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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여행생활협동조합 이사 김근례
<일다>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www.ildaro.com
‘하찮은 가시내’에 불과했던 여성의 지위
대여섯 살 무렵 나는 시골 친할머니 댁에서 자주 놀았다. 어느 날 마당 옆 우물에서 놀다가 날이 더워 세숫비누로 머리를 감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큰 소리로 호통을 치셨다.
“시답잖은 가시내가 뭔 세숫비누로 머리를 감어!”
할머니한테는 남자는 상전이고 여자는 하인이었다. ‘하찮은 가시내’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할머니 댁에서 밥을 먹을 때면 엄마와 나는 쟁반에 놓고 먹었던 기억도 있다. 엄마는 늘 식구들이 밥을 다 먹어갈 즈음 누룽지를 가져와 드셨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지금도 누룽지를 싫어한다. 귀한 생선이 상에 오를 땐 으레 할아버지와 삼촌 차지였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도 맛있는 반찬이 있을 땐 아버지를 위해 엄마가 우리한테 눈치를 주어 못 먹게 하였다.
1980년대 초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 위에 남성이 존재했던 시절을 살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여자가 운전하면 재수 없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였다. 상인들도 첫 손님으로 여성이 개시하면 재수없다고 기피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가족구성원들 안에서 가부장적 질서도 확고하였다. 여성은 무능한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도 ‘이혼녀’라는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감히 이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쉬쉬하기에 바빴다. 농촌의 가난한 가정의 누이들은 장남과 남동생의 학비 마련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은 진학을 포기한 채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해야 했다. 이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불을 지핀 장본인 들이다.
도시의 젊은 여성들은 사무실의 꽃이라 불리었다. 승진․ 승급도 없었고 대부분 단순 업무에 종사했으며 전문적인 자기 영역의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 두는 게 관행이었다. 더구나 ‘임신해서 아름답지 못한 외모로 출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 스스로도 볼록한 배를 흉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에게 의존해 살아야 하는 것이 여성의 삶이었다.
민주화의 열기, 전투적 여성으로 살다
이러한 시절, 1987년 노동자 대 투쟁은 우리 사회에 민주화 바람을 거세게 일으켰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였고, 여성들은 계속 근로와 고용평등을 외쳤다.
나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무직 노동자로 일했다. 1986년 다른 직장을 찾기 위해 쉬던 중 우연한 계기로 구로공단 부근 조그만 의원에서 회계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곳은 노동자들이 낮에 진료를 받으러 올 수 없는 노동 조건을 감안하여 밤까지 진료하고 상담도 해주었다. 이곳에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광주시민학살에 대한 화보를 보고 충격과 분노를 느꼈고, 구로공단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어린 노동자가 수은 중독으로 죽고 노동자들이 프레스기에 손가락을 수없이 잘려나가 이를 예방하고 대책 활동을 벌이는 단체에서도 일했다. 이후 노동조합에서 일하면서 여성단체 활동을 하였는데 그 모임이 더 재미있었다. 나는 노동자의 계급 모순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문제에 더 관심이 갔다. 내 주체 의식이 고양될수록 우리 사회 여성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부각되어 다가왔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에는 진보적인 남성활동가들도 가부장적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 안에서 여성활동가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사업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했다. 전체 현안에서 여성들의 목소리와 여성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문제는 항상 부차적이었다.
매년 노동조합에서는 사측과 임금뿐 아니라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단체협약을 갱신하는데, 그 해 가장 중요한 목표로 10대 요구안을 최종 결정한다. 그런데 출산휴가 확대, 육아휴직 실시, 직장내 성희롱 금지, 직장보육시설 설치 등 여성노동자에게 중요한 조건들은 제외되기 일쑤였다.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행사를 할 때에는 여성사업 담당자만 동동거리고, 조직에서는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니들(여성들)이 알아서 해!’ 이것이 조직의 대답이었다.
여성활동가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묻히고 외면당했다. 조직 내 역할도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여성사업 담당자가 여성 문제를 거론하면 ‘당연히 자기 역할이니까 한마디 하겠지’라는 식으로 흘려 듣곤 하였다.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여성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총대를 메야 했다.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들의 조력이 필요한데, 남성들은 여성들의 요구가 남성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숨 가쁠 정도로 변화가 빠른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 온 여성들은 변화에 빨리 적응하고 의식도 변해갔지만, 남성들은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서 일까. 여성 문제를 제기하면 남성과 갈등을 일으키고 곧 여성과 남성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속에서 여성들은 전투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성향이 개인 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나는 지금까지 결혼예복을 제외하고 치마를 사 입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화장을 하지 않는 등 외모를 꾸미지 않고 살았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자 하는 내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여성들의 의식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남성들
노동조합의 결성이 봇물을 이루면서 여성의 결혼퇴직제가 폐지되고 임신, 출산에 대한 모성보호와 육아휴직, 직장보육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노동운동은 직장 내 승진, 승급과 고위 직급에 할당제까지 실시하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하여 여성들이 평등한 노동권을 확보해나가게 되었다.
여성들이 이렇게 경제력을 얻게 되다 보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태아 성별 감별로 여아를 낙태하던 남아선호도 점차 없어지고, 요즘은 신붓감으로 맞벌이할 수 있는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경제력이 있는 여성들은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해졌고, 폭력적인 남편에게는 이혼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제도 개선은 사람들의 의식을 더욱 자유롭게 하였다. 여성인권, 성소수자 권리, 장애인 인권, 여러 문화적 차이도 그 간격을 좁히는데 기여하였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의 성문화와 여성을 상품화하는 소비적 성문화로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재생산하고 있기는 하지만.
▲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박희정의 만평 (2008년 3월 11일자) ©일다
20여 년을 역동적이고 긴박했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의 회오리에 휩쓸려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삶이려니 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억압적이고 경직된 사회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민주적인 변화를 체감하면서 하루하루가 신났고 희망과 기대로 살았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법과 제도가 개선되기까지 개인적으로 겪어야 했던 많은 일이 있었다. 1992년에 결혼한 나는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가기보다는 동시 입장을 선택하였고, 시댁 어른들에게만 하는 폐백을 친정 부모에게도 하였다.
아이가 생기고, 갓난아이를 맡길 곳을 찾기 힘들었다. 큰아이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겨 이산가족으로 살았고, 둘째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겼다. 집회도 많았고, 퇴근 후 더 바쁜 노동조합 활동에 남편과 나는 매일 저녁 아이를 찾아오는 문제가 심각하였다.
남편은 나보다 더 큰 조직에서 더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퇴근 후 아이 찾는 일을 나에게 많이 미뤘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내가 주 3일만 아이를 찾는 것을 고수하기 위해 많이 싸워야 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찾을 때는 큰 시혜를 베푸는 양 생색을 냈다. 가족을 위해 당연히 서로 도우며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가 할 일을 도와줬다는 차원으로 접근하였다. 일터의 동료나 남편이나 적대적인 관계는 마찬가지였다.
결혼생활 중에 남편은 아이들이 어린 5년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가정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설거지, 청소는 고사하고 그 흔한 쓰레기봉투조차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내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 사이에 애정이 차츰 줄어들어 사랑이 자리하기에는 내 정서가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 돌이켜보니 상전으로 살아 온 남편도 내가 버거웠을 것이고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조화롭게 어울리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내 주변에는 중년 남성도 젊은 세대처럼 많은 부분의 양육과 가사 일을 담당하는 이가 가끔씩 눈에 띈다. 이런 사람들이 좀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긴 시간을 남성과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살다 보니 내 삶이 많이 피로해졌다. 지금부터라도 여성과 남성이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상태로 조화롭게 잘 어울려 살았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일은 나누어 하되, 한 쪽이 어렵거나 바쁘면 기꺼이 배려해 주는 것. 부족하면 격려해 주고 모자라면 채워 주는 것.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 모나지 않고 잘 어우러진 화합. 사랑은 그런 것이다. 여성이 하는 일, 남성이 하는 일, 구분하지 않고 집안일을 자연스럽게 서로 도우며 사는 모습을 많은 중년 남성에게서 발견하고 싶다. 남성들은 집안일이 몸에 배면 나중에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남성연대’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 했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처음 들어보는 남성연대는 여성가족부 폐지와 안티-페미니즘을 주장하며 남성차별에 대한 활동을 한다고 하여 씁쓸하였다.
2011년 OECD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우리 나라 여성의 평균임금은 남성임금의 63%에 불과하다. 회원국 평균 85%에 비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여성고위직 비율은 미국이 85%, 회원국 평균 59%인데 반해 한국은 14%로 맨 꼴찌다.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는 35%가 임시직, 일용직에 종사하고 있다. 객관적인 자료로 나타난 실상이 이러할 진데, 통계로 잡히지 않는 수많은 차별과 왜곡은 얼마나 더 하겠는가.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 남성들의 정신적인 도약을 바라며 조화로운 삶을 희구하는 내 마음이 너무 섣부른 것일까. (김근례)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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