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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5년 경력의 영아씨가 풀어놓는 이야기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면서 고용시장에서의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법률및 제도의 개선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그 결과 많은 긍정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슈화되지 못했던 직장내의 성희롱.성폭력 등 성차별적 의식에서 비롯된 반여성적 관행들에 대한 문제제기도 꾸준히 있어왔다.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호텔 롯데 성희롱 사건 등은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일반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번 물음을 던져보자. 양성평등 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걸림돌은 회식자리에서 술따르기나 블루스를 강요하고 성적 농담을 수시로 내지르는 남성들뿐인가? 그들의 마초성을 교묘히 은폐하고 있는 다수의 마초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련의 노력들로 직장문화가 변화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직장여성들이 느끼는 실제 양성평등 체감지수는 그리 높지 못하다. 직장 여성들 옆에서 때로는 진정한 동료인체 위장하고 있는 여러 마초들을 여기에서 공개한다.

<1> 너무나 너무나 신사적인 그 : 연약한 그대는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요!

현재는 외국계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경력 5년차의 K모 대리는 한국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배치된 팀의 팀장은 다른 팀 여사원들로부터 ‘신사중의 신사’라는 호평을 듣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팀의 권위적인 팀장들과 달리 20대 초반의 여사원들에게 존댓말을 했으며 여사원들에게 차심부름을 시키는 대신 스스로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니 여성에게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그 ‘신사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여성이 ‘보호받아야할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에 여성이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 예상되는 책임과 권한이 따르는 업무에서 철저히 그녀를 배제시켰다.

“같이 입사한 남성동기들은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업무중요도가 높은 업무를 맡았죠. 좀 힘들고 리스크가 있어도 한 번 해보라는 분위기였지. 회사에서 살아 남으려면 다양한 업무를 통해 자신의 업무능력을 키워 나가야 하는데 아예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치명적이지요.”

이런 유형은 표면적으로는 위협적이지 않으나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 모든 여성들에게 친절하지만 그 친절성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고 따라서 ‘열등한 존재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업무분배에 있어서 보조적이며 책임과 권한이 없는 업무만을 여성에게 맡기므로써 교육,승진 등 조직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한번은 식사 자리에서 팀장이 딸애는 자기 부인처럼 음악을 공부하게 할 생각이고, 대학 졸업하면 바로 좋은데 시집보내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직장생활도 해보는게 좋을거 같다고 말했더니 대답이 ‘직장 생활하면 뭐해, 고생만 하고 어차피 애 낳으면 그만두어야 하쟎아.’ 라고 말하더군요.”

여자는 힘든 직장생활을 할 필요가 없고 가정에 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눈에는 여사원 역시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로서가 아니라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대해 회의적일 뿐 아니라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려 한다. 여성들과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넌 특별해!

중견기업 규모의 IT 업체에서 일하는 경력 8년차의 L모 과장은 이런 유형 역시 경계하라고 충고한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일만 했어요. 열심히 한만큼 인정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고, 주변의 남자선배들과 팀장 역시 그런 저의 모습에 아낌없이 격려해 주었거든요. 그들의 특별한 술자리 모임에도 끼게 되고 마치 그들의 한 일원인 것처럼 착각에 빠졌죠.”

그들은 L씨를 추켜세워 주었는데 거기엔 특별한 멘트가 늘 뒤따랐다. 일반적으로 여사원들은 직업의식도 능력도 부족한데 L씨만은 틀리다는 것이었다. ‘너만은 예외이고 특별하다’라는 칭찬은 처음에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그러나 그 달콤함 뒤에 감춰진 진실은 냉혹했다. L씨는 중요한 승진 심사과정에서 남자 후배에게 밀렸다. 팀장의 추천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경우였는데 팀장은 다른 남자 후배를 추천했던 것이다.

“결국 저는 그들에게 ‘잘난 여자’에 불과했던 거지요. 네가 능력있는 거 인정하지만 넌 결혼하면 그만둘 거고, 쟤는 평생 회사를 다녀야 하니까 이번 기회는 양보하라면서.”

대기업에서 일하는 J모 사원 역시 입사 초부터 신속하고 정확한 업무처리로 과장으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다. 과장은 “넌 정말 대단해. 다른 여사원들하고는 비교가 안돼. 계속 같이 일하자. 결혼해도 다녀야해” 라고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그러나 남자신입사원이 배치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신입사원에게 J씨가 맡고 있던 핵심 업무들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인계하도록 하는가 하면, 사적인 자리에서 “결혼하면 저 애는 곧 나가게 돼있어. 저 자리는 네 것이야. 우리 잘해 보자 ”는 식의 노골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평소에는 여성들에게 우호적인 듯 보이는 이런 유형의 남성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내부에 숨겨두었던 성차별적 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여성직장인들에게 인간적인 배신감까지 안겨준다. 또한 그들의 칭찬의 방식은 특이한데, 남자사원들과 비교하는 대신 다른 여자사원들과 비교하는 방법을 즐겨 쓴다. 여성은 남성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여성을 ‘여사원’이란 동일한 성별 집단 안에 한정하고 그 안에서의 경쟁만을 유도함으로써 여성들 사이의 비생산적인 경쟁을 부추기고 남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이다.

<3> 테스트매니아 : 누가 이기나 보자

현재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L모 팀장은 신입사원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남녀차별이 웬 말이냐, 누구나 열심히 일한만큼 능력을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 벤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팀장이 외부손님이 방문하기만 하면 같은 팀의 남자동기나 후배는 놔두고 꼭 저한테만 커피를 타달라고 부탁하곤 했죠. 말은 부탁이었지만 한가하게 신문을 뒤적이는 남자 직원들은 놔두고 일 때문에 정신 없는 저에게 그런 부탁 하는 것 자체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어요. 한마디로 인간성 테스트지.”

이런 유형의 남성이 더 위험한 이유는 비교적 성차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던 다른 남자사원들까지 성차별적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사원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차별적인 처우를 받으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다 보니까 어느덧 남자동기까지 손님이 오면 커피를 부탁하는 거에요. ‘같은 직급에, 같은 월급 받으면서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지?’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M모 사원은 우수한 성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팀장은 외부적으로는 똑똑한 사원이 들어왔다고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업무도 주지 않은 채 몇 달 동안 잔심부름만 시켜댔다. 여사원이 자신보다 소위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용인되지 않았고, 자기 밑에서 키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팀장은 아침에 와서 ‘남자들 책상 닦아라’, ‘좋은 대학 나와도 다 해야 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비꼬거나, 영어실력을 테스트해본답시고 업무에 크게 관련도 없는 영어자료를 구해다가 번역해 오라고 했죠.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뉘앙스가 담긴 의미였죠. 제가 빨리 사표쓰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어요.”

더욱이 M씨를 기분 나쁘게 만든 것은 호칭문제였다. 남자사원들에게는 OOO씨라고 부르는 팀장이 유독 여사원들에게만은 Miss.O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웨이트리스나 유흥업소 여성을 부르는 어감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였다.

팀장의 비합리적인 처우는 의욕적으로 일하려는 그녀에게 굉장한 굴욕감으로 주었고,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와 절망감을 갖게 했다. 이런 유형은 여사원이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차 심부름이나 복사 업무, 전표 처리 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집중적으로 시키거나 호칭이나 처우 부분에서 남성 사원과 현격한 차별을 둠으로써 여성직장인들에게 개인적인 무기력감을 느끼게 하고 회사 내에서 성차별적인 업무관행이 지속되도록 조장한다.

<4> 스틸의 천재 ? 네 공(功)은 내 공(功)

“일을 시작할 때에는 네가 담당이니 알아서 하라고 권한을 주는 척 하더군요. 실제로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더니, 일이 성공적으로 마감이 되니까 그때서야 임원들 앞에 가서 자신이 모두 한 양 떠들 때엔 허탈하고 억울한 그 감정이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잘못하면 네 탓이고 잘하면 자기 탓이라는 거에요.”

웹마케팅 업체에서 근무하는 S모 대리는 계속되는 팀장의 이중적인 업무스타일에 지쳐 첫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무역업체에서 일하는 Y모 사원은 실제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은 여성들이지만 공식적인 책임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아 여자직원들의 노고는 그냥 묻혀지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팀에서 남자 사원이 맡은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 업무를 같이 해줄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업무였죠. 다들 각자 업무가 있으므로 추가로 인원충원이 되어야 했어요. 그런데 팀장이 여자직원들을 불러놓고 말하길, 팀이란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니까 서로 돕는게 좋지 않겠냐면서 같이 업무를 나누어 하자는 거에요. 당시 직급이 있었던 사원 이상의 남자직원들은 업무가 과중하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고, 직급이 사원이었던 여자 직원들만이 남자사원의 지휘 아래 일을 공동분담하게 됐어요.”

여자직원들은 업무시간 안에는 자신의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업무를 위해서는야근을 계속 해야 했다. 비공식적으로 업무를 보조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고 인사고과 평가 시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남자직원만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으로 되었으며, 프로젝트의 성공도 남자직원과 팀장의 몫으로 돌려졌다. 불만이 있었으나 팀장에게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는 할 수 없었다. 조직위계질서가 분명한 회사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팀장에게 반발한다는 것은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남자 신입사원이 들어왔을 때 팀장의 의도는 분명히 드러났다. 팀장의 논리대로라면 남자 신입사원도 같이 업무분담을 해야 하는데도 여러 이유를 들면서 남자 신입사원은 업무를 분담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실제로 팀장은 다른 사람의 업무를 ‘보조’ 하는 것은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남자 신입사원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조직을 위한 협조와 희생이나, 실질적으로는 여성만이 희생을 하도록 강요하는 철저한 ‘성차별의 화신’ 들이다. 여성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업무의 성과는 항상 남성들이 ‘지도를 잘해서’ 된 것처럼 포장되기 마련이다.

직장내 성차별 드러내고, 직장문화 바꾸자

노동현장에서의 성차별적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법률과 제도적 보완은 이루어 지고 있으나, 마초들은 때로는 ‘동료’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마초성’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다. 처음에는 쉽게 그들의 ‘마초성’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여성 직장인들은 인간적인 배신감을 더욱 깊게 느끼게 된다. 그들의 의식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여성 직장인들은 회사 안에서 자리매김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야 있겠는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하는 구태의연한 성차별 논리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 개인이 거대한 ‘조직 문화’를 상대로 싸우기는 어렵다. 사내 조직을 활성화하고 외부 여성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해 묻혀져 있던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나갈 때, 여성이 진정한 노동의 주체로서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직장내 ‘성차별’이 다양한 유형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그 첫 작업일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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