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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셋째 이야기②
그녀가 내 몸을 마사지하기 이전에 나는 이미 내 몸에 그런 덩어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인도 요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수련을 하다가 특정 아사나(자세)를 취했을 때 배꼽 근처에서 그것이 만져진 것이다. 처음엔 그저 뱃가죽이 굳었는가 싶었다. 하지만 여러 번에 걸쳐 주의 깊게 탐색해 보니 단지 겉이 딱딱한 정도가 아니었다. 뱃살 아래 단단하게 자리한 그것은 흡사 밥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반경이 상당히 넓을 뿐 아니라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배 안쪽 깊이 뻗어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몇몇 학생들에게 같은 아사나를 취하게 한 후 손으로 직접 그들의 배를 만지며 확인했지만 누구에게서도 그런 덩어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당혹해 하는 나와 달리 인도인 친구들은 순서를 정해 내 안의 그것을 만져보더니, 하나 같이 신기하다는 듯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댔다. “세상에나! 이거 진짜 딱딱하고 큰걸?”
같은 비디오만 틀며 살 순 없어
훗날 한국에 돌아와 각종 정보를 찾아보고 또 상담을 한 결과, 내 배 안의 그것을 한의학계에서는 적(積) 혹은 적취(積聚)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쉽게 풀이하면 독소가 쌓여 생긴 덩어리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암과 흡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고 했다. 덜컥 겁을 먹은 나는 요가 선생님께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선생님께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이 물질화되어 나타난 것 같다고 조심스레 진단하시며,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초연해지는 수련을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감정에 초연하기는커녕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독한 감정들을 어쩌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런 몹쓸 원흉(!)이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는 자체에 일단 화가 났고, 더욱이 그 원인이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나 자신한테 있다는 점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똑바로 보려는 대신, 과거로 회귀하여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보고자 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사실은 나 아닌 다른 것에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예전에 관심을 갖고 보던 각종 심리학 이론이며 치유 관련 서적들을 다시 꼼꼼히 읽어가며 유아기의 경험이 자아(에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춤 테라피’며 ‘쓰기명상’ 같은, 주로 무의식의 표출을 다루는 수련을 경험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기억과 상처를 들추는 작업을 시도했다. 심지어 명상을 할 때도 의식적으로 그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과거를 탐색하고 성찰하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을 끄집어내고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내 안에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어린 자아와 깊게 접촉할 수 있었다고 할까. 아울러 나만 상처받은 게 아니라,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여겨온 사람들도 알고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치유가 필요한 인간이라는 점을 알고는 연민이 가득 차오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또한 깨닫고야 만다. 내가 과거에 겪은 일들은 이미 모두 지나갔다는 것을. 그러므로 설사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 하더라도 의식이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재의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은 터럭만큼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 산 정상에 오르고 나면 다시 마을로 내려와야 하듯, 과거를 보았으면 현재로 돌아오는 게 맞는 순서인 거다. 이를 간과하면 '계속해서 (과거를 재현하는) 같은 비디오만 틀어대며' 살 수밖에 없다고, 내게 처음으로 영성수련을 안내한 선생님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고백하자면 그 시기의 내 모습은 같은 비디오를 틀어대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을 찾겠다며 과거에 뛰어들었으면서도, 정작 현재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한없이 무관심했으니까 말이다. 당시에 나는 몸이 요구하는 적절한 영양을 제 때 공급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감정이 상하면 굶고 충동적으로 먹기를 반복했다.
또한 오래도록 갈등하고 싸우면서 서로의 가슴을 할퀴어 온 부모님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회복하길 원했지만, 나는 그를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 부드럽게 말하고 따뜻하게 안아 드리고 싶은 나의 진짜 마음을 외면하고, 해묵은 습관처럼 여전히 쌀쌀맞고 차갑고 못된 딸의 역할만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몸과 마음에 고통이 찾아오면 습관적,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봐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내 몸과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결국 나는 요가와 명상 수련의 근본자리야말로 내가 돌아가야 할 곳임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에 깨어 있는 것, 그리하여 매 순간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자 ‘왜’에 집중돼 있던 질문들이(내 몸에 왜 이게 생겼을까, 나는 왜 아플까, 무엇이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등등)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내 몸은 어떤가. 지금 내 몸은 무엇을 원하는가. 내 몸 상태에 대한 나의 마음은 지금 어떤가. 슬픈가, 화가 나는가. 불편한가, 편안한가. 부모에 대한 내 감정은 아직도 애증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지금 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것과 관련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남원에서 그녀들을 만난 것은, 과거를 돌고 돌던 내가 겨우 현재로 돌아왔을 무렵의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행히 그 만남을 계기로 나는 조금이나마 일보전진을 할 수 있었다. 우선은 내 몸 속 덩어리에 대해 분노하기를 멈추었다. ‘너 왜 거기 있어? 빨리 꺼져버려’ 하고 따져 묻고 혐오하는 대신 ‘아, 너 거기 있구나’ 하고 저항 없이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익숙한 육체적 고통(주로 소화기계와 신경계에서 일어나는)에 대해서도 나는 태도를 바꿨다. 가장 먼저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 스스로 갖게 된 ‘나는 늘 어딘가 아픈 사람'이라는 상(像)을(이런 상을 갖게 되는 원인은 분명 있다. 그렇다고 그 상을 계속 고수한다면 평생 그에 묶여 살 수밖에 없다) 놓아 버렸다. 나아가 요가와 명상, 혹은 다른 어떤 수련을 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몰래 품곤 하던, ‘이걸로 내 몸과 마음을 반드시 변화시키고야 말 거야. 꼭 그렇게 되겠지.’ 라는 값싼 투지와 희망도 내려놓았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현재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연습하면, 설혹 전과 똑같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로운 순간이 오더라도 그에 대한 체감지수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그동안 줄곧 100이라 ‘생각’해 온 아픔이 고작해야 60이나 50 정도밖에 안 되고, 때로는 그 이하이기도 하다는 것을 ‘사실’로 경험한다고 할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현상이 그러하듯 고통에도 유효기간이 있으며, 따라서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애써 그 고통을 붙잡고 있지 않는 한 제 발로 사라진다는 것도 얼핏 볼 만큼은 눈이 떠지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내가 만든 악순환은 내가 끊어야
남원에서 두 여자를 만난 이후로 어느새 2년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여러 모로 건강을 회복했다. 함양에 오면서 누군가와 삶을 나누게 된 것이 나의 정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작은 텃밭이나마 내 손으로 직접 가꾸기 시작한 건 무엇보다도 내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덕분에 밥상이 바뀌었고, 흙을 만지며 땀 흘리는 시간도 많아졌고, 또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머리가 아닌 몸을 통해 성장하고 확장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아플 때가 간혹 있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아니, 확실히 있다. 다만 현재 내가 몸과 마음을 잘 보살피지 못해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만큼 몸의 기억, 세포에까지 뿌리 내린 정보는 오래도록 지속되고 틈만 나면 올라오기에, 충동적인 사랑과 일시적인 돌봄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 깊은 곳에 각인되어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몸과 마음의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요가 용어로 삼스카라(samskara. ‘조건화된 흐름’ 혹은 ‘잠재된 각인’이라 번역됨)라고 한다. 이 삼스카라는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함으로써 짓는 모든 행위(업 혹은 카르마라고 함)에 의해 형성되지만, 역으로 내가 짓는 업의 패턴(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는 양식)을 또한 규정한다.
예를 들어 종종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짜증과 화의 파동이 점점 깊고 넓게 그의 무의식을 점령하여,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까지 습관적으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성마른 사람이 되고 만다. 이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 종을 울리는 것을 반복하자 나중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개가 침을 흘리게 된다는 ‘파블로프 효과’와 삼스카라의 작동 메커니즘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게 오는 자극의 실상을 미처 의식하고 알아차리기도 전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국 내가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부정적인 업은 부정적인 삼스카라로 이어지고 이는 부정적인 습관과 행동양식으로 뿌리내린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새로운 부정적인 업이 지어진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악순환인 셈이다.
그러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첫째는 새로운 부정적인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부정적인 삼스카라가 쌓이는 것을 방지한다. 둘째는 이미 존재하는 부정적인 삼스카라가 어떤 계기를 통해 표면에 올라올 때 그에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과거의 업에 의해 생긴 부정적인 삼스카라를 약화하고 소멸시키는 작용을 한다.
별다른 현재적 이유 없이 내 몸이 아파올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쌓여 있는 삼스카라의 작동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악순환 속에 오래도록 방치해 온 내 몸과 마음이 지금 나를 시험하는 중이라고. '아프니까 짜증나지? 지금쯤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에게 화내고 소리쳐야 정상인데? 그러다 제풀에 지쳐 울어야지. 넌 늘 그렇게 해왔잖아.' 이렇게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장난치고 있다고.
가짜 아닌 진짜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이런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조건반사에 의해 반응하지 않는 것, 오직 그뿐이다. 그러려면 내 몸과 마음이 지껄이는 거짓 얘기 대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인내심과 주의 깊은 관찰력과 유머가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렵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잠시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숨이 잦아들고 고요해지는 그 사이, 교활하게 까불고 유혹하는 내 몸과 마음의 장난에 잠시 웃어주는 그 사이에 지나가야 할 것들은 다 지나가니까. 그러고 나면 비로소 지금 몸이 쉬길 원하는지, 햇볕을 쪼이길 원하는지, 단식을 원하는지 아니면 풍족하게 먹길 원하는지가 보이고, 마음이 화가 나 있는지 슬퍼하고 있는지가 느껴지니까.
이때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은 알아차림에 의해 선택된 행동이지 더 이상 습관적인, 무의식적인 반응은 아니다. 이 두 가지의, 언뜻 사소해 보이나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차이를 일상에서 깨닫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몸과 마음을 살리는 진정한 수련이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저수지에서 발길을 돌린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전히 느리고 천천히.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대안언론 <일다> 바로가기
그녀가 내 몸을 마사지하기 이전에 나는 이미 내 몸에 그런 덩어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인도 요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수련을 하다가 특정 아사나(자세)를 취했을 때 배꼽 근처에서 그것이 만져진 것이다. 처음엔 그저 뱃가죽이 굳었는가 싶었다. 하지만 여러 번에 걸쳐 주의 깊게 탐색해 보니 단지 겉이 딱딱한 정도가 아니었다. 뱃살 아래 단단하게 자리한 그것은 흡사 밥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반경이 상당히 넓을 뿐 아니라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배 안쪽 깊이 뻗어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몇몇 학생들에게 같은 아사나를 취하게 한 후 손으로 직접 그들의 배를 만지며 확인했지만 누구에게서도 그런 덩어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당혹해 하는 나와 달리 인도인 친구들은 순서를 정해 내 안의 그것을 만져보더니, 하나 같이 신기하다는 듯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댔다. “세상에나! 이거 진짜 딱딱하고 큰걸?”
같은 비디오만 틀며 살 순 없어
훗날 한국에 돌아와 각종 정보를 찾아보고 또 상담을 한 결과, 내 배 안의 그것을 한의학계에서는 적(積) 혹은 적취(積聚)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쉽게 풀이하면 독소가 쌓여 생긴 덩어리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암과 흡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고 했다. 덜컥 겁을 먹은 나는 요가 선생님께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선생님께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이 물질화되어 나타난 것 같다고 조심스레 진단하시며,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초연해지는 수련을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감정에 초연하기는커녕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독한 감정들을 어쩌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런 몹쓸 원흉(!)이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는 자체에 일단 화가 났고, 더욱이 그 원인이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나 자신한테 있다는 점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똑바로 보려는 대신, 과거로 회귀하여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보고자 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사실은 나 아닌 다른 것에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예전에 관심을 갖고 보던 각종 심리학 이론이며 치유 관련 서적들을 다시 꼼꼼히 읽어가며 유아기의 경험이 자아(에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춤 테라피’며 ‘쓰기명상’ 같은, 주로 무의식의 표출을 다루는 수련을 경험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기억과 상처를 들추는 작업을 시도했다. 심지어 명상을 할 때도 의식적으로 그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과거를 탐색하고 성찰하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을 끄집어내고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내 안에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어린 자아와 깊게 접촉할 수 있었다고 할까. 아울러 나만 상처받은 게 아니라,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여겨온 사람들도 알고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치유가 필요한 인간이라는 점을 알고는 연민이 가득 차오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또한 깨닫고야 만다. 내가 과거에 겪은 일들은 이미 모두 지나갔다는 것을. 그러므로 설사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 하더라도 의식이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재의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은 터럭만큼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 산 정상에 오르고 나면 다시 마을로 내려와야 하듯, 과거를 보았으면 현재로 돌아오는 게 맞는 순서인 거다. 이를 간과하면 '계속해서 (과거를 재현하는) 같은 비디오만 틀어대며' 살 수밖에 없다고, 내게 처음으로 영성수련을 안내한 선생님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고백하자면 그 시기의 내 모습은 같은 비디오를 틀어대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을 찾겠다며 과거에 뛰어들었으면서도, 정작 현재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한없이 무관심했으니까 말이다. 당시에 나는 몸이 요구하는 적절한 영양을 제 때 공급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감정이 상하면 굶고 충동적으로 먹기를 반복했다.
또한 오래도록 갈등하고 싸우면서 서로의 가슴을 할퀴어 온 부모님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회복하길 원했지만, 나는 그를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 부드럽게 말하고 따뜻하게 안아 드리고 싶은 나의 진짜 마음을 외면하고, 해묵은 습관처럼 여전히 쌀쌀맞고 차갑고 못된 딸의 역할만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몸과 마음에 고통이 찾아오면 습관적,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봐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내 몸과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결국 나는 요가와 명상 수련의 근본자리야말로 내가 돌아가야 할 곳임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에 깨어 있는 것, 그리하여 매 순간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자 ‘왜’에 집중돼 있던 질문들이(내 몸에 왜 이게 생겼을까, 나는 왜 아플까, 무엇이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등등)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내 몸은 어떤가. 지금 내 몸은 무엇을 원하는가. 내 몸 상태에 대한 나의 마음은 지금 어떤가. 슬픈가, 화가 나는가. 불편한가, 편안한가. 부모에 대한 내 감정은 아직도 애증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지금 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것과 관련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남원에서 그녀들을 만난 것은, 과거를 돌고 돌던 내가 겨우 현재로 돌아왔을 무렵의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행히 그 만남을 계기로 나는 조금이나마 일보전진을 할 수 있었다. 우선은 내 몸 속 덩어리에 대해 분노하기를 멈추었다. ‘너 왜 거기 있어? 빨리 꺼져버려’ 하고 따져 묻고 혐오하는 대신 ‘아, 너 거기 있구나’ 하고 저항 없이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익숙한 육체적 고통(주로 소화기계와 신경계에서 일어나는)에 대해서도 나는 태도를 바꿨다. 가장 먼저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 스스로 갖게 된 ‘나는 늘 어딘가 아픈 사람'이라는 상(像)을(이런 상을 갖게 되는 원인은 분명 있다. 그렇다고 그 상을 계속 고수한다면 평생 그에 묶여 살 수밖에 없다) 놓아 버렸다. 나아가 요가와 명상, 혹은 다른 어떤 수련을 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몰래 품곤 하던, ‘이걸로 내 몸과 마음을 반드시 변화시키고야 말 거야. 꼭 그렇게 되겠지.’ 라는 값싼 투지와 희망도 내려놓았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현재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연습하면, 설혹 전과 똑같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로운 순간이 오더라도 그에 대한 체감지수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그동안 줄곧 100이라 ‘생각’해 온 아픔이 고작해야 60이나 50 정도밖에 안 되고, 때로는 그 이하이기도 하다는 것을 ‘사실’로 경험한다고 할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현상이 그러하듯 고통에도 유효기간이 있으며, 따라서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애써 그 고통을 붙잡고 있지 않는 한 제 발로 사라진다는 것도 얼핏 볼 만큼은 눈이 떠지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내가 만든 악순환은 내가 끊어야
남원에서 두 여자를 만난 이후로 어느새 2년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여러 모로 건강을 회복했다. 함양에 오면서 누군가와 삶을 나누게 된 것이 나의 정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작은 텃밭이나마 내 손으로 직접 가꾸기 시작한 건 무엇보다도 내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덕분에 밥상이 바뀌었고, 흙을 만지며 땀 흘리는 시간도 많아졌고, 또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머리가 아닌 몸을 통해 성장하고 확장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아플 때가 간혹 있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아니, 확실히 있다. 다만 현재 내가 몸과 마음을 잘 보살피지 못해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만큼 몸의 기억, 세포에까지 뿌리 내린 정보는 오래도록 지속되고 틈만 나면 올라오기에, 충동적인 사랑과 일시적인 돌봄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 깊은 곳에 각인되어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몸과 마음의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요가 용어로 삼스카라(samskara. ‘조건화된 흐름’ 혹은 ‘잠재된 각인’이라 번역됨)라고 한다. 이 삼스카라는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함으로써 짓는 모든 행위(업 혹은 카르마라고 함)에 의해 형성되지만, 역으로 내가 짓는 업의 패턴(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는 양식)을 또한 규정한다.
예를 들어 종종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짜증과 화의 파동이 점점 깊고 넓게 그의 무의식을 점령하여,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까지 습관적으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성마른 사람이 되고 만다. 이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 종을 울리는 것을 반복하자 나중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개가 침을 흘리게 된다는 ‘파블로프 효과’와 삼스카라의 작동 메커니즘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게 오는 자극의 실상을 미처 의식하고 알아차리기도 전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국 내가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부정적인 업은 부정적인 삼스카라로 이어지고 이는 부정적인 습관과 행동양식으로 뿌리내린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새로운 부정적인 업이 지어진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악순환인 셈이다.
그러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첫째는 새로운 부정적인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부정적인 삼스카라가 쌓이는 것을 방지한다. 둘째는 이미 존재하는 부정적인 삼스카라가 어떤 계기를 통해 표면에 올라올 때 그에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과거의 업에 의해 생긴 부정적인 삼스카라를 약화하고 소멸시키는 작용을 한다.
별다른 현재적 이유 없이 내 몸이 아파올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쌓여 있는 삼스카라의 작동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악순환 속에 오래도록 방치해 온 내 몸과 마음이 지금 나를 시험하는 중이라고. '아프니까 짜증나지? 지금쯤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에게 화내고 소리쳐야 정상인데? 그러다 제풀에 지쳐 울어야지. 넌 늘 그렇게 해왔잖아.' 이렇게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장난치고 있다고.
가짜 아닌 진짜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이런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조건반사에 의해 반응하지 않는 것, 오직 그뿐이다. 그러려면 내 몸과 마음이 지껄이는 거짓 얘기 대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인내심과 주의 깊은 관찰력과 유머가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렵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잠시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숨이 잦아들고 고요해지는 그 사이, 교활하게 까불고 유혹하는 내 몸과 마음의 장난에 잠시 웃어주는 그 사이에 지나가야 할 것들은 다 지나가니까. 그러고 나면 비로소 지금 몸이 쉬길 원하는지, 햇볕을 쪼이길 원하는지, 단식을 원하는지 아니면 풍족하게 먹길 원하는지가 보이고, 마음이 화가 나 있는지 슬퍼하고 있는지가 느껴지니까.
이때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은 알아차림에 의해 선택된 행동이지 더 이상 습관적인, 무의식적인 반응은 아니다. 이 두 가지의, 언뜻 사소해 보이나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차이를 일상에서 깨닫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몸과 마음을 살리는 진정한 수련이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저수지에서 발길을 돌린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전히 느리고 천천히.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대안언론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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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마을 ‘댁’이라 불리는 여자들에 대하여 (1) | 2011.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