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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위안부’는 왜 아직도 숨겨진 역사인가!

김귀옥 저서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서평 에세이



기지촌 여성, 즉 ‘미군 위안부’에 관한 증언을 듣기 위해 파주의 한 마을에 갔을 때였다. 이들에 관한 기억을 소상히 기억하는 한 노인에게서 기지촌 여성에 관한 얘기를 듣던 중,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한국군 위안부’에 관한 것이었다. 놀라웠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그곳에서 노인은 한국군 ‘위안부’를 목격했다고 한다. 고지전이 임박한 병사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제공된 ‘제5종 보급품’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위안부’였다는 것이다. 군의 야만성에 망연자실해 노인의 말을 믿고 싶지 않던 차, 지난해 말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출간 소식을 들었다. 노인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김귀옥 저서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선인, 2019) 표지


한국군 ‘위안부’ 존재의 흔적을 찾아서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의 저자 김귀옥(한성대 교양학부 교수)이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1996년에 한국전쟁 시기 월남인의 정착촌 형성에 관해 연구하러 속초 ‘아바이마을’ 현지조사를 벌이다, 한 월남인과의 인터뷰 중에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저자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돌입한다. 한국전쟁 참전군인, 반공포로, 북파 공작원, 미군 등을 만나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위안부’를 찾기 힘들었다. 어렵게 찾은 경우라도 그 사실을 부인했기에, 당사자 증언을 확보하지는 못한 채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사실을 2002년 학계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여러 증인의 증언, 한국 육군의 공적 기록인 [육이오사변 후방전사:인사편], 채명신 장군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김희오 장군 회고록 [인간의 향기], 차규헌 장군 회고록 [전투], 리영희 회고집 [역정] 등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들의 회고록은 그렇다 치고, 리영희(1929~2010 언론인이자 사상가)의 회고집과 그와의 만남에 대해 저자가 전한 일화는 씁쓸하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던 리영희가 자신의 책에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스쳐 가는 후일담으로 기술한 것도 놀랄 일이지만, 저자가 그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물었을 때 그가 보인 무심함은, 당시 진보 진영 남성들의 미천한 성(젠더)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저자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한국군 ‘위안부’는 1951년에서 1954년까지 운용되었다. 규모는 서울지구 3개 소대, 강릉지구 1개 소대, 그리고 춘천, 원주, 속초 등에도 설치되었는데, 약 삼백여 명에 이르는 여성이 한국군 위안부에 배치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군부대에 설치한 위안소도 있었고, 이동식으로 운용되기도 했다. 내게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려준 노인도 위에 언급된 지역 중 한 곳에서 복무했다.


해방 후에도 계속된 ‘위안부’ 역사의 책임은?


저자는 한국군 ‘위안부’의 태생이 독자적인 산물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궤적을 함께 좇는다.


지금은 누구나 그 피해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도 1991년 김학순의 커밍아웃으로 불거지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었다. 김학순의 증언보다 훨씬 앞선 1975년, 일본 오키나와의 배봉기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음에도, 한국 정계나 언론, 학계마저도 주목하지 않았다.


미군 ‘위안부’의 존재 또한 은폐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미군에 의한 구타, 살인 등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잔혹한 범죄가 이어져도, 이 여성들을 민족적 수치로 여기는 관점이 팽배했으며 정작 이들의 반인권 현실은 조명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122명의 미군 ‘위안부’들은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정부가 미군 ‘위안부’를 제도적으로 철저히 관리했던 성병 강제 검진과 낙검소(성병 치료소) 강제 수용 과정에서 벌어진 국가폭력, 불법화된 국가의 성매매 정책에서 꼼수를 부려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조장한 점, 불법 달러의 화수분인 이들을 “애국자”라 치켜세우며 정신교육까지 시킨 점 등을 고발했다. 일본군과 미군 ‘위안부’들이 스스로 피해를 말하기 시작하자, 이들의 증언은 우리 사회에 조금씩 대항 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의 형태가 고스란히 미군 ‘위안부’와 한국군 ‘위안부’에 답습된 경로를 좇는다. 일본군은 위안소를 설치하면서 그 목적을 일본군의 사기앙양과 절제할 수 없는 성욕으로 인한 문제 해결, 그리고 성범죄 예방임을 밝힌다. [후방전사]에 따른 한국군 특수위안대의 설치 목적은 어땠을까? 군인들의 사기앙양, 전쟁으로 인한 폐단의 예방적 조치, 성욕 억제에 따른 욕구불만이나 성격 변화에 대한 예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소 설치 목적과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한국군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에 근거한다는 혐의는 당시 한국군의 주력체제를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1948년 출범한 국군의 주력, 특히 장교의 대다수는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군 복무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군’이라고 하면 ‘일본군’이 하나의 롤모델이었고, 설령 미군의 비호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일본군에 대한 기억을 체계적으로 이식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전쟁에서 한국군 ‘위안부’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일제 군대 경험에서 배운 것일 테니까 말이다.”(132쪽)


실제로 한국군 ‘위안부’ 제도를 관리했던 역대 후생감(박경원, 장호진, 장석운, 김병길)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이들은 이후 박정희 정부의 요직을 섭렵한다. 또한 한국군 지배 세력의 주축이었던 정일권, 백선엽, 김백일, 박정희, 김창룡은 모두 관동군 장교 출신이다. 이들이 만주 지역에서 항일민족주의자와 항일공산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제의 식민주의를 내면화한 채로 일본군 ‘위안부’를 당연시했듯이 한국군 ‘위안부’도 쉽게 용인했을 거라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한국군 ‘위안부’가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서 더 나아갈 필요를 느낀다. 일본 제국주의와 군대를 경험했다는 것, 그리고 해방 후 일본군 ‘위안부’를 답습해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두었다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다른 요인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미군 ‘위안부’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자. 미국 웨슬리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캐서린 문의 논고 「한미관계에 있어서 기지촌 여성의 몸과 젠더화된 국가」(『위험한 여성: 젠더와 한국의 민족주의』 삼인, 2001)를 보면, “국가 간의 세력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동적으로 (약소국) 여성이 강대국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캐서린 문은 그 예로,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현지 일본 여성들과 관계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규율을 행사한 점,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가 전략적 거점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적극 활용해 상대적 우위에 있었던 미국을 통제하며 미군이 자국 여성들과 관계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역사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에서만 대규모의 미군 ‘위안부’가 생길 수 있었을까? 미국의 다른 주둔지와 달리, 한국에만 허용되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차이가 군 ‘위안부’를 일제의 잔재인 ‘공창’이 낳은 결과라고만 이야기해선 안 되는 이유일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재미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여성 11인의 논문, 보고서, 포토에세이, 평론 등으로 구성된 책 <위험한 여성: 젠더와 한국의 민족주의>(일레인 김 外. 삼인, 2001)은 식민 후기 사회에서 한국 민족주의가 여성에게 끼친 해악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출처: 삼인 출판사 블로그)


한국전쟁/분쟁 속 여성의 위치


저자는 한국전쟁에서 성폭력이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일제 식민지의 역사도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일제에 부역했던 세력이 반공세력으로 둔갑하고, 부끄러운 친일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반공주의자로 신분세탁을 한 후 이를 증명하고자 보다 악랄한 전시 폭력을 벌였고, 이와 동일선상에서 전시 성폭력이 벌어졌으니 그 상흔은 더 깊을 수밖에 없다.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이 상처받은 남성성은 성적 욕망과 분노와 좌절의 해소책으로 성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르고, 이의 왜곡된 형태가 한국군 위안부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탈식민주의를 하지 못한 채 일제의 이등 국민이었던 남루한 한국 남성의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한국 여성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한국 전시 성폭력을 유의하여 짚고 넘어가는데, 이 역사 역시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한국군 ‘위안부’도 이 과정에서 희생당한 전시 폭력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시 성폭력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강간이다. 둘째는 모성과 여성성에 대한 폭력으로, 여성 생식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형태였으며 제주 4.3과 여순 사건 등에서도 목격되었다. 이는 남은 자식들로 하여금 어머니의 죽음조차 수치스럽게 기억하게 함으로써 제대로 애도조차 할 수 없게 만든 야만성의 극치였다. 셋째는 강제 결혼 및 납치로, 그 실상은 제주 4,3때 회자된 “서청은 올 때 한 트럭을 타고 왔다면, 갈 때는 두 트럭을 타고 갔다”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넷째는 악명 높은 성고문이다. 지난해 상영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감독, 2019)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성고문의 역사 또한 일제 식민지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는 어떤가. 소설 속 여성이 당한 성고문의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은 독자는 없었으리라. 5.18 그 시간, 그 공간에서도 군에 의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성고문은 반복되지 않았던가.


한국전쟁 후 국가는 나라의 외상을 복구하는 데만 집중했지, 그 폭력적 상황이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게 미친 내상은 외면해왔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 상황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으며 어떤 역할을 수행해왔는가를 저자는 살핀다. 남성 부재의 사회에서 가정과 사회를 지켜온 것은 역설적으로 여성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군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등 성적 착취와 성폭력의 대상이기도 했다.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사회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질문을 던진다. 당시 군의 주장처럼 ‘위안부’는 과연 성폭력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일까? 전시 성폭력이 실은 군인의 성적 욕망이 아닌 “민중을 굴복시키고 초토화시키려는 일환”으로 이용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군 위안소는 성폭력을 학습시키는 장으로 기능했으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성폭력적 시도를 확대시킬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시스템”을 내장한 군 위안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국가폭력이며, 명백한 성폭력이다.


저자는 촉구한다.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더이상 은폐해서는 안 된다고.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의 피해 또한 남성 권력이 자행한 동일한 폭력이며, 같은 뿌리에 기원한 “시효 없는 반인륜적 범죄”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지금이라도 한국군 ‘위안부’의 실태조사에 나서야 하며 피해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이 결국은 일본 정부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로잡고, 역사적 진정성 있는 사과와 실효성 있는 배상, 진정한 과거청산을 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기여할 것이”(250쪽)라고도 말한다.


중간중간 민족주의 색채를 드리우고 있는 저자의 논조에 완전히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숨겨진 진실을 하루빨리 밝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국가폭력에 대한 새로운 저항 담론을 만들어낼 힘이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 패전해 러시아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된 독일에서, 한 여인은 두 달여간의 전시 성폭력의 역사를 기록한다. “우리는 성폭력을 집단 경험으로 여긴다... 집단적 강간 경험은 집단적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여자들은 강간 경험과 괴로움을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것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토로하며 서로를 지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은 생애 동안 고통받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익명의 여성 저, 염정용 역,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마티, 2018)


독일의 한 여성이 2차 세계대전의 종반부인 1945년 4월 베를린이 러시아군에 함락되고, 이때의 베를린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익명의 여성 저, 염정용 역, 마티, 2018)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피해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 공감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이로 인해 피해자는 더더욱 깊은 곳으로 숨게 된다. 사회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피해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님에도 스스로를 영원히 심리적으로 속박하기 때문이다. 피해와 고통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참혹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혹독한 고통을 겪었을 수많은 여성의 삶이 개인적 피해가 아닌 사회적 피해가 될 때, 그들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가시화될 때,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비로소 개인의 치유뿐 아니라 사회적 치유도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성폭력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윤일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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