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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의 다른 생각>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발자국 
 
정확히 노무현 대통령 서거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나를 지탱해왔던 중요한 무언가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 왔다. 아니, 그동안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다가 외부의 충격에 의해 무너졌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벽: 나와 대면하기" ©일다 -오승원의 그림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든가 ‘언젠가는 진실이 제 힘을 발휘할 때가 올 것이다’라는 믿음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그러면서 세상이 어찌 이럴 수 있는지, 도대체 어디서 살아갈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답을 찾기는커녕 불의와 부패, 협잡이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내가 속해 있는 세상뿐 아니라 주변사람 모두에게 화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지 못할 만큼 자제력을 잃어갔다. 한편으론 노대통령의 죽음이 어찌해서 내 일상을 이렇게도 뒤흔드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상이 조금씩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에게 한 표를 던진 유권자의 한 사람이긴 했어도, 참여정부 내내 뛰어난 대통령 한 사람에게 운명을 걸기엔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수도 없이 확인해왔기 때문이다.
 
마치 화병이 있는 사람처럼 여러 가지 신체증세도 나타났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더운 여름이 아니었는데도 밤마다 얼굴이 화끈거려 벌떡벌떡 일어나 선풍기를 켜고, 거실에 나와 한참을 보내다 다시 잠들곤 했다. 전형적인 갱년기 증세였지만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다 TV에서 족저근막염에 대한 뉴스보도를 보고서야 나의 갱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족저근막염은 전체인구의 약 1%가 발생할 정도로 흔한 질환으로, 발바닥에 전해지는 충격을 흡수해주는 족저근막이라는 근육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원인이다. 대개 발바닥 뒤쪽 통증을 호소하는데, 평소 운동량이 적은 40~50대 중년여성들이 갑자기 무리하게 걷기나 운동할 경우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게도 몇 달 전부터 발바닥 뒤쪽에 통증이 있었지만 무심히 지나쳤는데, 바로 갱년기 증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장애’와 ‘늙음’이라는 화두
 
노안이 시작된 건 꽤 된 것 같다. 사실 내게 노년은 그리 낯선 상태가 아니라고 자부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젊은 날―가령 누군가와 만나 사랑에 빠진 나, 아침저녁 빼딱구두 신고 핸드백을 메고 출퇴근하는 나,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나, 아이엄마가 된 나 등등―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은 또렷하게 그려졌다.
 
아마도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었던 ‘장애’라는 화두가 ‘늙음’이라는 화두와 닮아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장애’ 하면 연상되는 부정적인 단어들―무능, 무기력, 쓸모 없음, 의존적, 추함, 불쌍함, 불편, 고통, 재앙 등―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늙음과 거의 겹치곤 한다.
 
그런 이유로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던 젊은 날에도, 어쨌든 죽거나 병들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아 할머니가 된 뒤에는 잘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아니,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그래, 누구나 다 늙어가는 것을…. 늙은 뒤에는 누구나 신체 중 한두 군데 불편한 곳이 있게 마련이고 예외 없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나는 장애로 인해 너무 일찍 불편해졌을 뿐이고 너무 일찍 뒷전으로 밀려났을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남들보다 먼저 소외를 경험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잘 노년을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마음과 몸의 변화, 주변의 양해를 구하며…

그런데 막상 갱년기 증세가 하나 둘 나타나고, 몸과 마음이 늙어가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접하고 보니 까마득해졌다. 몸만 늙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늙는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이토록 무너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몸이 먼저 힘들다, 괴롭다 아우성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혹사시켜오다가 결국 마음까지 무너졌던 걸 까마득히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늙은 엄마, 일하는 엄마를 둔 덕분에 활발하게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도 눈치만 발달한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나보다 먼저 혹독한 갱년기를 거친 큰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바쁘답시고 단 한번도 언니를 위로해준 적이 없지 않았던가. ‘언니, 미안해. 그리고 잘 이기고 내 곁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줘서 고마워.’
 
우선 마음부터 추슬러야겠다 싶었다. 여전히 작은 일에도 화가 나는 걸 억제하기 힘들었지만, 주변의 양해부터 구했다. 남편과 가족, 그리고 함께 활동하고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내게 갱년기가 왔음을 알리고, 노력할 테니 조금만 이해하고 참아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 갱년기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높아져 있는 탓에, 모두들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이제부터는 몸을 돌보는 일만 남아 있는 셈이다. ‘오늘 일은 최대한 내일로 미루기’,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지 않기’를 모토로 삼아보면 어떨까. 어쨌든 내 노년은, 젊은 날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서 준비되어야 할 듯싶다.
 
“나 요즘 왜 이렇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
최근 참을성 많고 언제나 주변사람들을 잘 챙기는 한 친구의 고백을 듣고, 그녀에게도 갱년기가 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참지 말아. 그리고 ‘나, 갱년기야!’라고 말해버려.”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마도 이것이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발자국이 아닐까 싶다. 일다 www.ildaro.com 김효진-<오늘도 난, 외출한다> 저자. 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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