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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17) 반다나 시바의 지혜를 빌리다 
 
“자연의 필요를 존중하지 않는 과학과 민중의 필요를 존중하지 않는 개발이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반다나 시바, 살아남기, '머리말')
 
‘경제가 성장해야 먹고 살 수 있다’, ‘개발을 하더라도 생태계는 지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데, 과연 그럴까? 이번 4대강 사업을 하는 목적도 먹고 살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경제를 구하고, 최신 기술을 동원해 오염된 강을 살리는 데 있다고 하질 않는가? 과연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이 자연과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물리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벌써 오래 전 우리에게 그 답을 주었다. 80년대 에 출간된 그녀의 책, <살아남기(솔, 1998)>를 지금 펼쳐들고 꼼꼼히 읽어볼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빈곤을 양산하는 경제성장의 진실
 

▲ 반다나 시바의 책, <살아남기(솔, 1998)>   
 
사람들은 경제를 살려야 부족과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경제성장을 뜻한다. 그런데 경제성장이 가난을 벗어나도록 해주기는커녕,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생소할 수도 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윤이 늘어나고 자본이 축적된다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생존과는 무관하다. 심지어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겨 가난으로 내쳐지고,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어 생명체의 수가 줄어들고 종의 다양성이 감소하더라도, 경제성장의 척도인 GNP만 늘어난다면, 경제성장의 관점에서는 성공이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발’이 필수적이다. 개발은 발전된 과학기술을 매개로 해서 천연자원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니까, 현대과학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정부도 국가의 이익을 내세워 개발에 정치적,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자유시장경제, 국가권력, 현대과학기술이 공모하는 개발. 그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이익은 가난한 사람에게 가지 않고 가난과 무관하며 가난에 무관심한 곳으로 흘러들어간다.  반다나 시바가 경제성장이 ‘내부 식민지’를 창출해 “자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개발로 인해 오히려 박탈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빈곤을 퇴치하기보다 양산하는 것,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제성장의 진실이 그렇다.
 
생존을 위협받는 ‘비참한 가난’과 욕망을 최소화한 ‘생계유지의 가난’
 
이렇게 경제성장이 낳은 빈곤은 생존의 위협과 직결되기 때문에 비참한 가난이다. 그것은 시장경제가 퇴치하겠다고 공언하는 ‘생계유지의 가난’과는 다른 것이다. 반다나 시바와 더불어, 우리도 가난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생계유지란 자연이 삼림과 들판, 하천을 재생할 수 있는 연속적인 능력에 그 기반을 둔다.” (반다나 시바, 같은 책, '자연의 여성들‘)
 
넘치는 상품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는 수준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무척 가난해 보인다. 그래서 경제성장을 통해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고, 또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은 거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이들은 자유시장경제가 조장하는, 생존적 차원의 필요를 넘어서는 욕망으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필요 이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상대적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 비하면, 정신적 빈곤을 겪지 않으니 훨씬 풍요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반다나 시바가 들려주는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지키려고 투쟁했던 인도여성들의 경험을 살펴보더라도, ‘생계유지의 가난’보다 ‘자연을 파괴하는 시장 경제의 성장’이 오히려 자연을 삶의 동반자로 여겨온 이 여성들에게 생존적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 성장은 생존적 필요 이상을 욕구하도록 부추겨 사람들을 정신적 빈곤, 상대적 빈곤으로 고통 받게 할 뿐만 아니라, 생존의 위협이 되는 빈곤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두려워해야 할 가난은 자연을 존중하는 ‘생계유지의 가난’이 아니라, ‘경제개발로 인해 내몰린 빈곤’이다. 
 
시장경제가 자극한 ‘채우지 못한 욕망’에만 예민한 사람들
 
▲ 개발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사진은 한강종합개발사업 전과 후 한강의 모습  ©상-서울시수도사업본부, 하-최병성

 
전 지구적 자유시장경제는 에너지를 포함한 천연자원을 과도하게 소비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생태 파괴적이다. 그러다 보니, 개발을 통한 경제발전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연과 생명, 그리고 생명의 다양성을 담보로 삼는다.
 
맑은 강을 개발하려 하는 까닭도 기술이 매개되어 이윤이 창출될 때만이 생산적이라고 여기는 경제논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제성장의 척도인 GNP는 오염도 이윤으로 계산한다.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오염된 생태계는 명백한 손실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강이 개발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 할지라도 GNP는 증가하며, 여기에 생태계 파괴비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게다가 파괴된 생태계를 다시 복구하기 위해 자원과 인력, 과학기술을 동원한다면 GNP가 또 증가하기 때문에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자연의 풍요를 비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이란 “단기간의 기적을 위해 생태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비싼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는 반다나 시바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자. 경제가 성장할수록, 상품이 넘쳐날수록, 과학기술을 동원할수록 자연은 가난해진다. 자연이 가난해지니, 자연과 직접 관계 맺고 사는 사람들도 가난해진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자각하건, 못 하건,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죽음의 길로 내몰리는 것이다.
 
자연과 직접 관계 맺고 생계를 꾸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 파괴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지 알지 못한다. 지금 당장 채우지 못하는 욕망, 시장경제가 자극한 욕망에만 예민하다.
 
그래서 생태계의 훼손으로 즉각 고통을 겪게 되는 이들, 즉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이 시대의 생태위기, 진정한 경제위기를 이해하고, 벗어날 길을 안내할 수 있다고 보는 반다나 시바의 생각은 옳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재생 가능한 생산, 지속가능한 개발을 삶으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다.
 
당장의 경제성장에만 집중하는 ‘지속 불가능한 개발’이 결국 사람도, 자연도 함께 죽이는 길이라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아야겠다. 더 이상 개발이 자연을 살리는 길, 경제성장이 생존을 보장하는 길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현명해져야겠다.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민주주의의 힘이 강을 살린다 | 왜 지금, 용산참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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