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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생존] 아픈 몸을 기준으로 세상을 다시 설계하자

 

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www.aladin.co.kr

 

‘괜찮다’ 안심시킬 것인가, ‘아프다’ 동정받을 것인가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다. 그만큼 질병에도 관심이 많다. 아프지 않기 위한 정보, 치료법에 대한 정보, 갖가지 약품과 식품에 대한 정보는 넘쳐난다. 드라마에서 치매나 암과 같은 질병은 인물들의 삶과 감정에 변곡선을 그리기 위한 장치로서 흔히 다루어진다. 누군가 중병에 걸렸더라는 이야기는 사람들 입에 가십처럼 오르내린다.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종이인형처럼 고정된 환자의 이미지를 덧씌워 그의 처지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눈물을 자아내는 슬픈 이야기나 감동적인 투병 성공기를 예상한다. 이때 당사자의 실제 경험이나 감정은 충분히 주목되지 않는다.

 

이처럼 ‘환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한 세상에서 ‘환자’가 된 이들은 짧은 시간 안에 양자택일해야 하는 밸런스게임이라도 하듯이 갈등하곤 한다.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축소시켜 ‘걱정 마라’, ‘이제 괜찮다’고 안심 시키기와, 아니면 무엇이 어떻게 고통스러운지를 털어놓고 동정하는 눈빛을 받기, 두 방식 사이에서 말이다.

 

‘일반인’들의 세상에선 아픈 이들을 가리키며 “과로해서 그랬나 봐”, “그렇게 술을 먹더니”, “애들 불쌍해서 어쩌누”라고 하는 말들이 들려온다. 질병을 개인의 탓으로, 비일상적 사건으로, 불쌍한 일로 밀어 놓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질병과 아픔에 대한 불안은 얼마간 관리될지 모르지만, 질병을 겪는 사람들은 고립되고, 결국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취약성을 성실히 이해하는 길은 멀어져 버린다.

 

2014년,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질병으로 인해 인생의 큰 전환을 겪은 여성들 25명을 인터뷰했다. 질병에 대한 기존의 통념으로는 담을 수 없는,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질병 서사를 조명하기 위해서였다.

 

 
중증질환을 경험한 여성 25명 인터뷰 사례집 「아플 수 있잖아」(2014)
 http://womenlink.or.kr/publications/22900 에서 PDF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그림: 윤나리, 발행: 한국여성민우회

 

스물아홉에 항암 치료를 받았던 A는 아무리 아파도 환자임을 입증할 수 없는 버스 안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동시에 자신이 24시간 그저 ‘환자’이기만 하지 않다는 점에서, 주변의 시선을 비껴간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자신도 TV 속 암 환자처럼 머리를 밀고 죽어갈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론 치료 과정의 잡다한 일들로 인해 정신없이 바쁘다는 느낌이 컸다.

 

A의 경험처럼,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는 ‘환자’의 이미지, ‘환자’와 ‘일반인’의 분리, ‘투병’과 ‘삶/일상’의 분절을 흐트러뜨렸다. 삶과 죽음 사이에 투병이 덩그러니 중간 다리처럼 놓여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쇠약함과 아픔도 제각각 삶의 일부라는 걸 드러냈다. 

 

“사실은 나도 유방암이야. 근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내가 아팠다는) 얘기를 하고 돌아가는데 어느 순간 확 느낌이 오는 게 ‘나를 일반인으로 보지 않는구나’, ‘일반인이 아닌 그냥 환자로 보는구나.’ 나는 지금 괜찮은데 자기네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 나는 ‘다른 사람’, 그렇게 되었더라고요. 그 시선을 느끼는 순간 더 이상 내가 아팠던 사실을 알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화센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아, 저 유방암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딱 그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약자가 된 느낌이 딱 드는 거예요.”

 

“(환우 모임에서) 한 친구가 자기네 회사 동료가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는 거예요. 근데 자기는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되더라는 거죠. 왜냐면 자기한테 ‘흠이 있으니까.’”

 

“우리 엄마는 자기 친구들한테 (딸이 아프다고) 하나도 얘기 안 했어요. ‘왜? 엄마는 내가 창피해?’ 이랬더니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거 걸리면 얼마나 말이 많은 줄 아느냐’, ‘네가 몰라서 그런다’고 막 그러더라고요. (...) 내가 암 걸리고 나니까 옛날 친구들이나 주변에서 와서는, ‘사실은 나도 유방암이야. 근데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신랑하고 자기 부모님밖에 모르고, 시어머니, 형님도 모르고. 이런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아픈 상태를 흠이나 결함, 비정상적 상태로 느끼는 것은 아픈 개인들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40, 50분씩 한 자리에 앉아 집중하기를 하루에 6시간 이상 하도록 훈육되었다. 달리기에서 낙오하면 점수를 못 받고, 체력 순으로 줄 세워진다. 몸이 안 좋아도 평일 8시간 이상, 아니 저녁이나 주말에도 일에 매달려 성과를 낼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니 아픈 사람은 폐 끼치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회복하여 ‘정상인’의 사이클로 돌아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질병이라는 예외적 위기를 어서 극복하고 정상적으로 복귀한다는 서사 속에는 아프고 약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역시 여성들에겐 외모가 손상되는 게 큰 고통이다?

 

질병을 극복해야 하는 위기로만 볼 뿐 그 구체적 경험들엔 무관심한 사회는 ‘환자’의 경험뿐 아니라 돌봄제공자, 노동자, 여성 등 다양한 정체성의 질병 경험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돌봄이 여전히 여성의 몫인 사회에서, 여성의 질병 경험과 남성의 질병 경험은 현저히 다르다.

 

“남편이 와서 간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병상에 하나 있을까 말까야. 그럼 우린 다 모여서 ‘저 언니는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저렇게 좋은 신랑을 만났을까’ 이러는 거지. 다 여자가 와서 간병하고 있어. 남자 병동 가면 다 딸이 와서, 아내든 엄마든 누군가 여자가 와서 붙어 있지.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진짜... 아픈 순간에도 최악이야. 맘 놓고 편할 수가 없고, 집에 중고등학교 자녀 둔 엄마들은 애들 걱정하고, 남편 걱정하고, 그러고 있더라고요.”

 

“병원에서 딱 퇴원하는 순간 환자에서 여자가 돼 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픔에도 불구하고 밥도 해야 되고, 아픔에도 불구하고 남편 뒷바라지해야 되고, 아픔에도 불구하고 아이 케어를 해야 되는 거예요.”

 

결혼해서 아이가 있거나, 가족 내 돌봄을 주 담당하는 사람이 아플 때 겪는 어려움과 1인 가구 비혼 여성이 아플 때 겪는 어려움은 서로 다르다. 비슷한 경험을 나누며 서로를 지지하는 환우회 모임에서도, 비혼 여성은 아이들 교육과 시가 식구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대화에서 소외되며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성차별 사회에서 여자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지만, 또 다른 사람은 생계부양자 남편 혹은 시가에서 기대하는 돌봄노동 책임을 수행할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질병에 관한 기존의 인식틀은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흔히 투병 과정에서의 ‘여성성 상실’이 여성들의 고통으로 꼽히곤 하지만,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는 더 많은 경험을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팠던 거 자체도 나의 의지에 벗어나는 거였지만, 거기다가 머리카락까지 미는데, 난 밀고 싶지 않은데 밀어야 되는, 내 의지에 반대되는 행위를 태어나서 처음 당해본 거였어요. 너무 너무 화가 나고. (...)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했고 가발을 벗었는데, 그때는 제가 어떤 결심을 했냐면 ‘그래, 내가 기르고 싶을 만큼 기를 거야’라고 하는 어떤 오기? 악에 받쳐서 머리칼을 길렀어요.”

 

“출산을 원하지도 않았고 결혼도 생각이 없고 하니까 폐경이라는 거 자체가 ‘여성성을 잃는다’ 그런 느낌이 저한테는 전혀 없었고요. 다만 폐경으로 인해서 노화가 급 진전되는 것이 좀 있거든요. 그것에 대한 짜증은 좀 있었어요.”

 

‘여성성’이란 유방과 자궁과 긴 머리칼에 깃든 것일까? 당사자들이 속상해 하는 것을 과연 ‘여성성의 상실’이라고만 칭하는 게 적절할까? 어쩌면 ‘관계’, ‘시선’, ‘인정’, ‘자유’, ‘존중’ 같은 말들을 경유하여 풀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유방암 치료를 받던 B는 탈모 이후 모자를 쓰지 않고 길을 걷다가, 고개까지 뒤로 돌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순간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했다고 말했다. 또한 유방 한 쪽을 절제한 후 신체 불균형에 따른 불편함 때문에 나머지 한쪽 유방도 절제할 것을 의사에게 요청했다가, 절대 그렇겐 못해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신체 불균형보다 더 큰 건강상의 우려가 있다면 설명해주었으면 될 일이나, 의사는 ‘남들은 재건 수술도 한다는데 당신은 뭐가 문제냐’며 단호히 거절할 뿐이었다. ‘역시 여성들에겐 외모가 손상되는 게 큰 고통이다’라는 통념은, 한 개인의 탈모나 유방 절제 경험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보다는 여성에게 외모라는 가치를 최우선시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점을 누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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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들을 기준으로 다시 설계하는 세상

 

아프고 약한 몸으로, 돌봄 받고 돌보는 몸으로 살아 본 사람은 그 위치에서 목격한 사회의 모습을 증언하는 존재다. 아픈 사람들의 경험을 타자화하지 않고, 이 세상을 다시 설계하기 위한 가이드로 삼아 경청하면 어떨까? 누구도 절대 아파선 안 되는 사회에서 누구나 아플 수 있는 사회로, 아픔과 취약함을 자연스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회로 가는 길의 이정표로 삼으면 어떨까?

 

“제도나 정책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누구나 각자가 다 아플 수 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하는 마음이 통했을 거고, 우리 직원들이 다 버텨주고 했던 게 그런 마음들로 가능했을 것 같아요.”

 

“오죽했으면 자기 잘릴까 봐 환자라는 거 속이고 주말에 항암 힘들게 하고 월요일에 나가서 아무 일 없이 출근한다는 게, 어우, 그건 진짜 생존이야.”

 

“누가 아프면 (주변의) 아프지 않은 사람도 정말 아프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 같아요. (...) 경제적으로 그렇지, 정서적으로도 그렇지, 일상생활이 뭐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에. 이게 좀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거나, 제도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게 마련이 되면 좀 낫지 않을까. (...) 내가 이렇게 상황에 의해서 보살피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그만큼 또 나도 누군가 자발적으로 해준 사람에 의해서 돌봄을 받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은 다음에, 그 다음에는 뭐하지? 그게 되게 막막했던 거 같고, 그런 정보를 그다지 못 얻었던 것 같아요. 아파서 치유하는 사람들 상담이나 모임은 많은데, 온통 ‘일하다가 재발했다’는 얘기만 들렸던 거예요. 일하면 안 될 거 같고. (...) (젊은 나이에 아프고 나서 어떻게) 삶에 복귀해서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좀 알려낼 필요가 있다.”

 

인터뷰이들은 회사에서 아픈 사람에 대한 배려를 구실로 업무상 불이익을 주는 경우, 아프니까 잘 해내지 못할 거란 편견을 만회하기 위해 본인이 무리하여 몸이 더 안 좋아지게 된 경우, 그래서 투병 사실을 철저히 숨기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는 사실 모두가 자기 몫 100퍼센트를 해내야 한다는 높은 기준점에서 기인하는 일이다. 쉬어가면서 사는 게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아프고 치료하고 회복하는 존재는 죄인이 된다.

 

중증질환을 겪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치고 약하고 돌보는, 또는 인생의 여러 파고를 타고 넘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매끈히 티 안 나게’, 백조처럼 일상을 꾸려나갈 것을 요구받는다. 지나치게 많은 업무를 당연시하며, 투병 후 복귀한 사람들의 노동을 제한하는 일터는 만성질환자의, 돌봄제공자의, 다양한 몸과 삶의 서사를 가진 존재들의 노동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이 사회엔 흉터가 있거나, 머리카락이 없거나, 신체 일부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없거나, 살이 찌거나 빠진 몸으로, 생기가 없거나 잘 가꿔진 외모가 아닌 채로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취약한 몸으로, 취약한 정신으로, 때론 흔들리고 일그러지고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변화해가는 몸과 새로이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변에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을 때 어떻게 어울려 살아갈 것인지도 배워야 한다.

 

약한 사람에게 강해질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지지하는 것,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난입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기술과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드넓은 스펙트럼의 차이들을 정상과 비정상이란 낡은 틀로 보지 않는 태도와,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삶에서도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시행착오와 상호 연대도 필요하다. 우리는 아픔과 돌봄, 취약함에 관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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