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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선생님들 기분 상하지 않게 강의해주세요”

달리의 생생(生生) 성교육 다이어리: 학교의 젠더와 권력을 묻다



‘말하기’ 자체가 도전인 십대들


몇 달 전, 10대 여성들과 성교육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고 동아리에 참여한 소감을 쪽지로 받은 적이 있다. 나중에 쪽지를 확인하다가 어떤 참가자의 이야기에 가슴이 쿵, 했다.


‘선생님이 질문을 많이 하셨는데 대답을 제대로 못 한 점이 개인적으로 아쉽다. 다음에 또 (동아리 활동을) 한다면 답을 더 잘 해봐야지.’


성교육 동아리 활동을 하며, 나는 참여한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답이 있는 ‘문제’를 낸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물은 것이었다. 내 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디어에 나오는 성적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성폭력 문제에 관해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등. 성을 둘러싼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해 스스로 사유한 것들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만 한 학생도 있었다. 강요된 대화도 아니고 꼭 답해야 할 의무도 없으니 각자의 참여방식과 태도가 다른 거라 생각했는데, 가끔 어떤 학생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고 싶은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어려워 혹여 추궁 당하는 느낌을 받을까 봐 더 묻지 않았다.


쪽지를 보고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대화가 생략된 교육의 경험 속에서. 어떤 학생들에게는 질문을 받고 답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도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가 묻지 않았고, 스스로도 돌보지 않았을 삶의 ‘빈 칸’을 발견했을 때 그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쪽지를 쓴 사람은 대답을 못해서, 대화를 잘 나누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낯선 질문 앞에 혼자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미안해졌다. 그 마음까지 함께 나눌 기회를 만들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지역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진행한 성교육 후기 중에서


교실 안의 권력-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가


정규 수업 밖에서 작은 동아리 형태의 성교육 활동을 시도한 것은, 질문과 대화를 할 기회가 거의 없는 교육 시스템 안에서 성교육을 하며 자주 느낀 무력감 때문이었다. 적게는 수십 명부터 많게는 수백 명까지 학생들을 앞에 놓고 혼자 한 시간 가까이 떠들고 나면, 이것이 과연 서로에게 스며들어 우리 삶을 바꿔낼 에너지가 될 수 있을지, 헛헛한 기분과 함께 회의감이 들곤 했다.


작년에 만난 스쿨미투(School Metoo) 고발자의 글을 읽고 나서야 이런 나의 갈증과 불만족이 어디에서 왔는지 보다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교실 안에서 민주적 관계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쿨미투 사건을 관통하며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학교 안에서 학생이 제일 오래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는 선생이다. 50분간 진행되는 수업 시간에는 좋든 싫든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나 역시 스쿨미투를 하기 전에는 말하고 듣는 관계의 일방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과 학생의 권력 차이는 모두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선생이 우리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학생인 우리는 발언권이 주어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예민한 애들 앞에서는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던 남선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틀리면 대뜸 ‘가시나’라는 호칭을 써가며 소리를 질렀다. 마치 리모컨을 쥔 집안의 가장처럼, 그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는 척하다가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음소거 버튼을 누르듯 조용히 하라는 말로 대화를 중지시켰다. 


아예 우리 말은 듣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저 좋을 대로 떠들 때도 많았다.” -문화기획달 자료집 「변방의 목소리, 지방의 스쿨미투를 기록하다」에 스쿨미투 고발자 ‘참외’가 쓴 글 <당신들이 ‘틀렸다’> 중.


2019~2020년 아름다운재단, KBS 거리의 만찬, 카카오같이가치 공동모금 프로젝트로 문화기획달에서 “고정관념 깨부수기 캠페인-그런 여학생은 없다”를 진행하고, 스쿨미투 주제로 포스터를 제작해 전국 스쿨미투 학교 100여 곳에 배포하였다.


누군가의 ‘기분’이 장악하고 있는 학교


교사가 학생에게 지시를 내리고 통제하는 방식의 관계에 익숙할 경우, 젠더와 성폭력 문제에 대한 교사들의 이해도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사 대상 성폭력 예방교육 현장에서 이런 질문이 자꾸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신체접촉을 하게될 수도 있는데, 어디까지가 성추행이고 아닙니까?”


심지어 어떤 교사들은 성추행에 해당하는 신체 부위와 아닌 곳을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교육 자료에 ‘성추행 해당 부위’ 표시를 해 전국의 학교에 공유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교사도 있었다. 신체접촉만이 성폭력이 아니며 모든 신체접촉을 성폭력이라 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곳’을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요즘 애들은 되바라지고 영악해서 툭 하면 민원 넣고 뻑 하면 신고해요. 미투 이후에 남자선생님들 사기가 얼마나 저하되었는지 아세요? 학생인권이 아니라 교권이 위기예요.”


많은 학교에서 젠더폭력 예방교육을 의뢰하며 ‘남자선생님들 기분 상하지 않게’, ‘남자선생님들 듣기 불편하지 않게’, ‘너무 한쪽 성별의 일방적인 입장만 강조하지 않고’ 강의를 해달라고 미리 부탁하곤 한다. 스쿨미투 사건들에서 남교사가 가해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임에도, 학교가 누구의 목소리에 가장 귀기울이고 있는지,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누구의 ‘기분’이 교실을 장악하고 수업조차 좌지우지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씁쓸한 대목이다.


성교육을 통해 민주적인 학교를 상상하다


학생이 자신의 권리에 눈을 뜰수록 교사는 자신의 입지가 약해진다고 느낀다. 위의 교사들은 표면적으로 자신이 성폭력 가해자로 오해받을까 봐 두려운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학생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힘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학교가 학생의 권리를 존중하고 학생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었다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학생과 교사가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학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방적인 권력 구조를 떠난 학생-교사 관계를 상상할 수 없는 교사들은 학생들의 문제 제기에 ‘감히’라며 괘씸해할 뿐 자신을 성찰하고 상대를 살피는 기회로 삼지 못한다. 학생들은 2020년에 사는데 어떤 교사들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학생-교사 간 민주적 관계가 이뤄지지 못한다면 학교 내 폭력/성폭력은 용인되고 지속될 수밖에 없다. 또 그 피해는 온전히 학생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문화기획달에서 제작한 ‘스쿨미투’ 카드뉴스 중


작년 스쿨미투가 있던 학교의 학생들과 상담하며, 나는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비유가 ‘감옥’이었다. 민주주의와 권리가 빠진 학교는 졸업장을 볼모로 잡혀 있는 수용소와 다름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성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야 할까 묻게 된다.


성이라는 가장 정치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민주적인 관계와 서로의 권리를, 무엇이 폭력이고 어떻게 평등해져야 하는지를, 새롭게 배우며 함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위에서 민주적인 학교를 다시 쌓아 나가기 위해 나는 다음 수업에서도 기꺼이 묻고, 들을 것이다. 그 길에 함께하는 교사가 더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글쓴이: 달리. 페미니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배우는 사람이었지 가르치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는 지방/소도시/농촌 지역의 여성청소년들과 만나면서 청소년 젠더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주제로 전국적인 강의 활동을 하는 중이다. 1년에 1시간짜리 강의로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인생에 1분이라도 성차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건 중요하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100명 중 1명이라도 눈 마주치며 들으면 대성공이라는 낮은 기대감으로 오늘도 수업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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