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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환영받지 못한 생명이었다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칼럼을 열며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평생의 방황과 추구 끝에 도달한 ‘일상’

 

이 글은 자기 탐험의 끝에서 ‘일상’에 도달한 이의 이야기다. 집을 가꾸고 밥을 해먹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평생의 방황과 추구 끝에서야 가능해진, 한 여자의 이야기다.


▲  이 글은 평생의 방황과 자기 탐험의 끝에서 ‘일상’에 도달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김혜련

 

“첫 날 밤에 들어선 웬수 같은 년”

“천덕꾸러기는 목숨도 질기지~”

“천하에 쓰잘 데 없는 지지배!”

 

가난과 불행에 못 이겨 보따리를 싸들고 달아났던 ‘어린’(엄마는 스무 살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두고 간 ‘어린 것이 눈에 밟혀’ 되돌아왔다. 그리고 빗자루든 몽둥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거나 들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어린 것을 때렸다.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세월이 하루, 이틀…일 년, 십 년… 계속됐다.

 

난 환영받지 못한 생명이었다.

 

자기보다 큰 개를 만난 개가 꼬리를 말아 넣고 오줌을 질질 싸듯 세상 앞에서 늘 벌벌 떠는 평생의 ‘공포’,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습지를 걷는 듯한 삶의 ‘막막함’, 무엇을 해도 나답다고 느껴지지 않는 ‘공허’, 더 나은 나를 향해 지칠 줄 모르고 가야만 하는 허기 가득한 ‘추구’는 유년의 경험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세상에 내놓은 자, 생의 최초의 얼굴이 그 존재를 부정하면, 그것도 매일, 매순간 그런 대접을 받으면 그 생명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진다. 왜 죽지도 않고 살아서 숨을 쉬어야 하고, 왜 밥을 축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답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인간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고,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했다. 평생 붙잡고 온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간다움’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간 세월이 내가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을 향해 갈 데까지 간 끝에서 내가 만난 건, 너무 쓰라려서 차마 인정하기 힘든 ‘절(絶)’, ‘망(望)’이었다.

 

절망한 그 자리, 다 무너져 내린 자리에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숨 쉬고, 몸을 눕히고, 밥을 먹는 일. 그리고 비가 오고,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부는 일이었다. 평생 했지만 피해가려고만 했던 것, 평생 곁에 있었지만 그 의미를 물어보지 않은 것, ‘아무 것도 아닌’ 게 거기 있었다.

 

이 글은 비로소 처음으로 본, 그 ‘아무 것도 아님’의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세계가 어찌나 절절하고 그리운 것인지, 그토록 원했던 ‘스스로 충만해지는’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세계를 만나 여덟 해를 넘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깨달아 가는 삶의 기록이다.

 

내가 말하는 ‘집’과 ‘밥’의 절실함은 그것이 평생의 방황과 추구 끝에 온 삶의 ‘고갱이’라는 데 있다. 삶의 의미를 ‘저 너머 나 밖에 있는 것’에서 찾지 않고,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를 개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평이한 일상 자체가 삶의 의미고 자기다움이며 자기초월일 수조차 있다는 것을 몸으로 겪어가는 그 절실함 말이다.


▲ 숨 쉬고, 몸을 눕히고, 밥을 먹는 일. 그 ‘아무 것도 아님’의 세계에 대한 기록을 시작해보려 한다.   ©김혜련

 

나의 경험이 어떤 실마리를 줄 수 있다면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겠다. 당신의 경험은 당신 개인의 특수한 경험 아니냐고, 그게 다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거냐고. 그렇다, 내 경험은 특수한 개인의 경험이다. 그런데 나나 내 엄마가 ‘여성’이라는 데 초점을 두면 나의 경험은 아주 다르게 읽힌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살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경험의 정도나 상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자들은 종종 자신을 부정당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버겁기만 하다.

 

이혼 연구를 하면서 만났던, 이혼을 했거나 불행한 결혼 속에 있던 많은 여성들, 내가 이십여 년 동안 해를 바꿔가며 가르쳤던 숱한 제자들, 그들은 울면서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야기의 공통점은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이야기는 특수하면서도 보편성을 가진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특수와 보편이 만나는 자리, 그 자리에서 나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망을 갖게 될 것이다.

 

평생 밥을 했지만 ‘밥’이 없었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었던 나의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요즘 세대는 ‘집’도 없고, ‘밥’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언지 찾아가는데 나 같은 사람의 어리석고 쓰라린 삶의 여정이 어떤 사유나 실천의 새로운 실마리를 줄지도 모르겠다.

 

사실 글을 쓰는 나는 망설임이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글로 쓰일 수 있는 것인가? 그저 몸으로 살아야 하고 겪어야 되는 영역을 글로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일까? 제대로 전달되고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쓰는 언어 또한 그렇다. 언제부턴가 많은 말들이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졌다. 살아내지 않고 말로만 있는 공허한 말들에 대한 회의. 내 말이 그런 말 중의 하나가 될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런 망설임을 안고 쓴다. 가능한 구체적으로 쓰려고 한다. 어쩌면 한 주제가 반복해서 드러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정직하게 쓰려한다. 언어에 빚지는 일이 없기를 감히 바래본다.   김혜련

 

(※ 내 이야기가 ‘엄마 탓’이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로 읽히진 않겠지요. 엄마의 삶은 그 시대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랬듯 모질고 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날 엄마와 회해하는 기나긴 시간들을 건너왔습니다. 엄마와의 관계는 내 삶의 핵심 테마라서 비껴갈 수 없지만,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엄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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