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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공간을 개조한 그 방, TV도 없었던 혜화동 나의 첫 집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중얼거렸지.

   “늙으면 나연이 데리고 시골에서 살아야겠다.”
   평소 당신답지 않은 말을 했던 아빠,
   그때 왜 그리 내가 끔찍하게 느껴졌던지…….
   그때부터 너는 가출을 꿈꿨지.
   ‘혼자 살아야지, 내 의지를 실어서…….’ 넌 이런 생각을 했지.

   막연했었니?

   너 자신도 그 꿈의 성공을 의심했었니?
   그 방에 너의 물건들을, 볼품없는 살림살이들을 들여놓기까지 행운도 따랐다고 생각해.
   그래도 난 알아. 네 나름의 열정으로 준비했다는 걸,
   배움을 찾고, 일을 찾았지.
 
   2001년의 그녀, 정말 행복해보여.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열정이 식은 것 같고, 행복지수가 떨어진 것 같고 귀차니즘이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에겐 힘이 되는 친구도 있고
   그녀 옆에 보호자부터 찾는 시선도 있지.
 
   축하해, 2001년의 그녀.
   네가 가장 행복한 그녀였다는 걸.
 
- "2001년의 그녀에게" 류나연 (서울DPI 활동가)

2001년에 나는 처음으로 집을 나왔다.
무슨 배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백도,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만큼의 가족도 아니었다. 막연히 혼자 살아가는 나를 상상했다. 거창한 모습도 아닌 그냥 혼자인.
 
좋은 기억이 많은 학교생활에서 지겨웠던 건 기숙사, 가끔 TV에 나오는 그런 시설은 아니었지만 크지 않은 방을 여러 명이 쓰며 소등시간을 지켜야 하는 생활은 늘 맘속에 반항심을 일으켰다.
 
학교와 직업학교도 졸업했지만 집에서 나갈 수 없던 몇 년, 그러다 전동휠체어를 알게 되고 2년 동안 공공근로로 모은 돈을 털어 그걸 샀다. 그리고 밖으로 좀 더 멀리 다니는 연습……. 동네에서 슈퍼, 영화관, 미장원, 친구 집 외박, 인터넷 모임에서의 여행까지, 나름대로 체계적인 연습…….
 
웹 디자인을 배우고, 외할머니 말씀처럼 인복 많게 좋은 사람들과 인터넷방송국에서 일하게 됐다. 2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그곳의 오너는 장애인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독특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후 생각과 정체성의 전환을 준 장애인청년학교와 DPI(장애인권단체), 지금도 진정한 인권운동가와 ‘실체 나’와의 차이에 상처 받고 아파할 때가 있지만, 또 늘 동료들의 모습에 감탄하며 일하고 있다.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사는 가족이 없다. 어릴 때부터 결혼에 대한 환상도 바람도 없었다. 그것이 늘 이상했지만, 엄마나 주위에 여자들을 통해 그것에 따르는 책임감을 먼저 알게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진정한 행복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 불행하지 않다. 물질적으로 가진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알아보지 않지만 자유롭기 때문에. 몸은 전동휠체어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말이다. 때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외로움과 어려움에 혼자 술을 먹어버릴 때로 있지만 말이다.

늦은 저녁에 나만의 공간에 문을 열면 아침에 어질러 둔 내 물건들이 여전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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