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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빵보다 장미가 더 소중하다

[나의 알바노동기] 세 개의 알바로 꾸리는 일상


※ <일다>는 청년여성들의 가감없는 아르바이트 현장 경험을 기록합니다. “나의 알바노동기”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아빠에게 맞아도 참으라는 할머니, 교사, 전도사

 

‘아빠’라는 사람의 폭력은 내 사춘기 무렵부터 시작됐다. 만취 상태로 나를 불러 앉히고 내 인생, 본인 인생 다 이야기하다가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들면 반찬이 담긴 그릇을 던지거나 얼굴이며 몸이며 할 것 없이 손으로 때렸다.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나를 우울증까지 몰고 간 것은 그런 폭력을 겪을 때마다 나를 보호해줄 생각이 없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였다. 본인 어릴 때는 더 많이 맞았다고 말하는 담임선생님, 너도 가족들 힘들게 하고 있다고 충고하는 전도사님, 왜 굳이 아빠를 경찰에 신고하냐며 나를 나무라는 할머니… 나는 어디서든 가정폭력 피해를 당한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서 사람들이 불편해할 지경이었는데, 어떤 어른도 나를 가해자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임을 밝히는 나를 당황스러워했다. 비난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학업 스트레스가 상당했지만, 가정폭력 가해자가 딸의 상황을 신경 쓸 리 없었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자정까지 공부하고 귀가한 내게, 자기랑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늦게 들어오냐며 따졌다. 서너 시간밖에 못 자고 등교하여 야자까지 마치고 온 날에는, 술에 취한 채 나를 부르고 끝도 없이 말을 걸었다. 다른 가족들은 늘 그래왔듯 방관의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던 열일곱 살, 우울증이 내 일상을 집어삼켰다. 잠이 대폭 늘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학업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학교에 가면 더 우울해졌다. 친구들은 내가 게을러서 학교에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해에 자퇴를 했다.

 

가정폭력이 허용되는 집으로부터 도망쳐 알바를 구하고 학교에 계속 다닐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수업이 늦게 끝나는 인문계 학교의 미성년자 학생이 정기적으로 일할 수 있을 법한 알바는 없었다. 알바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았을 때 ‘피팅 모델 하지 않겠냐’며 연락이 왔었는데, 면접이랍시고 만나서는 내게 원조교제를 제안했다. 끔찍한 기억이다.

 

무기력한 나를 일으켜준 것은 ‘알바’였다

 

결국은 집을 나오지 못하고 간간이 알바를 했다. 열여덟 살 때 팬시점에서 화이트데이 단기 알바를 한 것이 첫 아르바이트였다. 3일 동안 풀타임으로 일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매장 물건들의 먼지를 닦고, 손님들이 물건의 가격을 물어보면 대답해주는 일이었다.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외로웠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알바는 나 한명이었고, 직원들도 각자의 할 일로 바빴으니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전혀 친하지 않았던 중학교 동창 친구가 손님으로 왔었는데, 어색해서 인사도 못했지만 속으로 많이 반가웠다.

 

급여는 13만원을 받았던 것 같다. 주변에 자랑하며 몽땅 나를 위해 쓸 거라고 선언했다. 돈을 벌었다는 것, 당시 나이에 한 번에 얻기 쉽지 않은 돈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 신났다. 그때는 돈을 벌지 않아도 용돈으로 필요한 것을 살 수 있었지만, 생필품 외의 것들도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자본과 노동이 내게 “너는 쓸 데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자퇴 이후로 낮밤이 한 주에도 몇 번씩 바뀌며 24시를 기준으로 굴러가지 않던 내 하루를 알바를 통해 정리하고 싶었다. 서빙, 사무보조 알바 등 면접을 봤는데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미성년자에 자퇴생, 우울증 환자였던 내가 뽑히기는 애초에 어려웠던 것 같다.

 

일일 알바로 웨딩홀 알바를 몇 차례 갔다. 온라인으로 쉽게 지원하고 출근하면 되었지만, 일이 힘들었다. 접시는 무거웠고, 유니폼은 불편했다. 유니폼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스타킹과 머리망을 내 돈으로 구입하는 것이 아까웠다. 한 번은 일을 시작하자마자 스타킹 올이 나가서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일도 익숙하고 이미 서로 얼굴도 알고 있는 다른 알바생들 사이에서 나만 홀로 동떨어진 것 같은 소외감도 힘들었다.

 

그래도 집에만 있기는 더 싫었다. 의무가 없는 일상은 뭔가를 시작하기 어렵게 했다. 무기력한 나를 방바닥에서 가장 잘 일으키는 것은 알바였다.

 

▶ 카페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일할 때. 쉬는 시간에는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갔다.

 

카페 알바를 하며 배운 것들

 

열아홉 살, 그렇게 또 웨딩홀 알바에 갔다. 직원분이 휴학생 중에 커피에 관심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 건물에 속한 카페의 알바를 구하는 거였다. 예쁜 음악을 골라 재생하고, 음료의 맛을 설명하고, 힘이 나는 달콤한 음료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당시 주변에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커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낯선 만큼 더 매력적이었다. 나는 휴학생은 아니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으며, 카페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텃새도 있을 수 있고 일이 힘들 수도 있다 하시기에 웃으며 말했다. “저 힘든 거 좋아해요.” 일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카페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는 이 세상에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혐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재미있는 손님들도 있었다. 한 번은 ‘아메리카노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파는 거냐’고 묻는 손님이 왔다. 커피는 처음에 에스프레소로만 마셨는데, 이를 처음 접한 미국 사람들이 너무 써서 물에 타 마시기 시작했고, 이를 가리켜 미국 사람들이 마시는 커피라고 불리던 것이 정착되어 오늘날에도 아메리카노라고 불리는 거라고 했다. (사실인지는 모른다.) 그 손님은 주문한 커피를 받고 옆에 있는 친구에게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냐’고 말하며 유유히 떠났다. 카라멜 마끼야또 레시피를 배우면서 ‘마끼야또’는 ‘점을 찍다’라는 뜻이라는 것도 배웠다. 내 일상을 채우는 모든 것들에 사연이 있음을 생각하면 세상이 더 예쁘게 느껴진다.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알바를 하며 배웠다. 이를 테면 매장에서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는 것 같은 일이다. 나도 그런 도움을 주었으니, 내 일상에도 그런 자잘한 도움을 주기 위한 누군가 있을 터였다. 그런 요청은 늘 귀찮은 것도 아니었으며, 매장이 너무 한가할 때는 반갑기까지 했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도움을 줄 때가 있다면 내 주변 사람들도 내게 그럴 것 같았다. 그 희망이 과해 남에게 너무 의지하는 실수도 했지만, 적당히 도움을 청하고 충분히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계속 알아가고 있다.

 

더 이상 의지할 가족이 없는 지금도 나는 크고 작은 도움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위기지원센터에서 일부 생활용품을 지원받고,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선뜻 밥을 사주고 돈을 빌려주는 친구들을 통해 인류애를 느끼고 있다.

 

▶ 5개월 가량 일했던 카페.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매장 가득 빛이 들어왔는데 구석진 곳 소스에까지 비추니 예뻤다.

 

일이 좋았던 것과 별개로, 배우는 속도가 더뎠다. 카페 음료 레시피는 비슷한 재료가 섞여 들어가는데 양이 미묘하게 달라서 숙달되기 어려웠다. 레시피만 달달 외우니 예상치 못한 자잘한 실수들을 했고, 잘 하고 싶었던 만큼 자괴감이 들었다. 누가 혼내지 않아도 주눅 들어 있곤 해서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웠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얼굴에 대한 지적을 듣는 것도 한 몫 했다. 다른 언니들은 모두 화장을 하는데 나 혼자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보였던 모양이다. 함께 일하는 누군가 내게 화장을 원래 안하는지, 왜 렌즈를 안 끼는지, 여드름은 왜 났는지 묻는 것은 내 대답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화장하고, 안경 벗고 렌즈 끼고, 피부 관리 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들에 순종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스레 외모를 위해 돈을 쓰게 되었다. 미용 렌즈를 샀고, 로드샵 브랜드 화장품 가게의 세일 날짜를 챙기며 마스크 팩, 비비크림, 아이라이너 등을 꾸준히 샀다.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는 지금도 알바를 할 때만큼은 신념을 밀고나가지 못하겠다. 대단한 존칭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손님들을 지적하지도 못한다. 여성의 유두 노출이 죄처럼 취급 되는 사회에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근무할 수도 없다. 화장을 안 한 채 근무하는 여성인 나는 불성실한 직원인 것만 같다.

 

해고를 당해도 고마웠던 마음

 

우울증은 또 나를 몇 번이고 집어삼켰다. 학교를 자퇴한 이후에도 자해와 자살시도는 반복되었다. 그 카페에서 일하던 와중에도 쉬는 날을 골라 자살시도를 했다. 죽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즐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일을 잘 했던 것도 아니고, 외모에 대한 열등감마저 느끼며 3개월을 겨우 넘기고 그만두었다.

 

그 해 10월에는 예고 없이 집 앞에 온 구급차를 타고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강제 입원되었다. 그 전날 가정폭력으로 경찰을 불렀는데, 자살 위험이 있는 나를 가둔 것이다. 가정폭력 가해자와 할머니가 강제입원 동의서에 서명했다. 구급차는 나에게만 예고 없이 찾아온 거였다. 제발 꺼내달라고 3주 동안 빌다가 퇴원했다.

 

한동안은 서빙 알바만 계속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알바였고, 일을 배우기도 쉬웠다. 그리고 스물두 살, 다시 카페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 구직 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보고 먼저 연락이 왔다. 신도시 카페거리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였다. 규모가 꽤 큰 매장이었는데 혼자 오픈해야했다. 주방 직원 분들은 나보다 먼저 출근해 있었지만, 매장을 쓸고 닦고 화장실 청소에 빵 포장까지 혼자 해야 했다.

 

내가 일을 계속 어설프게 하니 매니저님이 더 일찍 출근해서 도와주셨다. 그곳에서 바이러스성 장염 때문에 3일간 입원하며 결석한 것까지 포함하여 한 달 쯤 일하고 해고되었다. 더 건강하고 능숙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전에도 나는 세 번 해고당한 경험이 있다. 한 번은 전화통화로, 두 번은 심지어 퇴근길에 문자로 통보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는 친절하고 예의 있게 해고해준 것이 고마웠다. 해고 과정이 예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해고당하는 노동자에게도 당연히 존중이 필요하다.

 

▶ 고시원 방문에 걸어둔 드라이플라워. 행복에 대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폭력이 가득한 집을 나오고, 행복을 찾아서

 

올해 4월, 아빠로부터 인정사정없이 얻어맞고 집을 나왔다. 그 후 삼촌을 통해 더 이상 내가 누구에게도 가족이 아님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정말 단 한 사람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전치 2주의 상해와 주거 퇴거 조치보다도, 내가 아빠를 ‘그 사람’이라고 칭하거나 경제적 지원을 해주던 삼촌에게 “나를 조종하려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경제적 지원이 끊긴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애초에 나의 불행에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남은 삶은 내 불행에 눈 하나라도 깜빡 하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

 

집을 나오며 마감 알바를 새로 시작했다. 근무 날짜를 비교적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할 생각으로 알바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 카페 알바 경력이 많으니 자연스레 또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해서 직원으로 취직할 계획이 있었다. 직원으로 일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롭다는 걸 알지만,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하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서 포기했다.

 

사실은 지금 일하고 있는 세 개의 일터(카페 두 곳과 공연 안내 알바)가 편하고 좋다. 그런데 굳이 새로운 곳을 찾았다가 실망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졸업한 대학과 전공을 적으라는 이력서에 내 고졸 검정고시 학력을 어떻게 적어야할지도 모르겠다. 직원으로 일하는 것이 마냥 더 좋을 거라던가, 금방 뽑힐 거라는 확신이 없는 것도 문제이기는 한데 아무튼 주된 이유는 내 시간을 확보하는 것에 있다.

 

숨 돌릴 틈 없는 일정으로 한 달이 빽빽하더라도 보고 싶은 공연, 듣고 싶은 강연, 참여하고 싶은 모임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니 내 일상은 대체로 즐겁다.

 

끼니는 거를 수 있다

 

공연 안내 알바는 한 주에 한 번씩 하고 있다. 티켓을 배부하고, 그 날 순서지를 접어서 배치하고, 관객들을 입장시키는 등의 일을 한다. 그렇게 세 개의 알바를 고정적으로 하면 월수입은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고시원 월세 27만원, 휴대폰 요금 10만원, 교통비 10만 원 가량의 고정된 지출을 제해도 간신히 콘서트 티켓을 살 수 있다.

 

식사는 가장 뒷전이다. 카페에서 일하며 마시는 시럽 넣은 커피만으로도 칼로리는 충족되니 밥을 안 먹어도 어지럽되 쓰러지지는 않는다. 독립 직후라 정신이 없었던 6월에는 제대로 된 식사를 두 번 밖에 하지 못했지만, 7월에는 그래도 스무 번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중 열 번의 식사를 아껴서 항상 나를 지지해주는 친구에게 생선요리를 사주었다. 내 몸을 유지시키는 끼니도 중요하지만, 내 정신을 유지시키는 끼니를 나는 더 미룰 수 없다. 오늘 미룬 식사는 내일 더 맛있겠지만, 오늘 미룬 만남이 내일 더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페미니스트 모임이나 오픈마켓에서도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는다. 무엇보다 밴드 ‘소란’의 공연을 챙겨 보러 다니는 것은 나를 반짝이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 순간이 최고의 행복인 사람들과 함께 비슷한 모양의 행복을 공유하는 건 지금의 나로서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만큼 감동적이다.

 

▶ 작년 12월 10일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에 다녀왔다. 밴드 소란의 공연. 관중을 촬영한 단체사진 속에서 기어코 나를 찾아내 SNS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바야흐로 덕질이 시작된 것. 나는 밥보다 콘서트가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올해 새해를 맞이하는 내 기도 제목은 올해만큼은 철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주 만족스럽다. 하나님 하이파이브!

 

내 인생은 생계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더라면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소에 들어가서 가해자로부터 나 자신을 격리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다른 삶을 구상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일상에 ‘이미 있는’ 행복을 지키기로 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것, 공연을 보는 것, 페미니즘 모임에 다니는 것. 모두 내게 소중한 일상이다.

 

“알바생”이라는 이름이 싫을 때도 많지만, 사람들의 시선 의식해서 그런 것뿐 다른 불만은 없다. 거의 모든 것이 공용인 좁은 고시원에서의 생활도, 식사를 줄여야만 다른 여유를 챙길 수 있는 지금의 삶도 결코 완벽하지 않음을 안다. 대신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하다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좋은 것들이 내 주변에 많다. 일상을 좋은 것들로 채우는 방법을 지금도 이미 알고 있기에, 나의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아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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