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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을 나와 홀로서다> ⑥ 김미경, 일상의 행복을 찾다
2010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을 포함해 지역사회단체들이 함께 시작한 장애인주거복지사업을 통해 16명의 시설거주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적 지원이 많이 미비한 상황에서 ‘사람다운 삶’의 권리를 찾기 위해 용감하게 홀로 선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나, 자립했다>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이 중 일부를 <일다>에 옮겨 싣습니다.
김미경, 다부진 그녀의 자립생활 3년기
▲ 30년간의 시설생활을 벗어나 자립생활 3년차에 접어든 김미경 씨(44세). 그에게 시설 입소일과 퇴소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고은경
아주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매는 또렷하고 힘이 들어가 있다. 사람을 언제나 정면에서 응시하며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떨 때는 매섭게 보이기도 한다. 잔뜩 긴장하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가끔은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꼿꼿하다는 것과 흐트러짐 없이 보이려고 하는 느낌이 그녀의 첫인상이자 지금까지 느껴지는 모습이다.
지난 2010년 시설에서 나와 이제 막 3년째 탈시설해 살고 있는 김미경(44세)씨. 어려서 앓았던 류마티스 때문에 장애가 생긴 그녀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을 대하는 그녀만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 때문인지 휠체어에 앉아있는 모습이 억척 아가씨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한 시설에서 30년을 살았고, 이제 시설을 나와 지역사회에서 산 지 딱 3년이 되었다. 이성교제나 결혼에는 무심한 듯하고 그저 ‘돈’을 모아 지금처럼만 “편안하게, 그럭저럭…” 살고 싶단다.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녀, 김미경씨를 만나보자.
기념일이 돼버린 입소·퇴소일
“ㅅ 시설에서 꼬박 30년을 살았어. 다른 데도 가지 않고. 음…1980년 6월 13일에 입소했고 2010년 6월 20일에 퇴소했으니까 30년 하고도 일주일을 더 살았네.”
시설에서 나온 분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신기한 건, 하나같이 입소일과 퇴소일을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말이지 내가 만난 탈시설 한 모든 분들이 다른 건 기억 못해도 이 날만을 꼭 기억해두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족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혹은 친한 친구의 생일, 조상님 제삿날, 연인과의 100일 만남 같은 것들이 기념일이다. 사람들은 이런 기념일에 대해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 듯 자신의 다이어리 일정표에 별표로 표시해둔다. 기념할 일이 너무 많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시설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기억할만한 아주 특별한 날이란 설사 있더라도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물론 시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사건의 정황이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긴 한다. 다만 유독 사건과 시간의 개념을 일치시키는 데는 어려움을 토로한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매일 매일이 그날그날 같은 상황이고 맞춰진 시간표대로 밥 먹고 텔레비전 보고 또 밥 먹고 하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니, 오늘이 10일인지 11일인지, 수요일인지 일요일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중팔구 열이면 열 탈시설 한 분들은 입소, 퇴소에 대해 물어보면, 묻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툭~ 튀어져 나오는 연월일이 바로 ‘입소일’과 ‘퇴소일’이다. 그건 말하자면 ‘시설에 들어가고’ ‘시설에서 나오고’가 그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란 의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시설에서의 삶
“아주 어려서부터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했어. 나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데…, 가정사라 말하기는 뭐하고…. 여하튼 난 6살 때인가 응암동에 있는 ‘소년의 집’으로 들어갔어. 내가 알기로는 원래 비행청소년들이 있는 그런 곳이었는데, 외국인 신부님이 인수하시고 수녀님들이 운영하게 되면서 아마 고아원 형태로 바뀌었던 것 같아. 그곳에서 그럭저럭 지냈지만 힘들긴 했지. 몸이 불편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곳의 경비원으로 있던 아저씨의 친구 분이란 분이 나를 보더니 ‘ㅅ 재활원’이란 곳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면 어떻겠냐는 거야. 거기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치료도 받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비장애인들 중심인 그곳에서의 생활이 불편했고, 자신의 장애를 보다 잘 이해하고 돌봐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장애인 재활시설이란 말만 듣고 결정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선택이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선택한 곳이었다.
“암튼 고등학교까지 다녔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이지.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힘들어지기 시작했어. 일상의 만족이란 것은 없었고 뭐든지 허락받아야 하고 안 되는 거 투성이고 함께 사는 거주인들과도 자꾸 마찰이 생기고.”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며 미간도 찌푸려졌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이며 응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가끔 공포스러웠어. 아마 어릴 때의 충격 때문인가 봐. 어릴 적 할머니가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하늘을 보고 기도해라,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가끔 횡설수설하기도 했어. 기억상실증에 걸렸는데, 2004년인가 다시 기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어.”
나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얼른 화제를 돌려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을 주로 하며 어떤 꿈을 키워나갔냐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질문을 뱉어놓고 나니 좀 민망해졌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봐서 시설에서의 24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알면서 나도 모르게 던진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뭘 했냐구? 글쎄…아침에 6시 30분에서 7시에 모두 같이 일어나야 했어. 씻고 방청소하고 순번을 기다렸다가 7시 40분쯤 식사를 하고. 그 후에는 그냥 방에 있는 거지 뭐. 가끔 치료받고 방 안에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있으면 돌봐주기도 하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적이 많았지.”
예상했던 답변이라 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서로 간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립’이 꿈이 되기까지
“난 사는 게 급해서 꿈이라고는 가진 적이 없어. 그러다가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1995년부터는 작은 소일이라도 해서 조금씩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시 그녀는 ‘돈’이라고 하는 걸 받아본 적이 없다. 그 누구에게도. 가족과도 연이 끊겼고 시설이나 후원자들이 개인에게 주는 용돈도 없었으니 그녀는 하고 싶은 걸 생각하지도 못했고 꿈이라는 걸 꾸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여겼다. 그러니 철들고 나서 그녀가 처음 생각한 게 ‘돈 버는 거’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을 거다.
“장애수당? 그런 것도 2006년인가 2007년인가에 처음 받아봤어. 그 전에는 수당 자체를 몰랐어. 이때부터 아마 정책이 바뀌어서 본인이 직접 수령을 하게 되었나봐.”
하지만 그 후로 생리대 같은 여성필수품도 본인이 직접 구입해서 써야 하는 등 갑자기 일상에서 돈을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국가에서 돈을 받아 좋긴 했지만 안사도 되는 물건에 돈을 쓰게 되니 장애수당을 차곡차곡 모으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사는 즐거움’같은 건 목표로 삼아본 적도 없고 그저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1995년도부턴가 정식으로 뭔가 작은 돈벌이가 가능한 소일거리들을 했는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어. IMF영향으로 공장이 어려워졌거든. 내가 뭘 했는줄 알아? 전기선 납땜하는 거였어. 굉장히 섬세함을 요구하는 일이었는데, 내가 손이 좀 불편해도 가까이서 집중해서 하면 정말 잘했어. 또 옷 박스 사출 들어가는 것도 했지. 하나에 4-5원. 하하.”
그러다가 2009년 6월부터 2010년 1월까지 공단 소개로 또 다른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동안“정말 악착같이 일했다”고 말한다. 돈 버는 일에 열중하는 것 밖에 하고 싶은 일이 없었고 통장에 돈이 조금씩 모아져가는 것 자체가 좋았다고 한다.
“한 몇 백만 원 정도는 모을 수 있었지. 근데 갑자기 탈시설을 하게 돼서 그 일도 그만 두게 된 거야. 잠시 일을 더 해서 돈을 모을까 싶기도 했는데, 나에게는 그냥 나가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것 같아. 나가서는 수급권자가 될 테니까 생활비는 그럭저럭 될 거라 생각했지.”
시설에서 먹고 자며 일하면 얼마 정도의 목돈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시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OK’를 한 걸 보면, 당시 그녀의 꿈은 ‘시설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돈이 중요하다고, 돈 버는 거에 집착했다고 하나, 그건 바로 ‘시설 이후의 삶’을 언제나, 늘, 항상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에게 ‘돈’은 희망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수단이었지,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말한 ‘돈’은 ‘보란 듯이 자립해서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지 않았을까.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게 좋아’
얼마 전 탈시설 한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꺼리가 나올 거라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헌데 평소에 이러저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당혹함에 “아니 없어요? 시설에서 나와서 행복했던 에피소드가 없는 거예요? 그럼 다들 불행하신가? 다시 시설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라고 농을 치며 물었더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말문을 열었다.
“아니, 뭐, 힘들지…자립이….”
“넘기 힘들지만 넘어야 하는 벽이죠.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고.”
“먹고 사는 게 힘든 건 아니고 여러 가지 상황이…뭐 하나 쉬운 게 없는 건 분명해.”
“자유롭긴 하지만 불안한 자유지. 뭐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자립은 돈이지. 나가면 돈이니까. 그래서 책임 있게 사는 게 중요한 데 그게 힘들어.”
“하나부터 열까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먹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힘들어도 견딜 거야.”
등등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탈시설 한’기쁨을 크게 느끼고 행복해하기보다 삶의 버거움, 책임감, 관계의 어려움 등을 토로하고 있었다. 순간 새삼 깨달음처럼 온 건 ‘그렇지, 삶은 다 그런 거지. 가끔 여행이나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그저 반짝 ‘좋다’라는 느낌을 가질 뿐이지, 뭐 시설에서 나와 산다는 그 자체의 기쁨이 그리 오래 가겠어?‘ 싶었던 거다. ’자유‘와 ’억압‘이란 반대되는 상황을 빼고는 그저 삶이란 힘들고 감당해야 하고 그럭저럭 일상을 사는 것 외에는 아닐 것이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시설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내가 거길 왜 또 가! 가긴 어딜 가냐고. 싫어. 정말 싫어. 난 지금의 자유가 좋아. 내 맘대로 결정하고 병원가고 싶을 때 가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날 때 만나고. 암튼 내 삶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게 그게 가장 좋지.”
그녀는 시설에서 생활 할 때 한방에 4명씩 생활하고 있었는데, 같은 방에 있던 초기 치매인 할머니가 욕하고 가끔 때리기도 해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누릴 권리라는 건 제대로 인정받은 게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잠깐 밖에 나가는 것도 일일이 다 보고를 해야 해. 뭐 하나를 해도 꼬치꼬치 캐묻고 이러쿵저러쿵 한소리 하고. 자기들이 뭔데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하는 거야?! 물론 시설 자체는 편하지. 근데 단지 그 뿐이야. 시설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편하다는 거 빼면 나머지가 다 싫어!”
30년을 산 곳에 대해 어떻게 저렇게 강한 부정을 드러낼까 싶어 그녀에게 시설은 무엇인지 물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즉각 튀어나왔다.
“무덤! 죽어서 가는 무덤이라면 내가 가겠어. 하지만 살아있는 한 다시는 가지 않을 거야!”
▲ "내 삶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지금의 자유가 참 좋다"는 김미경 씨. © 고은경
시설 안의 권력관계, 그 안에서 살아남기
그녀가 이렇게 시설에서의 삶에 대해 강한 부정으로 일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시설의 문화와 인간관계였다. 시설은 분명한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주인은 주는 대로 혹은 그 내부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 독특한 그 문화에 결코 저항해서는 안 된다.
저항하는 순간 왕따가 되거나 이기적인 인간, 고집 세고 자기주장 강한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맺게 되는 인간관계는 수평적이지도 진심을 터놓는 사이도 될 수 없다. 그녀는 인간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고 한다.
“몰아 부치고, 오해하고, 간섭하고, 자유도 없고… 게다가 쓸 수 있는 돈도 없지… 내 돈이라는 게 없어. 그러다보니 내 물건이랄 것도 없고. 몸이 아프다고 누워있는 것도 눈치 보이고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
시설 생활에 대해 그녀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지금 현재의 삶과 자립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시설에서의 일에 대해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말은 자세히 못하지만 30대 초반인가 중반 때 굉장히 수치스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옆방에 나처럼 중도장애인 여성이 한 명 있었고 나랑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 직원들이 나에게만 뭐라고 하는 거야. 기가 막혀서. 그런데 왜 나에게만 뭐라 했는지 알아? 그 사람은 가족이 있어서야. 가족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 가족이 찾아와 사무실에 항의하고 하니까 나만 건드린 거지.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는지 몰라.”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어쩔 줄을 몰랐고 ‘무연고’라는 설움을 이런 식으로 당하나 싶어 한동안 정말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지냈다.
“그렇게 억울하다고만 생각하고 지내다가 안 되겠는 거야. 이러다가는 계속 나만 얕잡아 볼 것 같고, 몰래몰래 내 얘기 하는 것 같고 감시당하는 것 같고. 내가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싫고. 그러던 어느 날, 왜 자꾸 나만 갖고 난리지? 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들에게 만만해 보이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그녀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사무실에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 건드리기만 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사무실 직원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한 뒤,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다고 한다. 떨리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억압당하는 느낌으로 살지 않겠다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그 후 그녀의 생활이 변했다.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들이니까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직원들도 애쓰는 사람들이니까 이런저런 요구를 잘 들어주려고 했지. 근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어.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나를 존중해주지 않았어.”
그녀는 시설에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수록 오히려 자신이 더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한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한다.
“그 안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 아니 안했어. 왜냐구? 난 그들에게 신뢰가 없었어. 유치하게 이간질하는 경우도 많았고 믿었다가 뒤통수 맞은 적도 많아.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해. 나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지.”
시설에 살고 있지만 그녀는 시설의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설 문화에 길들여진다는 건 바로 복종과 인내만으로 점점 ‘나’를 잃고 살아간다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설 안에서의 외로움을 정기적으로 오는 자원봉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떨쳐 버리려고 했단다.
“난 밖에서 오는 비장애인들과 친하게 지냈어. 그 사람들하고는 말이 좀 통하기도 했고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았지. 그 사람들과는 지금까지도 쭉 인연을 맺어오고 있어. 서로 걱정해주고 지지해주고.”
“안 돼!” “할 수 없어!”란 말이 사람을 무기력하고 천덕꾸러기처럼 만들게 하는 반면 긍정의 표현이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다. 그녀는 시설에 있을 때 함께 사는 거주인들이나 직원들에게서 받지 못한 따뜻한 배려와 지지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받으며 견뎌나갔다.
불편하거나 부당한 일이 생기면 몰래 그들에게 이야기해 우회적으로 시설에 말이 들어가도록 고도의 지능적인 수법으로 자신을 보호한 것이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든든한 빽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 거다. 이건 그녀만의 생존전략이었다. 아니,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을 간절히 바라는 건 시설에 있거나 시설밖에 있거나 자연스런 바람이자 본능 아닐까.
“그 사람들은 내가 나온 걸 아주 잘했다고 얘기해. 특히 2011년도에 큰 물 피해가 있었잖아? 그 때 내가 있던 그 곳이 거의 2, 3층까지 물이 올라와 다들 대피하고 난리가 났었대. 텔레비전에도 계속 나오고 그랬어. 그 때 사람들이 너는 정말 다행이다, 라면서 지금의 내 삶을 굉장히 지지해주고 있어.”
홀로서기의 가장 큰 힘은 ‘사람들’
“관절이 많이 아파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전기를 많이 쓰지. 얼마 전에도 10월인데 전기료가 20만원이 나왔어. 어휴~. 집 구조가 난방이 잘 안되나 봐. 그래도 이제 조금 있으면 이사 가니까 한시름 덜었지 뭐.”
시설 이야기 할 때는 내내 긴장한 듯 했지만 요즘의 근황을 이야기하면서는 한결 밝아졌다.
“저축을 해 둔 돈이 얼마 있었지만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해 지인으로부터 얼마 정도를 빌리기로 했어, 이제 정말 내 집으로 가는 거지. 너무 다행이야.”
집값이 비싼 서울 말고 지역으로 내려가서 더 편하게 살고 싶진 않냐고 하자, 모르는 소리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아이고, 지역은 지하철도 없지, 이동교통도 거의 안 되어 있지, 활동보조 시간도 적지. 그러니까 집값이 아무리 싸도 나다닐 생각을 아예 못해. 그냥 집안에 처박혀 있어야 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시설에서 나온 지 딱 3년 만에 자신의 힘으로 아파트를 구하고 지원을 통해서가 아닌 새로운 의미의 독립을 시작한 그녀. 그녀에게 지난 3년간의 시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틈만 나면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해. 내 얘기를 하고 솔직하게 도움을 구하고. 그래서 지금은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많아. 활동보조 해주시는 분과도 친하고”
그녀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 관계를 다양화해서 그 사람들을 통해 나를 올곧게 세워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홀로서기’임을 아는 듯했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에 주거복지사업을 통해 나온 사람들과 내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어. 내가 배울 만한 게 별로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내가 살아가는 게 좀 급했거든. 물론 몸이 안 좋아 병원을 다니는 일도 많고. 좋은 물건을 하나 사려면 자주 나가면서 이것저것 봐야 물건 보는 눈도 생기거든. 주거복지사업으로 나온 사람들이 집회나 인권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건 아는데, 중요하지만 나는 내가 가고 싶을 때 참여하는 것이 좋아. 강제하는 건 싫어.”
지난 3년의 이야기를 물었는데, 주거복지사업에 대한 평가 혹은 견해로 되돌아왔다. 그 이유는 뭘까?
“모르겠어. 난 센터들이 자기주장만 강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 물론 그래서 나도 더 강하게 내 주장을 펴고 있는지도 몰라. 암튼 이용자의 선택권을 보다 인정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산다는 건, 일상의 평화와 행복을 지키는 것
보통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은 학연이나 지연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새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해가야 한다. 그러니 현실 정책과 제도는 발등에 떨어진 ‘내 문제’가 되고,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들은 각종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관계도 넓히고 사회를 알아간다.
헌데 그녀는 좀 다르다. 이미 ‘준비된 사람’이라고 할까? 시설에 있을 때부터 차근차근 시설 이후의 삶을 준비했고, 아파트 주민이나 교회를 통해 관계의 폭도 다양하다. 그녀는 스스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는 고민의 수준이 다르다고 판단하는 듯했고, 일단 자신의 몸부터 잘 살피고 건강을 유지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든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 함부로 말할 자격은 없다. 그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어. 그저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고 그냥 지금처럼만… 넉넉하지는 못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 것 갚을 줄도 알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몸이 좀 편했으면 하는 것뿐이지.”
그녀는 집에서 혼자 쉬면서 생각해보면,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 편안해서 좋단다. 가슴 한편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때, ‘아!~ 이게 행복이구나~’ 싶기도 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사는 즐거움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가 끝날 무렵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 사는 게 원래 ‘그저 그렇게 단순한 것’이고, 그걸 잘 지켜내는 것이 일상의 평화고 행복이라고. (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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