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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언론에서 찾아본 노인여성
최근 몇년간 언론은 고령화 문제를 앞 다투어 보도해왔다. 노인의 일, 노인의 성 등 기존에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시각도 보이지만, 여전히 언론은 노인의 존재와 고령화 현상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경향이다.
‘늙은 나라’에 미래 없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한국이 늙어간다.
급속한 고령화, 세계의 시한 폭탄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인은 오랫동안 언론에서 소외되어왔다. 노인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주변화하여 묘사하는 현상은 노인여성 보도에 있어 그 심각성이 더하다. 노인여성은 노인임과 동시에 여성이기에 언론으로부터 더욱 소외된다.
노인여성은 ‘불쌍한 할머니’?
뉴스에서 노인여성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대부분은 ‘불쌍한 할머니’ 이미지를 극대화 한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노인여성의 이미지는 스스로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범죄의 희생자, 혹은 독거노인 등 ‘불쌍한 할머니’들이다. 특히 노인여성 중에서도 독거노인을 자주 다루는 언론의 보도행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거노인 돌보며 3대 행복 만끽
독거노인에 ‘사랑’ 날라요.
차가운 냉골방 독거할머니 /정 그리운지 길 끝까지 배웅
독거 노인여성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 ‘객체’다. 즉 독거 노인여성에 관한 기사의 핵심은 이들을 돕는 ‘봉사자’들이지 노인여성 자체가 아니다. 기사 속 독거 노인여성의 목소리는 별로 드러나지 않고, 단지 봉사자들의 눈에 비추어진 불쌍한 모습이나 도움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 등 약하고 의존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뉴스가 주로 다루는 노인여성의 문제는 ‘정상가족’에 포함되지 않은, 즉 자식의 부양을 받지 못해 혼자 사는 노인여성들에 국한된다. 이는 정상가족 안에 있는 노인여성은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으리라는 선입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학대 받는 노인여성, 자식뿐 아니라 ‘배우자’에 의해서도 학대 받는 노인여성, 혹은 손자녀 양육을 위해 삶의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는 노인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희생과 헌신, ‘가부장제의 파수꾼’ 기대
‘불쌍한 할머니’ 외에 언론에서 접할 수 있는 노인여성의 이미지는 선행을 행하는 ‘훌륭한 할머니’다. 언론에서는 약방의 감초처럼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기증하거나, 부모 대신 친손자를 키워 내거나,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거나,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는 할머니들의 사연이 자주 소개된다.
선행을 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실제 비율은 알 수 없다. 뉴스에선 선행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보다 ‘할머니’들의 모습이 훨씬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뉴스의 보도방식이다. 대부분의 신문은 노인여성의 선행을 ‘개인’의 선행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인자하고 희생적인 ‘할머니’의 선행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다음에 보도된 기사 두 건을 한 번 보자. “할머니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기초생활수급자인 80대 노인여성이 평생 모은 쌈짓돈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사연을 다루고 있다. (서울신문 2005년 기사) 또 제천에 사는 엄모씨의 사연을 소개하며 40년 동안 고아 10여명을 키워냈다며 “제천 자식 부자 할머니”라고 칭했다. (세계일보)
무엇보다 언론은 가부장제를 철저히 지켜내 온 노인여성을 자주 묘사한다. 예를 들면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시부모를 평생 봉양하고,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키워낸 여성을 훌륭한 ‘모성’으로서 찬양한다.
“일제징용, 동족상잔 아픔 안고 50년 수절”한 정읍 북면에 사는 14명의 할머니께 드리는 ‘한백년한세월상 수여’에 관련한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이들 수상자들은 40년 넘게 남편을 잃고 수절한 할머니들이다. “3남 1녀가 굶주리지 않도록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집안과 자녀들에게 누가 될까봐 평생 조심하며 살아온 할머니”, “후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장하고 명예로우신 어머니들”이라고 사람들의 입을 빌어 칭송한다.
“여성이여 좀 강인해져라”라는 제목의 기사는 좀더 노골적으로 노인여성의 이미지를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 사용한다. 시집온 지 5년 만에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었지만 시부모 봉양과 두 아들 양육을 훌륭히 해 온 할머니와, 이혼 뒤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딸을 데리고 자살을 시도한 한 주부를 비교하는 것이다.
“과거 우리네 엄마와 아내들은 대부분 앞에서 소개한 이 할머니처럼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웬만한 어려움에도 꿋꿋이 가정을 지키며 남편을 돕고 자식을 돌봤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중략) 삶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내 자식은 내 손에 키운다는 자세를 갖는 게 모성의 본질 아닐까. (중략) 차제에 ‘강인한 엄마, 굳센 아내’ 캠페인이라도 해보면 어떨까. 이 정도 이뤘다면 여성계가 여성 권익 향상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여성 자신 못지않게 남성과 가족 및 사회를 따뜻하게, 그리고 힘차게 끌어안는 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일보 2005년 기사)
언론이 이런 방식으로 노인여성들의 존재에 접근할 때, 정작 노인여성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고통과 갈등을 겪는지, 이들의 실제 삶과 생각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다만 “할머니”라는 이미지가 전형적인 ‘판타지’로 포장된 채, 젊은 여성들에게 본보기로 제시될 뿐이다.
‘노인=노인남성’인가
반면 노인남성들에 대한 기사들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뤄진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인여성처럼 굳이 노인남성, 혹은 할아버지로 기사에 등장할 필요가 없이 그저 ‘노인’으로 불린다.
노인남성을 다루고 있는 기사들은 그들의 ‘사회적 성취’(“환갑에 환경운동가 변신 ‘제2삶’)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00씨’ 등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호칭을 사용하며, 이들의 사회적 성취가 저해되는 문제(“취업도 창업도 ‘실버’는 서럽다, 직업학교서 자격증 4개 따도 있으나마나”)를 사회정책적인 문제로 다룬다.
이는 언론에서 보도되는 횟수도 적거니와, 다루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나 “할머니”라는 사적인 호칭을 받고, 사회적 역할도 양육이나 동화구연 등 한정된 분야에 집중돼있는 노인여성에 대한 보도태도와 뚜렷하게 비교된다.
또한 언론의 ‘노인’ 칭호 속에 노인여성의 존재는 빠져있다. 동아일보 2005년 기사 “어르신 일자리 드려요-성서산업단지공단과 취업협약”은 ‘노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보도를 하고 있지만, 기실은 노인남성에게 제공되는 일자리다. 같은해 서울신문 기사 “고령사회, 귀농과 아버지의 위엄”은 아버지의 위엄을 위해 ‘전체 노인’에게 귀농을 권하고 있다.
또 연합뉴스와 한겨레, 조선일보 등에 일제히 실린 “노인이 노인 보살핀다” 제하의 기사들은 노인이 장애노인을 간병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 노인취업문제와 노인부양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 보도하는데, 간병노동의 대부분을 여성이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노인여성의 존재를 사적인 영역에서만 바라보고, 동정심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취급하고 있는 언론들이 노인정책을 다룰 때에도 노인여성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명절과 같은 시기에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는 ‘불쌍한 이웃’으로 등장하는 독거 노인여성의 경우도 특별하고 개인적인 사례로 다루어질 뿐, 왜 홀로 가난하게 사는 노인여성들이 많은지, 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대안이나 정책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언론은 최소한 노인여성들이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해있는지, 이들이 전 생애에 걸쳐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그 목소리를 듣고 진지하게 접근할 때에야 비로소, 지금까지 입이 마르도록 칭송해왔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진짜 모습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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