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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언론’ 아동성폭력 보도윤리 실종
[여성주의 저널 일다] 얼굴사진 오보까지…상업주의·선정성 심각
지난 8월 31일, 잔혹한 아동성범죄를 저지른 범인 고모 씨가 검거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을 가족과 함께 잠들어 있던 집에서 이불채로 납치했다는 엽기적인 행각 때문에 사건은 우리 사회에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인 만큼 언론보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 보도양상을 보면 성폭력 사건을 언론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쾌감을 지울 수 없다.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할 성폭력사건의 보도윤리는 실종된 채, 성폭력 문제를 왜곡하거나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데 일조하는 기사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쟁적으로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다 엉뚱한 사람의 사진을 가해자로 보도하는 사건마저 발생했다.
과열된 상업주의, 가해자 얼굴공개 경쟁이 낳은 참사
<조선일보>는 9월 1 일자는 “병든 사회가 아이를 범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싣고 범인의 ‘얼굴사진’을 실었다. 곧이어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이 사진이 실제 범인의 사진이 아닌, 범죄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사진이 잘못 게재된 것임이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2일자 인터넷판을 통해 오보를 인정했으며 이튿날 종이신문에 '바로 잡습니다'라는 글을 게재하고 사진이 잘못 게재되게 된 경위를 밝혔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취재팀이 31일 밤 범인 고모 씨의 모습이 비친 호송사진과 CCTV화면을 확보했고, 가해자의 미니홈피와 이 사진들을 근거로 주변인물 미니홈페이지를 검색하던 중 고모 씨와 닮아 보이는 인물 사진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후 ‘경찰과 주민 등 10여 명에게 범인이 맞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한다. 가해자의 얼굴사진을 얻기 위해 필사적이다시피 매달린 것이다.
강력범죄자의 얼굴공개는 2009년 연쇄살인범 강모 씨의 얼굴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공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공개하면서 이후 언론의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범죄가 확정되지 않은 가해자를 언론들이 각자의 자의적 기준으로 공개여부를 결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형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는 근거사례를 <조선일보>가 스스로 제공해준 셈이다.
성폭력 범죄가 발생했을 때 무엇보다 “공익”을 염두에 두는 언론이라고 한다면 가져야할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비슷한 범죄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또 이미 상처 입은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우리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심층 취재해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조선일보>는 누가 먼저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느냐를 두고 취재경쟁을 벌이는 것을 더 우선에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이는 추측에서 합리적인 의심으로 바뀐다.
아동성폭력은 술, 야동, 게임 탓?
<조선일보>는 오보 사건을 일으킨 “병든 사회가 아이를 범했다” 기사와 여기에 이어지는 기사 “범인은 술·게임·야동에 찌들어… '성범죄 공식' 예외는 없었다”에서 이 잔혹한 아동성폭행의 원인을 술, 게임, 야동(포르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아예 ‘성범죄 공식’이라는 단정적 단어를 내세워 아동성범죄자의 공통적 특성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KBS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학생이 가출을 했다고 하니, 학생주임 선생님이 이렇게 외친다. “집이 문제야. 집이 있으니까 가출을 하지! 집을 없애!” <조선일보>의 분석은 딱 이 수준이다. 범인의 얼굴사진을 찾는데 보인 취재력을 사건분석에 집중했더라면 이 정도 수준의 기사를 내보내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범죄 공식(?)’을 제시한 <조선일보>의 기사는 “경찰청 협조를 받아 2007년부터 지난 4월까지 발생한 강간 사건을 분석했더니 술 마신 피의자가 저지른 강간 사건이 전체의 38.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술 안마시고 저지른 61.5%의 강간사건은 뭐라고 설명할지 궁금해진다. 더구나 음주여부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술 마셔서 정신이 없었다’는 말은 성범죄자들이 감형을 받기 위해 심신미약 상태임을 강조하는 변명으로 곧잘 이용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술과 함께 게임과 야동을 주범으로 찍은 것과 비슷하게 <연합뉴스>, <매일경제>, <KBS TV> 등은 범인 고모 씨를 ‘로리타 콤플렉스’로 단정내리고 이것이 아동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저지른 원인인양 지목하기도 했다. ‘로리타 콤플렉스’(롤리타신드롬 Lolita Syndrome)는 중년남자의 어린소녀에 대한 성적 집착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나주 성폭행 사건의 범인이 '아동에 대한 동경 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하는 것은 “범행미화하려는 의도”라며 ‘로리타 콤플렉스’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부적절함을 지적했다. “폭력적 가학적 범행에 '동경, 애정' 등”의 용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표창원 교수는 범인 고모 씨에 대해 “성인대상 성매매(를) 주로 하던 자”로 “단지 쉽고 마음대로 통제할 대상, 음란물 보고 따라 하고픈 욕구로 아동 골랐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강은영 연구원은 2003년 발표한 <아동성폭력 가해자에 관한 연구>에서 아동 성폭력 범죄자들은 “가해자의 연령, 정신적 상태, 성폭력 행위의 동기, 공격성의 정도, 범죄경력상의 특성, 가해자-피해자 관계 등 가해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가해자들은 정신과적 장애를 가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아기호증을 가진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적이 되는가는 단순히 현상적인 결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한 사람의 정신과 육체가 ‘고장’난 상태가 되고, 실제 범죄를 저지르게 되기까지는 여러 요인들이 중첩된다. 그러니 원인을 섬세하게 살펴야 그에 대한 방책이 나올 것이다. 부분적인 요인들을 섣불리 전체로 지목하게 되면 진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술이나 게임 등에 원인을 돌리는 것은 안일한 분석일뿐더러 오히려 사건의 원인을 가리고 사회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할 기회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성폭력 사건, 분노와 응징심리만 부추긴다면
한편 <조선일보>의 기사는 “병든 사회가 아이를 범했다”는 제목에서부터 심각한 선정성을 드러낸다.
이 고전적인 단어를 굳이 사용한 것은 그 단어가 주는 인상 때문으로 추측된다. 성폭력 사건에서 ‘범하다’는 단어는 순결한 것을 더럽힌다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범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자의 정조를 빼앗다”라는 뜻을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순수함’을 상징하는 ‘아이’라는 것과 대비될 때 그 느낌은 배가된다. 분노를 부채질하기 위해 고안된 문장일뿐더러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결코 쓰지 말아야 할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2006년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를 꼬집으며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성폭력을 가해자의 변명을 인용해 희화화하거나, 선정적으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
2.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재생산하는 보도를 해선 안 된다.
3. 대책 보도에 있어 실질적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며, 실효성 없는 대책을 부풀려 보도해선 안 된다.
4. 성폭력을 피해자 인권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다른 정치적 공방의 소재로 비하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원칙에 부합된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곳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일부 보도들은 선정성의 끝을 보는 듯 위태위태하다. 포털사이트에 서비스되는 뉴스의 조회수를 의식한 소위 ‘낚시성 제목’들은 이번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별한 내용도 없이 “충격”같은 단어를 남발하거나 “술김에 그랬다”는 가해자의 면피성 발언을 배치했다.
나주 성폭행 사건 수사 초기에는 한 때 ‘중국인’ 용의자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다. 일부 언론에서는 ‘외국인’으로 지칭했으나 대다수의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중국인’임을 강조했다. 피의자가 범죄자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인 혐오를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감정적으로 불타오르는 여론은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잔혹한 아동 성폭력 사건이 화제가 될 때마다 언론들이 여론의 분노와 응징심리에만 기댄 것이 결과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낳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피해자를 지원할 시스템은 여전히 미비한 상태에서 ‘화학적 거세’ 같은, 실효성에는 의문이 들고 인권침해논란만 발생하는 방안들이 원칙 없이 도입되고 있다.
아동성폭력 문제는 단순히 처벌 강화, 그것도 보여주기 식으로 무분별하게 제도를 도입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갈등과 위기의 순간에 더욱 사회적 갈등을 조장해서야 되겠나. 사회구성원들이 잔혹한 범죄 앞에서 감정에 매몰되거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고 합리적 사고를 통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언론 역할 아니겠는가. (박희정 편집장)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독립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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