


-얘길 듣고 보니, 성소수자라든지 자기만의 색깔이 강한 사람이 농촌에 오면 많이 답답할 것 같아요.


“처음 귀농 준비할 때 퀴어 정체성을 가진 친구를 만났어요. 자기는 도시가 진짜 안 맞긴 한데 연애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귀농은 못 한다더라고요. 귀농했다가 도시로 돌아온 퀴어 친구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고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 상태로 사는 건 힘들어요. 산내는 그래도 문화기획달이 있어서 ‘퀴어력’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정말, 그럼 너무 다행이고요. 작년 여름 우리가 만났을 때 장흥으로 가기 직전이었잖아요. 왜 다시 지역을 옮기고 싶어졌어요?


“사실 장흥은 산내에 비하면 아직 갖춰진 게 없죠. 그쪽으로 먼저 귀농한 친구도 막상 와보니 기반이 너무 없다며 저한테 왜 오려고 하냐고 묻더라고요. 저한테는 장흥이 제 기준에서 좀 더 멋있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곳에서 살고 싶은 것 같아요. 동경하는 마음이랄까. 작년 겨울에 장흥에서 농민학교를 열고 친구들이랑 공부하기도 했는데, 거기서 작은 공유공간을 만들어 이런저런 활동을 사부작사부작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나도 그 네트워크에서 뭔가 같이 해보고 싶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자연스러운 정착으로 이어지길 바랐어요.”


-그 친구들도 다 외지인이라서 마을에 진입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집이나 일은 어떻게 구했어요?


“사실 대책 없이 간 거긴 한데, (웃음) 건너건너 아는 분이 장흥에서 매실농장을 하신대요. 그 농장에서 한 달 동안 숙식알바 하면서 집도 알아봤어요. 다행히 빈집을 소개받아서 월세 5만 원에 계약했고, 농사알바나 꼬막알바로 생활비를 벌었어요. 농사알바는 마을에 수요가 너무 많아서 제 농사도 못 지을 정도였어요. 아짐들이 서로 자기 밭일 먼저 해달라고…. 제가 만약에 정식으로 출근을 하면 모든 게 용서(?)가 돼요. 그런데 (직장인도 아니면서) 제 농사는 어른들이 보기에 소꿉장난인 거예요. 그러니까 네 농사일 할 바엔 차라리 품값 받고 다른 사람 농사일을 도와줘라, 그렇게 엄청 불려 다녔어요. 제가 나이가 어린 편이라 저보다 연배가 높은 귀농자들보단 편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가끔 어른들이 도시에 나갈 일이 있거나 장을 보러 갈 때 운전을 해드리면 그러느라 하루가 다 가서 장흥 살 때 엄청 바빴어요.”


▶ 장흥에서 살 땐 농사알바, 꼬막알바, 그리고 어르신들 운전 자원봉사를 하느라 엄청 분주했다고. ⓒ촬영: 달리


-귀농인이 별로 없는 지역에 청년이 가면 ‘동네 머슴’ 된다는 얘기가 생각나네요. 원주민 어르신들과 같이 일 해보니 어땠어요?


“평생 농사를 지은 분들은 세포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절대 따라갈 수가 없어요. 아짐들 중에 무릎수술 안 한 분이 없는데도 그 큰 밭을 혼자 매요. 자식들한테는 농사 안 한다는 거짓말까지 하시면서.(웃음) 저는 그렇게 몸 상하면서 일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어른들은 부지런함이 마치 모든 미덕인 것처럼 여기시는 게 있어요. 무조건 게으르면 안 되고, 마당에 풀 한 포기 나면 안 되고,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하고, 내일 죽어도 깨끗하게 죽어야 된다고.”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부지런하시던가요?


“아재들은 주로 출퇴근하는 바깥일을 하시거나 연세가 많으시니까 가끔 농기계나 돌려주고, 큰 농사일이나 살림은 거의 아짐들이 다 하는 거죠.”


-처음 간 곳에서 혼자 다 감당하려면 힘들었을 텐데… 마침 장흥에 같이 간 친구가 있었다면서요?


“해남에서 같이 생활하던 남자 친구도 장흥으로 옮기겠다고 해서 둘이 같이 일하며 집도 알아봤는데요, 우린 돈도 없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까 처음엔 셰어하우스 얘기가 나왔어요. 저도 그럴까 생각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우선 엄마한테 남자랑 하우스메이트로 둘이 산다고 얘기할 자신이 없었고요. 그렇지 않아도 둘이 같이 장흥에 온 것만으로 주위에서 다 애인이나 부부로 알았거든요. 아니라고 해도 자꾸 엮어주고요. 장흥에 있는 한 1인 여성 가구인 분도, 마을 아짐들이 전에 결혼했다더라는 둥 소설 7권을 썼다고…. 거기는 젊은 사람도 별로 없어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친구인 남자랑 둘이 사는 건 부담스럽더라고요.”


-비혼여성이 농촌에 오면 비일비재하게 겪는 일이죠. 하정한테도 연애나 결혼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공동체에 살 땐 마을과 관계가 적어서인지 그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확실히 장흥에 혼자 살 때는 정말 그런 얘기 많이 들은 것 같아요. 농사짓고 싶다 하면 땅 있고 돈 많은 부자한테 시집가라, 자기 막내아들 만나봐라, 그런데 나이가 나보다 스무 살은 많고….(웃음)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계속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도 커요.”


-혼자 내려온 남자들한테는 그렇게까지 안 하죠? 왜 여자한테 유독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네, 남자들한테 이 정도로 하진 않아요. 제 생각엔 어른들이 여자한텐 남자 보호자가 있는 게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여자는 결혼하고 애 낳아야지, 이게 절대 진리고. 어른들 말씀이니 그 앞에선 반박하지 않지만 다른 관계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얘기해요. 난 이 문제(결혼)가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고. 시골에서 여자 혼자는 힘들다고 한계 짓는 게 있어요. 사실 저 스스로도 그럴 때가 있고요. 정말 나 혼자 모든 게 가능할까? 그래서 농사 외에 다른 기술도 배워야겠다 싶어 건축 일 생각하기 전엔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딸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 사보고 접었어요.(웃음)”


-농촌에서 여자 혼자 독립하기가 참 쉽지 않네요.


“저도 계속 고민이에요. 작은 규모라도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필요하고, 계속 살려면 집도 필요하고, 이동이 어려우니까 차도 필요하고… 그러려면 다시 돈이 필요해! 그래서 아아, 농사는 고급 취미생활이구나 싶더라고요. 어쨌든 농촌에 계속 살려면 생활기술을 익혀야겠다, 돈도 벌고… 그래서 건축 일을 생각했고, 집에 가스, 보일러, 수도가 고장 나도 아저씨 안 부르고 내가 고쳐야겠다 마음먹었죠.”


▶ 건축 현장에서 일하면 화장실 가는 것도, 월경을 하는 것도 번거롭고 힘들지만 하정은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다. ⓒ촬영: 달리


-어때요, 건축 현장에서 아저씨들하고 일하는 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다들 조심스럽게 대해주시는 것 같긴 해요. 여자랑 일하는 게 이분들도 처음이니까요. 저도 우선은 배우는 자세로 최대한 편하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긴장이 됐나 봐요. 일하고 처음 한 달은 화장실에 안 갔어요. (불편해서?) 아니오. 주로 야외에서 일하니까 화장실이 없는 환경일 때도 많다 보니 저도 모르게 참고, 나중엔 아예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지금은 점심때 식당에 들러서 가긴 해요.”


-아, 남자들은 적당히 노상방뇨하는데 여자 목수들은 그럴 수가 없으니 많이 불편하겠네요.


“특히 처음 생리 터졌을 때 제일 난감했어요. 원래 면생리대 썼는데 이 일 하면서는 쓸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거의 기저귀 같은 가장 큰 사이즈의 일회용 생리대를 썼더니 커버는 됐는데,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좀 민망했지만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렸죠. 월경할 때는 몸 상태를 봐서 하루 쉬겠다고. 아저씨들도 미처 생각 못 했다며 알겠다고 하시는데, 이야기하길 잘한 것 같아요. 내가 먼저 이야기해야지 그분들도 인식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 하나하나 혼자 밟아갈 때마다 용기가 필요하겠어요. 건축 일 말고도, 농촌에서 남성들과 일할 때 불편한 점이 있었나요?


“같이 농사일하다가 성희롱 발언을 들은 적이 몇 번 있어요. 고추농사 품일 할 때 고추는 여자가 따야 된다거나, 얼마 전 산내에서 논일을 할 때도 불쾌한 말들을 듣기도 했고요. 꼭 저한테 한 게 아니더라도, 같이 있을 때 그런 말 들으면 날카롭고도 위압적으로 느껴져요.”


-하정은 앞으로도 계속 시골에서 살고 싶나요?


“처음엔 농사 자체가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농촌에 와서 맺은 관계가 중요하게 됐어요. 지금도 장흥을 떠올리면 그립고 마음이 울렁거려요. 농촌에 오고 나서 도시에 있던 친구들과는 많이 소원해졌어요. 이제 농촌에서 만난 관계를 통해 모든 감정이나 만족감을 느끼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하정과 같은 청년여성이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일단은 살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거주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해남에 살 때, 장흥 지역의 집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장흥에 살며 직접 가서 찾으니 빨리 연결돼 집을 구했죠. 청년들은 형편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떤 기한을 주더라도 거주지를 제공하면 좋겠어요. 와서 살면서 일도 구하고 마을의 네트워크에도 스며들 수 있게…. 연고가 없는 곳에 터를 잡는 건 힘들어요. 귀농 2세대를 보면서 가끔 그런 게 부러울 때가 있어요. 자기 고향이 있는 거요. 외지에서 온 혼자 사는 여자, 라는 사실만으로도 무서울 때가 많거든요.”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 작업은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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