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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세상을 해체하고 연결하는 춤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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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와 평가의 말들이 수런거리는 여자아이의 몸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애의 몸에는 온갖 말들이 수런거린다. 몸에 깃든 신체적 특성을 제힘으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타인들에 의해 비교와 평가의 도마 위에 오른다. 놀랍게도 품평의 첫 화살 시위를 당긴 쪽은 나를 가장 아끼고 애정하는, 먼저 산 여성들인 경우가 많다. 자신들이 겪은 비난으로부터 아이가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순적이게도 해방보단 억압의 방향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해졌다.

 

“얘는 참 허리도 잘록하니, 상체는 봐줄 만한데. 다리랑 엉덩이가 터질 것 같아. 저 살만 빼면 좋을 텐데.”

“키가 안 클까 봐 걱정이지. 그래도 얼굴은 조막만 하니 안심이야.”

 

성장하는 동안 내 몸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 관심 두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품평의 언어에 집착했다. 얼굴은 작고 허리가 잘록해서 다행인 거구나. 그럼 다리랑 엉덩이 살이랑 작은 키는 어쩌면 좋을까. 뭘 하면, 뭘 먹으면, 뭘 하지 않으면, 뭘 먹지 않으면, 빠지고 자랄까.

 

옆으로 낮고 넓게 말고, 위로 높고 가늘게. 땅에서는 좁은 공간을 차지하며 하늘에 보다 가까운 몸. 마르고 가녀린 와중에 성적 매력은 충분히 풍길 수 있는 몸. 분비물과 생리혈과 욕망의 주체성은 잘 감추고, ‘깨끗하고 맑고 자신 있게’ 사회가 용인한 만큼의 섹슈얼리티를 적절히 발산하는 몸.

 

한번 각인된 언어는 힘이 쎘다. 학창 시절, 내가 속한 또래 집단을 둘러보면 나처럼 세뇌당한 여자애들 천지였다. 소위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여자애들은 어딘가 떳떳해 보였지만 신체적 변화를 우려하고, 때론 더 나아가 혐오하고,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경험하는 수순은 ‘들어갈 데 나오고 나올 데 들어간’ 애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디, 여자애가 칠칠치 못하게.”

“다리는 오므리고 얌전히 앉아야지.”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니 소중히 대하렴.”

여성의 외면을 난도질하는 언어는 여성의 움직임도 단도리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간혹 눈에 띄게 반짝반짝 빛나는 몸도 있었다.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몸, 에너지를 거리낌 없이 퍼뜨리는 몸, 통제의 언어에서 벗어나 몸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몸. 그 한줌의 몸들은 어린 시절 망아지처럼 뛰놀던 기억을 단단히 새겨 마음껏 움직이고, 몸으로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애들을 부러워만하다가 나의 청소년기는 끝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몸을 질료로 삼는 춤이라는 예술을 타고난 몸을 갖춘 사람만 수행할 수 있는 장르라 믿은 것은. 나 같은 몸으로는 절대 당도할 수 없는 예술이라 간주했기에 단 한 번도 춤이 내 삶에 소중하게 자리 잡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 스튜디오 봉쿠라지에서 열리는 ‘쿨레칸 에스쁘아’ 만딩고 춤 워크숍 중 한 장면 ⓒ쿨레칸 

 

‘바디 포지티브’를 만나 내 몸은 해방되었을까?

 

이십 대 중반 페미니즘의 언어를 만난 후, 성차별적 전형을 심어주려는 미디어, 부모,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었다. 생태 활동과 녹색 정치 운동을 오가며, 운 좋게 내 몸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동료와 벗을 만났다. 사회가 규정한 외면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느라 수용하지 못했던 몸의 변화를 뒤늦게 자각하고, 내 몸을 둘러싼 인식과 실천은 서서히 변화했다. 브라를 벗고, 겨드랑이털 깎기를 멈췄다. 잘하지도 못해서 자신이 없던 메이크업을 그만두었고, 취향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편안한 신발로 갈아 신었다.

 

그 무렵 마침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라는 단어가 패션 산업에 스물스물 등장했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 참으로 아름다운 문구가 아닌가. 그런데 잠깐, 지금껏 몸에 대한 낙인을 내면화해온 내가 하루 아침에 ‘몸 긍정 운동’에 감화받아 현재의 몸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세상의 문법은 바뀌지 않았는데?

 

차이를 차별로 오독하지 않는 페미니즘을 가치 체계의 중심에 둔 이후, 몸의 해방감을 향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감각보다는 이성을, 몸보다는 정신을 우월하다고 느꼈고, 몸을 자주 잊었다. 머리를 굴리며 사회의 변화를 목도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세상을 바꾸는 활동과 노동 역시 서로 다른 몸과 몸이 만나 빚어내는 일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내 몸 돌보기도, 동료의 몸 돌보기도 후순위로 미루어 두었다. 육체/정신, 몸/마음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는 내면의 어딘가에 주홍 글씨처럼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몸 긍정의 안도감과 편안함은 찰나에 불과했을 뿐, 나는 일상에서 몸과 불화하고 다시 화해하기를 무한 반복했다. 어떤 날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제법 만족스럽다가도, 또 다른 날에는 몸에 나타나는 변화와 징후가 두려웠다. 한번 몸에 밴 습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감에 주변의 다른 몸, 특히 질병과 장애가 부재하고 노화가 더딘, 사회가 부여한 ‘정상성’을 갖춘 몸과 나의 현 상태를 끝없이 비교했다. 나는 그나마 무엇이 낫고, 나에게는 어떤 것이 결여되었는지 무의식적으로 따져 묻는 와중에도 조신하게 다리를 오므리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너무 도드라지거나 눈에 띄지 않도록.

 

가부장적 시공간에 거주하는 몸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

 

그 무렵, 춤을 만났다. 우연이었다. 화창한 여름날,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잔디밭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그룹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잔디밭에서 무료 춤 워크숍이 열린다고 했다. 나처럼 발걸음을 멈춘 이들은 어느새 동그란 원을 그리고 섰다. 젬베 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힘차게 울렸다. 춤의 자리를 이끄는 몇몇이 구경꾼처럼 쭈뼛쭈뼛 서 있는 이들을 향해 이동했다. 나에게도 누군가 다가왔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청량한 기운을 내뿜으며, 함께 춤춰보자고 말이 아닌 몸을 건네고 있었다. (계속)

 

 

≪일다≫ 춤추는 몸들이 가리키는 페미니즘의 항로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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