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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경고하시오, ‘성추행하지 말라!’고
지하철 성추행 예방요령과 여성의 몸 <일다> www.ildaro.com
서울지하철 안에서는 성추행 예방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성추행 대응 및 예방요령 안내영상과 게시물 등을 볼 수 있다. 그 요령을 살펴보면, 신체 접촉 시 즉각 불쾌감을 표시하고 큰 소리로 주위의 도움을 요청한다, 가급적 제일 앞쪽이나 뒤쪽 칸을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가방 등으로 뒤를 가린다, 의심스러울 경우 등을 보이기보다 옆으로 몸 자세를 바꾼다 등의 내용이다.
서울도시철도공사와 철도경찰대 등이 지하철 성추행 예방에 관심을 갖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임에도, 위와 같은 안내영상을 보고 불쾌감을 표시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피해자에게 행동요령을 알려주는 것보다 ‘성추행 하지 마시오’라는 글씨나 크게 붙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다.
여자들 처신 잘하라는 게 성추행 예방?
▲ 서울시 지하철 모니터 '성추행 대처요령' © 신진희
‘머리 속으로 성추행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생각해두지만, 막상 당했을 때는 당황해 몸이 굳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성추행 피해 후일담을 종종 듣게 된다.
나만해도 그렇다. 처음 통학버스 안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나이라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성인이 되어 잘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당황하고 겁이 나는데다가 ‘여자답게 행동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평범한 여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큰소리를 낸다는 게, 상황이 닥쳐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며 대응했을 때,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도망가는 가해자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부류의 남성들도 종종 보인다. 지난해 누군가 지하철 성추행 현장을 휴대폰 영상으로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것이 뉴스에까지 보도된 적이 있다. 나이가 꽤 많은 영상 속 가해자는 남이야 보든 말든 대놓고 뻔뻔하게 어린 여성을 추행했다.
나도 몇 해 전 막차를 타려고 플랫폼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뻔뻔한’ 가해자를 만난 적이 있다. 갑자기 껴안으려 하는 중년의 남성을 보고 기겁했는데, 설마 그렇게 이목이 많고 밝은 장소에서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설령 취한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내가 불쾌감을 표시하자, 그 남자는 “내가 일부러 그랬다. 남자가 젊고 이쁜 아가씨를 보면 껴안고 싶고 그런 거 아니냐!” 하며 큰소리 쳤다.
심각한 경우엔 폭력을 쓰는 가해자도 있다. 나의 지인은 자신의 가슴을 만진 남자의 뺨을 반사적으로 한 대 때렸다가 배를 걷어차일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빗맞았기에 망정이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성들이 스스로 몸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성추행 가해자가 위협을 가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편들어 주지 않을 경우, 피해자가 직접적으로 가해자의 행위를 제지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지하철 성추행 발생을 예방하거나 대처에 도움을 주려면, 가해자를 향해 경고하는 내용이거나, 피해를 목격하거나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할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안내해 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신고해주거나, 말 한마디라도 거들어 주면 상황은 훨씬 나아질 수 있다.
왜 가해자가 아닌, 여성들의 행동을 위축시키나
1998년 지하철 성추행 문제에 대해, 20대 페미니스트들이 가해자를 대상으로 한 안내방송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여성들 다수가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성추행을 경험한 적이 있고,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추행 예방 방송’은 당시 절박한 요구였다.
그때 여성들의 핵심 요구사항은 “성추행 시 벌금 300만원 또는 징역1년에 처한다”는 문구를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하철 공사 측의 반대로, 위 내용은 안내방송에 포함되지 못했다. 소수의 성추행범을 제외한 대다수 승객들에게 형사처분 운운하는 문구가 거슬린다, 외국인들에게 한국남성이 ‘예비 성추행범’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당시 ‘성추행’이라는 말 자체를 공개적으로 꺼내기 부끄러워한 분위기도 있다.
결국 문구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할 때 법으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다. ‘성추행’이라는 용어도 들어가 있지 않은, 참 애매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가해 행위에 대한 경고는 이렇게 조심스러운데, 피해 대상자의 행동에 대한 말들은 차고 넘친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잠재적 피해자-여성’들을 향해서만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인가. 이런 식의 대응요령, 예방요령은 일면 여성들을 위한 지침인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여성들의 일상적인 행동을 위축시키고 제한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노출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강간하지 말라’고 해!
▲ 2012년 5월 25일 캐나다 토론토. 두번째 <슬럿워크> 포스터 © slutwalktoronto.com
5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슬럿워크>(slut walk) 시위가 진행되었다. <슬럿워크>는 2011년 1월 토론토 경찰관이 한 대학 강연에서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슬럿(slut: 잡년)처럼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데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
<슬럿워크> 시위는 성폭력 피해자의 품행을 문제 삼는 발언에 대항에, 여성들이 역으로 ‘헤픈’ 복장을 입고 시위에 나선 것 때문에 미디어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핵심은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가해자에겐 관대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인식이 뿌리 깊은 현실이었다.
지난 20일경 한 서울대학생이 자정쯤 봉천동 주택으로 귀가하던 같은 학교 졸업생을 따라 들어가 성추행하고 도망치다 붙잡힌 일이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관악경찰서 관계자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름에는 날씨가 더우니 지나가다 여자보고 가슴 만지고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말을 해 논란이 되었다.
작년 문제가 된 캐나다 경찰의 말에나, 한국 경찰의 말에나 “여성의 노출이 성폭력을 부른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성폭력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물리적, 사회적 권력 관계 안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여성이 행실이 문제라는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행동을 문제 삼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려 성폭력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릴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또 다시 모욕을 주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슬럿워크> 시위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으로 번져나갔다. 토론토에서는 매년 정례화 되는 분위기다. 한국의 <잡년행동>도 지난해 7월 첫 시위를 시작으로 다양한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만큼 이 문제가 공통적으로 여성들이 ‘심각한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사안이며, 일시적인 시위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가 반복 학습해야 할, 성폭력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슬럿워크> 시위의 문구 몇 가지를 소개한다.
“내가 무엇을 입고 있더라도-심지어 네 앞에서 벗고 있더라도, ‘아니오’(No)는 ‘아니오’(No)다”
“우리는 ‘강간하지 말라’ 대신 ‘강간당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에게 ‘어떻게 입을지’ 말하지 말고, 그들에게 ‘강간하지 말라’고 말하라.” (박희정)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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