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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의 어린 나를 만나러 가다
<꽃을 던지고 싶다> 8. 꿈이 안내해준 사건이 일어난 곳
*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기억들은 제각기 다른 상황에서 떠오른다. 관계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고, 막 이혼을 하고 이제 모든 문제들이 풀려 나갈 즈음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 또는 어른이 된 뒤 강간이나 다른 공격을 당하자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력이 기억나곤 한다.” -로라 데이비스, 엘렌 베스 <아주 특별한 용기>
왜 삼촌에 대한 기억이나, 아홉 살 때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꿈은 왜 나를 열세 살로 안내를 했을까?
왜 나에게 처음의 폭력의 기억,
열두 살의 삼촌의 기억도 아닌
그 곳으로 그 고통으로 나를 데리고 갔을까?.
꿈이 안내해준 열세 살의 기억.
그 사건이
두려움과 고통으로 나를 지배하는 것이었을까?
죽음과 마주하는 느낌.
그 꿈은 어떤 의미였을까?
25년간 나를 관통해온 그 곳.
꿈을 꾸고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나의 피해를 기록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실제 기록하기까지 꼬박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때때로 떠오르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것 같았으므로 그 사건을 이야기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힘들 거라 예상하면서도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제는 그 피해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나의 삶을 흔들고 있는 그 기억들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 사건은 25년 전 기억이 아닌 나의 삶을 관통하는 것이었으므로, 단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는 기억에서 가능하다면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은 바람이었다.
그 꿈의 장소를 찾아가기로 결정을 하고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난 실행을 해보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25년 전 그 피해의 고통을 토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기억. 그 날의 고통을 찾아서 어린 내가 받았을 고통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 장소를 찾아가면 견뎌낼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 함께 동행할 안전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25년 전의 고통에 잠식되지 않게 할 현실의 인물이 필요했다. 내가 울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감이 있어야 했다. 어설픈 위로 따위를 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뭐가 필요할까? 카메라. 그 장소를 찍어야겠다. 그리고 그 사진을 태우리라 그렇게 25년 전 나를 태워버리리라. 어린 나를 이제는 놓아 보내리라. 무엇보다도 그 장소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니 차도 있어야겠다. 그리고 손수건. 충분히 애도하리라.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안정제. 무너지지 않으리라. 실행을 결심하고 그렇게 한 달을 준비했다.
준비하는 한 달 동안 요동치는 감정을 감당해야 했다. 두려움, 공포, 그리고 몸의 고통, 악몽. 그러나 나에게 피해 장소를 마주대하는 것은 그 고통을 마주대하는 힘을 줄 수 있을 거라 여겨졌기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머리 속에서 그 장소를 마주대하는 연습을 한 달 동안 수백 번 반복했다.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두려웠다. 약속한 날이 다가 올수록 도망치고 싶었다. 약속 전날은 못 가겠다고, 난 할 수 없다고 전화를 할까? 망설임 속에서 전화기를 몇 번을 만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전화기를 치워버렸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더 두렵고 불안해졌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나에게도 내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나에게 단 하루만 주어지더라도 나는 그곳을 가보리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25년 전의 일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했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맑은 날이었지. 누구라도 행복해질 수는 맑은 날. 아무도 불행하거나 우울하다 여겨지지 않을 그런 맑은 날. 삶이 나를 배반했듯 날씨마저도 배반했던 날. 그곳에서 가해자를 마주치면 어떻게 하지? 열세 살의 나처럼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하면 어떡할까? 난 여전히 열세 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수업이 진행되는 시간이었으므로 학교 등교 길은 고요했다. 그 날은 이른 아침이라 고요했는데…. 운전을 하며 천천히 그 곳을 향해 다가갔다.
꿈에서의 그 곳을.
이상하리만큼 그 사건이 있은 후 열세 살의 기억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날 이후 학교에 어찌 다녔는지, 내가 늘 파고들던 학교 도서관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운동장은 어떤 크기였으며 학교 교문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나는 누구랑 공부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다.
열두 살에 중간고사에서 틀린 시험문제와 등수가 다 기억이 남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대한 기억, 열세 살의 기억은 아주 까마득하여 어느 것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내가 졸업은 했던 것일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학교로 가던 그 산길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 곡선의 오르막길, 돌계단의 느낌. 거리감. 그리고 등산로의 철문까지. 내 기억 속의 그곳은 너무도 생생하게 고통과 함께 각인되어 있다. 그 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두려웠기에 나는 오랜 시간 그 곳의 기억을 닫아 두었다.
집에서 학교에 가는 큰 도로 옆의 인도를 따라가다 보면 학교팻말이 보이는 산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적막한 산길은 시멘트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길은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길 옆으로 한쪽은 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길이 있었고, 한쪽은 산을 깎았다는 것을 알려주듯 절벽이 있었다. 산의 가운데를 파서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산 아래에서 학교까지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15분내지 20분은 족히 걸렸다.
시간이 너무나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산이었던 그 곳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고, 등산로도 그 안의 방공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있었다. 단 한 번도 그 곳이 변해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곳임으로, 흉측하게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이므로. 나는 열세 살을 살고 있는 서른 여덟의 몸을 가진 괴물이 되어 있었지만, 세상은 나의 고통과 치유와 상관없이 변화하고 성장했다.
피해 장소에 가보리라 다짐하고 실행하기까지 1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에게 허무하리만큼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오직 나만 25년 전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5년 전의 나를 만나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네가 도망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설령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더라도, 네가 강간을 겪을 이유는 없었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오랫동안 혼자 두어서 미안하다고, 이제야 너를 만나러 왔다고, 미안하다고 해야 했다. 그러나 그나마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25년 전의 나를 만나러 가는 계획은 나의 상처를 똑바로 마주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었지만, 25년 전 성장이 멈춰버린 나를 확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허무하게 끝난 어린 나를 찾아가는 작업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과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함께 동행해주신 분의 말처럼 과거는 사라졌고, 나도 언젠가는 상처 없이 과거를 마주대할 수 있는 그런 날이 과연 올 수 있는 것일까?
[덧붙여: 힘든 여정을 바쁜 와중에도 인내와 너그러움으로 함께해주신 <일다>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_너울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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