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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 “비혼녀, 새댁으로 살기”①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일다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도 내게 결혼했느냐 묻지 않았다
“새댁! 새댁 안에 읍나?”
아침상을 물리고 잠시 부엌 바닥에 퍼져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높고 가느다랗고 약간 날카로운 음색으로 보아, 옆집에 사는 하동댁 아주머니가 틀림없다. 새댁이라는 호칭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나는, 몸을 움직이기 전에 일단 부엌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문 쪽을 향해 대답부터 하고 본다. “예, 아주머니. 잠깐만요!”
슬리퍼 두 짝을 꿰차고 마당에 나가니 텃밭에 면한 담장 너머로 아주머니의 뽀글뽀글한 머리카락과, 그 아래 새까맣게 탄 이마가 보인다.
“자, 이거 싸게 받아.”
깨금발을 들었을 게 분명한 아주머니가 팔을 한껏 뻗어 뭔가 담긴 검정 비닐봉투를 건네신다. 열어 보니 탱글탱글한 알들로 꽉 찬 옥수수가 노랗게 웃고 있다. 옥수수는 따서 바로 쪄 먹어야 맛있어, 하시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한 개를 꺼내 입에 문다. 아, 말캉하면서도 쫀득한 이 질감이라니. 정신 없이 옥수수를 탐하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가 웃으신다. 마치 신기한 것을 구경할 때처럼 반짝거리는 아주머니의 그 눈빛이 좋아서, 나도 따라 웃는다. 새댁과 하동댁, 두 ‘댁’의 웃음이 아침부터 짱짱하게 쏟아지는 한여름 햇살을 뚫을 기세다.
‘이름’보다 ‘새댁’
대문 앞에는 감나무가, 수돗가에는 포도나무가 있는 집. 마당 안팎의 텃밭에서 갖가지 잎채소와 열매들이 푸르고 발갛게 익어가고 있는 집. 그러나 동네 분들에게는 그저 ‘노씨’네로 알려진 그 집으로 내가 이사를 온 건 2009년 7월 11일, 16일이다.
왜 이사를 두 번씩이나 했느냐고? 서로 다른 곳에 살던 두 사람이 각각 편한 날을 잡아 짐을 옮겼기 때문이다. 둘 중 한 사람은 물론 나고, 다른 한 사람은 내 남자친구다(이곳에 오면서부터 줄곧 함께 살고 있는 그를 이 글에서는 K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렇다. 나는 함양으로 이사 오면서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했고, 그것이 내가 이 마을에서 새댁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나보다 앞서 이사를 하게 된 그를 위해, 나는 트럭을 함께 타고 오면서 길 안내를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짐을 부리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방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풀 묻은 도배지와 빗자루를 들고는 흡사 벌이라도 받듯 하염없이 앉고 서고 붙이는 일을 반복하던 그때. 동네 분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대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변변한 세간이라곤 하나 없이 난장판이 된 집안을 휘휘 둘러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굳은 날 이사하느라 젊은 신랑이랑 새댁이 욕보는가벼.”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바로 그 순간, 익명의 그가 꽃으로 피어난다고. 하지만 아주머니는 이름 대신 새댁이라는 호칭을 내게 붙여 주었고, 그리하여 나는 새댁으로 재탄생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60~70대 어르신들이 주민의 대부분인 시골의 작은 동네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녀가 부부 아닌 이름으로 함께 사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이렇게 갑자기, 둘이 무슨 사이냐고, 결혼은 했느냐고 한 번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새댁이라 부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좀 당황했다. 그 호칭이 내겐 아주 많이 낯설고 겸연쩍은 것이었기에 더더욱.
내게는 시골이어서 가능했던 일
내가 계속 도시에 살았더라도 누군가와의 동거를 생각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확답을 할 순 없지만, 안 그랬을 확률이 더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몇 번의 연애와, 결정적으로는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면서 내게는 이미 남녀관계(이성애자에 한해)에 대한 무지갯빛 판타지가 사라진 지 오래이므로.
더군다나 함께 산다는 건 단지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섹스를 한 뒤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그건 오히려 각자의 생을 통해 형성돼 온 사소한 습관과 버릇, 사고하고 행동하는 패턴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다 애매하게 화해 내지는 봉합되는 과정이 무한 반복되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쯤 되면 사람들은 묻는다. 판타지가 없으면 오히려 상대에 대한 큰 기대 없이, 차이를 인정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느냐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처럼 이성적인 타입이 못 되는 탓에 종종 사랑과 집착을, 배려와 간섭을, 그리고 믿음과 무심함을 분별하지 못해 질곡에 빠진다. 아니, 그 두 영역을 칼금 긋듯이 양분하기 위해 지나치게 애를 씀으로써 관계를 긴장시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또 있다. 멋지고 완벽한 남녀관계에 대한 판타지는 깨졌을지언정, 슬프게도 내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순정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와 상대의 관계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 때면, 스스로를 괴롭히든지 상대를 못 살게 굴든지(보통은 둘 다 해당됨) 해서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내 연애사의 불행은 주로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왜 그와의 동거를 선택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혼자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남원 생활을 정리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일상을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을 필요로 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의 공간적 특성 때문에 그런 열망이 더 강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 도시에서 살 때 나는 근본적인 상실감과 결핍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집에서 살건, 누구와 함께 있건 늘 외롭고 허전하고 심지어는 모욕감을 느꼈으므로, 오히려 연애라도 하게 되면 사랑조차 그런 나를 치유하고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심한 좌절에 빠지곤 했다.
반면 내 경험상 시골에서는 홀로 가만히 있을 때 존재 자체의 충만함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내가 느끼는 그 충만함,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묘한 느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순수한 열망에 가깝다. 나라는 인간이 비록 관계 맺기에 서툴고 사랑하는 데 미성숙할지라도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쭙잖은 용기가 생긴 것 역시, 내게는 시골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정에서 시작해도 나쁘지 않아
▲ 콩밭의 풀을 매는 K의 뒷모습. 육체 노동이 늘 필요한 시골에서는 함께 일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자야
또 하나, 동거를 선택한 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진보적인 목적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아닌 한(이런 곳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보통 시골 마을의 정서는 지극히 보수적이다. 그러니 타지에서 굴러온 혼자 사는 여자가, 그것도 뭘 해서 먹고 사는지 근본을 알 수 없이 툭하면 며칠씩 집을 비우는(현재 내 조건이 이러하다) 것을 좋게 볼 리 없지 않은가.
시골에서는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의 노동력이 늘 필요하다는 점도 적극적으로 동거를 고려하는 이유가 됐음은 물론이다. 낡은 집을 그때그때 적절히 손보는 일이나, 적은 규모일지언정 텃밭을 가꾸고 겨우내 아궁이에 지필 땔감을 마련하는 일 등은 귀촌 초보자가 혼자 하기에 무엇 하나 녹록한 게 없고, 몸 쓰는 일의 특성상 혼자 하면 더 고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거가(남녀를 불문하고)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차선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한 사람이, 혹은 돌아가면서 집을 건사하면 여러 모로 안정감이 생기고, 또 필요한 일을 함께하면 힘든 가운데서도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 가지 소망은 동거인이 적어도 나보다 기운이 세고 겁이 없으며 한 백배쯤 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마침 K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2006년 겨울, 요가 선생과 수강생으로 만난 이후 줄곧 내 곁에서 묵묵히 마음을 써주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해 온 K는, 우선 나보다 몸이 튼튼하다. 심성도 꼬인 데 없이 선하다. 무엇보다 제 성질을 못 이겨 화르르 타오를 때가 많은 나를 묵묵히 봐주는 인내심과, 그걸 제 품에 안아 주는 다정함을 지녔다. 심지어는 나와 비슷하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하는 직장을 싫어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생활을 이미 오랫동안 실천해 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이런 파트너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때만 해도 나에게 그는 사랑하는 이성이라기보다 고맙고 편한 친구에 가까웠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좋기도 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가장 나쁜 단점들 때문에 더욱 격렬해지기도 하지만, 그와 달리 우정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다”는 작가 미셸 트루니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는, 사랑의 격정보다는 우정 어린 관계에서 시작하는 게 나쁘지 않았던 것.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고백하던 그에게 매정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는 언제고, 정작 내가 나서서 먼저 동거를 제안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자야)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저널 <일다> 바로가기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일다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도 내게 결혼했느냐 묻지 않았다
“새댁! 새댁 안에 읍나?”
아침상을 물리고 잠시 부엌 바닥에 퍼져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높고 가느다랗고 약간 날카로운 음색으로 보아, 옆집에 사는 하동댁 아주머니가 틀림없다. 새댁이라는 호칭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나는, 몸을 움직이기 전에 일단 부엌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문 쪽을 향해 대답부터 하고 본다. “예, 아주머니. 잠깐만요!”
슬리퍼 두 짝을 꿰차고 마당에 나가니 텃밭에 면한 담장 너머로 아주머니의 뽀글뽀글한 머리카락과, 그 아래 새까맣게 탄 이마가 보인다.
“자, 이거 싸게 받아.”
깨금발을 들었을 게 분명한 아주머니가 팔을 한껏 뻗어 뭔가 담긴 검정 비닐봉투를 건네신다. 열어 보니 탱글탱글한 알들로 꽉 찬 옥수수가 노랗게 웃고 있다. 옥수수는 따서 바로 쪄 먹어야 맛있어, 하시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한 개를 꺼내 입에 문다. 아, 말캉하면서도 쫀득한 이 질감이라니. 정신 없이 옥수수를 탐하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가 웃으신다. 마치 신기한 것을 구경할 때처럼 반짝거리는 아주머니의 그 눈빛이 좋아서, 나도 따라 웃는다. 새댁과 하동댁, 두 ‘댁’의 웃음이 아침부터 짱짱하게 쏟아지는 한여름 햇살을 뚫을 기세다.
‘이름’보다 ‘새댁’
대문 앞에는 감나무가, 수돗가에는 포도나무가 있는 집. 마당 안팎의 텃밭에서 갖가지 잎채소와 열매들이 푸르고 발갛게 익어가고 있는 집. 그러나 동네 분들에게는 그저 ‘노씨’네로 알려진 그 집으로 내가 이사를 온 건 2009년 7월 11일, 16일이다.
왜 이사를 두 번씩이나 했느냐고? 서로 다른 곳에 살던 두 사람이 각각 편한 날을 잡아 짐을 옮겼기 때문이다. 둘 중 한 사람은 물론 나고, 다른 한 사람은 내 남자친구다(이곳에 오면서부터 줄곧 함께 살고 있는 그를 이 글에서는 K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렇다. 나는 함양으로 이사 오면서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했고, 그것이 내가 이 마을에서 새댁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나보다 앞서 이사를 하게 된 그를 위해, 나는 트럭을 함께 타고 오면서 길 안내를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짐을 부리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방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풀 묻은 도배지와 빗자루를 들고는 흡사 벌이라도 받듯 하염없이 앉고 서고 붙이는 일을 반복하던 그때. 동네 분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대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변변한 세간이라곤 하나 없이 난장판이 된 집안을 휘휘 둘러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굳은 날 이사하느라 젊은 신랑이랑 새댁이 욕보는가벼.”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바로 그 순간, 익명의 그가 꽃으로 피어난다고. 하지만 아주머니는 이름 대신 새댁이라는 호칭을 내게 붙여 주었고, 그리하여 나는 새댁으로 재탄생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60~70대 어르신들이 주민의 대부분인 시골의 작은 동네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녀가 부부 아닌 이름으로 함께 사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이렇게 갑자기, 둘이 무슨 사이냐고, 결혼은 했느냐고 한 번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새댁이라 부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좀 당황했다. 그 호칭이 내겐 아주 많이 낯설고 겸연쩍은 것이었기에 더더욱.
내게는 시골이어서 가능했던 일
▲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충만함과 행복감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열망에, 나는 용기를 내어 동거를 선택했다. ©자야
내가 계속 도시에 살았더라도 누군가와의 동거를 생각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확답을 할 순 없지만, 안 그랬을 확률이 더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몇 번의 연애와, 결정적으로는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면서 내게는 이미 남녀관계(이성애자에 한해)에 대한 무지갯빛 판타지가 사라진 지 오래이므로.
더군다나 함께 산다는 건 단지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섹스를 한 뒤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그건 오히려 각자의 생을 통해 형성돼 온 사소한 습관과 버릇, 사고하고 행동하는 패턴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다 애매하게 화해 내지는 봉합되는 과정이 무한 반복되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쯤 되면 사람들은 묻는다. 판타지가 없으면 오히려 상대에 대한 큰 기대 없이, 차이를 인정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느냐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처럼 이성적인 타입이 못 되는 탓에 종종 사랑과 집착을, 배려와 간섭을, 그리고 믿음과 무심함을 분별하지 못해 질곡에 빠진다. 아니, 그 두 영역을 칼금 긋듯이 양분하기 위해 지나치게 애를 씀으로써 관계를 긴장시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또 있다. 멋지고 완벽한 남녀관계에 대한 판타지는 깨졌을지언정, 슬프게도 내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순정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와 상대의 관계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 때면, 스스로를 괴롭히든지 상대를 못 살게 굴든지(보통은 둘 다 해당됨) 해서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내 연애사의 불행은 주로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왜 그와의 동거를 선택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혼자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남원 생활을 정리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일상을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을 필요로 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의 공간적 특성 때문에 그런 열망이 더 강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 도시에서 살 때 나는 근본적인 상실감과 결핍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집에서 살건, 누구와 함께 있건 늘 외롭고 허전하고 심지어는 모욕감을 느꼈으므로, 오히려 연애라도 하게 되면 사랑조차 그런 나를 치유하고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심한 좌절에 빠지곤 했다.
반면 내 경험상 시골에서는 홀로 가만히 있을 때 존재 자체의 충만함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내가 느끼는 그 충만함,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묘한 느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순수한 열망에 가깝다. 나라는 인간이 비록 관계 맺기에 서툴고 사랑하는 데 미성숙할지라도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쭙잖은 용기가 생긴 것 역시, 내게는 시골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정에서 시작해도 나쁘지 않아
▲ 콩밭의 풀을 매는 K의 뒷모습. 육체 노동이 늘 필요한 시골에서는 함께 일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자야
또 하나, 동거를 선택한 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진보적인 목적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아닌 한(이런 곳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보통 시골 마을의 정서는 지극히 보수적이다. 그러니 타지에서 굴러온 혼자 사는 여자가, 그것도 뭘 해서 먹고 사는지 근본을 알 수 없이 툭하면 며칠씩 집을 비우는(현재 내 조건이 이러하다) 것을 좋게 볼 리 없지 않은가.
시골에서는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의 노동력이 늘 필요하다는 점도 적극적으로 동거를 고려하는 이유가 됐음은 물론이다. 낡은 집을 그때그때 적절히 손보는 일이나, 적은 규모일지언정 텃밭을 가꾸고 겨우내 아궁이에 지필 땔감을 마련하는 일 등은 귀촌 초보자가 혼자 하기에 무엇 하나 녹록한 게 없고, 몸 쓰는 일의 특성상 혼자 하면 더 고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거가(남녀를 불문하고)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차선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한 사람이, 혹은 돌아가면서 집을 건사하면 여러 모로 안정감이 생기고, 또 필요한 일을 함께하면 힘든 가운데서도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 가지 소망은 동거인이 적어도 나보다 기운이 세고 겁이 없으며 한 백배쯤 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마침 K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2006년 겨울, 요가 선생과 수강생으로 만난 이후 줄곧 내 곁에서 묵묵히 마음을 써주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해 온 K는, 우선 나보다 몸이 튼튼하다. 심성도 꼬인 데 없이 선하다. 무엇보다 제 성질을 못 이겨 화르르 타오를 때가 많은 나를 묵묵히 봐주는 인내심과, 그걸 제 품에 안아 주는 다정함을 지녔다. 심지어는 나와 비슷하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하는 직장을 싫어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생활을 이미 오랫동안 실천해 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이런 파트너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때만 해도 나에게 그는 사랑하는 이성이라기보다 고맙고 편한 친구에 가까웠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좋기도 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가장 나쁜 단점들 때문에 더욱 격렬해지기도 하지만, 그와 달리 우정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다”는 작가 미셸 트루니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는, 사랑의 격정보다는 우정 어린 관계에서 시작하는 게 나쁘지 않았던 것.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고백하던 그에게 매정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는 언제고, 정작 내가 나서서 먼저 동거를 제안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자야)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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