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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그대들은 고삼이 아니고 열아홉살”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지 않고도 미래에 대해 큰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십대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오히려 주변에서 걱정이 되어 가만히 두지 않는다. 박두헌씨는 그런 점에서 남다르다. 열아홉이었던 그는 대학수학능력 시험 당일에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했고, 이후 대학 입학 대신 사회로 뛰어들었다. 박두헌씨는 현재 생협에서 일하고 있다. 만약 대학에 입학했으면 2학년이 되었을 그에게 당시 수능 시험에 왜 반대했으며, 현재 생활이 어떤지 들어보자. -편집자 주>
 
2009년 11월 12일, 서울시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의 문 앞엔 겁대가리를 상실한 열아홉 살 다섯이 모였다. 가진 것은 피켓과 배짱뿐이었다. 이날은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국가에서 전국 고3들을 심판하기 위한 대수능의 날을 기리기 위해, 경남 산청에서 상경한 촌뜨기 다섯 중 하나였다.
 
‘대학을 꼭 가야해?’
 
내가 대학을 안가고 수능시험 날에 1인 시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고2 겨울방학 때었다. 다들 알겠지만 대한민국에서 고2 겨울방학이란 학생이건 학부모건 도저히 평온할 수 없는 기간이다. 학생은 이제 고3이 될 것을 생각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머리 아프고 심란한데 부모님까지 남의 아들딸과 비교해가면서 스트레스 주니 짜증나 죽겠고, 학부모는 친구 아들딸들 전교에서 몇 등 한다고 하는데 뭐하나 잘하는 게 없는 자식 놈 대학이나 가겠나 싶어 답답해 죽는다.
 
그 당시 나 역시 고3을 코앞에 두고 무척 심란했던 걸로 기억한다. 심란한 데에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엔 이 나이 먹도록 뚜렷이 정해진 목표나 준비 없이 고3이 될 것을 생각하니 조급하고 초조했다.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도 고3에 대한 압박에 시달렸으니, 일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대학을 안 가야지하고 마음을 먹기 전까지 진로를 찾고자 하는 내 나름의 노력들이 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좋아해서 운동을 하며 돈을 번다면 행복하게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체대입시학원에도 잠깐 다녔었다. 그러나 입시만을 위한 운동과 체력훈련에 금새 질렸다. 인문학과 사회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회과학부에 가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할까? 분명 내가 하고 싶은 일, 관심 있는 분야로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지 뜨뜻미지근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인데 이렇게 흥이 안날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대학을 꼭 가야만하는 걸까?’, ‘대학이 내게 정말 필요할까?’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서 번뜩, 그 동안 진로를 고민하면서 대학진학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도와 관습, 억압과 어른들의 힘의 논리에 처절하게 얽매인 나의 모습 말이다.
 
아, 왜 대학을 안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사람들은 그 길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D-DAY 2009년 11월 12일
 
나는 한국의 잘못된 입시제도와 학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수능 날 1인 시위를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친한 친구들에게 말을 했더니 평소에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하고 있던 친구들 4명이 재미있겠다며 함께 하자고 얘기했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힘이 되는 법! 그 때부터 우리는 모이면 간간이 어떻게 시위를 진행할까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11월 11일, 평일이었지만 학교에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열아홉 살 다섯 명은 서울을 향했다. 그 다섯 명 중 한명이 경기도 오산에 사는데 그나마 그 친구네 집이 서울에서 제일 가까웠기 때문에 그 친구 집에서 밤을 새가며 문구를 정하고 피켓을 만들었다.
 
문제는 4명이 어떻게 1인 시위를 할 것이냐였다. 한 명은 영상기록을 맡았기 때문에 1인 시위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다. 원래는 여러 명이 시위를 하려면 집회신고를 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꽤나 귀찮았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략을 세웠다.

‘피켓을 두 개 만들었으니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정문과 후문을 맡자. 어차피 피켓을 가진 사람만 의사 표현을 하는 거니까 30분마다 번갈아가면서 피켓을 들면 전경들도 뭐라 할 말이 없을 거야.’
 
2009년 11월 12일, 예정대로 두 팀으로 나누었고 나는 한 친구와 정문으로 가서 1인 시위를 벌이려고 하고 있는데 덩치 큰 전경들이 우릴 뺑 둘러싸고는 ‘둘이 같이 있으면 1인 시위가 아니라서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했다. “피켓을 들고 있지 않은 친구는 그냥 구경하는 것뿐인데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그래도 무조건 안 된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왔다갔다 번갈아 가면서 시위를 벌였다. 다 끝나고 후문에 있던 팀하고 만났는데 이런, 후문 애들은 둘이 딱 붙어서 사이좋게 피켓을 번갈아 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 법이 입 맛 따라 바뀌는 건 진즉에도 알았지만 고작 100m 거리를 두고 이렇게나 바뀌다니, 이런 경우 없는 법이 다 있나.
 
재밌는 에피소드는 이 날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직접 본건지 인터넷 기사를 통해 본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한 중년의 남자가 학교로 전화를 걸어 학생들에게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거냐고 욕을 해댔단다. 당시 우리의 1인 시위가 네이버와 다음 메인 기사로 오르는 등 꽤 화제가 되었었다. 나는 그 전화를 받은 선생님한테 가서 그 남자분이 무슨 얘길 하셨었냐고 여쭤봤다. 그러자 하시는 말, “잘 모르겠는데? 듣다가 중간에 끊어버려서 말이지.”
 
“그럼 뭐 해먹고 살건데?”
 
나는 아버지에게 “저, 대학 안가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우리 부모님 같은 경우엔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분들이셔서 내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시고 내가 선택하는 길을 스스로 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편이었다. 하지만 웬걸, 대학을 안가겠다고 선언을 하자 아버지한테 혼나고, 몇 일간 서로 말을 안했다.
 
“대학을 왜 안 가려고 하는데?”
난 나름대로 내 생각을 설명했다. 아버지 표정이 무서워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가 젊은 지금에야 라면만 먹고 알바하면서 살아도 살 수야 있지만 네가 마흔이 넘으면 뭐 해먹고 살 건데?”
말문이 막혔다. 그냥 나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뭐라도 하면서 살겠죠” 하고 대충 넘어가겠지만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이런 질문을 하니 참 당황스러웠다. 왜냐면 나한테 “뭐라도 하면서 살겠죠”가 바로 답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문이 “지금 넌 뭘 하고 싶니?” 라면 대답할 수 있겠지만 열여덟 살에게 “네가 마흔에는 뭘 할 거니?” 라고 물어보면 나는 당장이라도 마흔 된 어른 천명에게 열여덟 살 적 꿈이 뭐였는지 통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마흔의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 계획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디 인생이 계획대로만 살아지던가? 나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고 살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살아질까봐.
 
내 생각이야 어쨌든 아버지의 갑작스런 질문에 우물쭈물하면서 깔끔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는 아버지의 눈에 너무 대책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 후 몇일 동안 계속되는 냉전 뒤에 서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다. 아버지도 내가 어떤 뜻을 가지고 대학을 가지 않고자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셨고 그 후부턴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셨다. 심지어 1인 시위를 할 때 보도 된 인터넷 기사를 주변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셨을 정도이니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 환경의 가정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솔직히 자신의 자식이 불투명하고 위험해 보이는 길을 가길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 더군다나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대학의 졸업여부가 빈부의 격차로 보나 사회적인 위치로 보나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을 안가고자 하는 사람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데, 이런 류의 질문은 가끔 기분이 나쁠 때가 있다. 왜냐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네가 대학을 안가면 뭐 해먹고 살 건데?’ 라는 비아냥에서 비롯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에는 어느 정도 도가 터야한다.
 
독립, 그리고 생협과의 만남
 
주변에서는 나를 너무 계획 없이, 목표 없이 사는 것 아니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목표를 아주 생각 안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일 먼저 이루고자했던 목표는 공간적, 경제적 독립이었다. 졸업한 후에 같이 1인 시위 했던 친구 중 한명이랑 같이 살려고 부천에 월세 방을 구했고 독립을 원했던 난 자연히 동기 중에 가장 빨리 취업한 1인이 되었다. 바로 iCOOP부천생협이라는 곳이다.
 
‘생협’이란 ‘생활협동조합’의 준말이다. 두레 생협, 한살림 생협 등 여러 생협이 있지만 그 중 iCOOP생협은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다. 다른 대부분의 생협은 생산자생활협동조합이다. 생협은 조합원 공동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일반 기업의 경우 조직의 이익금이 소수 주주에게 배당되는 데에 비해 생협은 사회로 환원되거나 조합원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익금이 사용된다.
 
보통은 생협이라 하면 유기농물품들을 판매하는 웰빙매장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장에서 행해지는 불투명하고 불공정한 생산과정과 잘못된 경제구조를 조합원(소비자)들의 자발적 소비문화를 통해 개선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적 경제시스템을 제시하고 있는 비영리 운동조직이다.
 
처음엔 내가 생협에서 일하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오히려 진주생협에서 활동하고 계신 어머니가 하도 나한테 생협에서 일하라고 말씀하셔서 그런지 ‘다른 일은 다 해도 생협은 안해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정말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천생협과 인연이 닿게 된 건 도보순례를 하면서였다. 때는 고3 겨울방학이었고 나는 월세방 보증금을 마련하고자 남원에서 목조주택 짓는 현장에서 소위 말하는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집은 경상남도 진주인데 일터는 남원이라 출퇴근을 할 수는 없었고 거기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3주정도 지났을까 어머니한테 전화가 와서 어느 한 일본인이 안중근의사의 100주년을 기리며 평화도보순례를 하고 있다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일본인아저씨는 iCOOP생협과 교류하고 있는 ‘팔시스템’이라는 일본생협에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iCOOP생협에서 그 일본인아저씨가 도보순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도보순례를 동반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 노가다도 재밌었지만 도보순례는 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짧은 선택으로 나는 일본에서 한국까지 한 달 동안 1,000km를 걸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재밌는 추억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부산에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하루하루 그 지역의 생협 활동가들이 나오셔서 응원도보를 해주셨다. 어떤 분들은 밥도 사주시고 간식도 가져다주시면서 응원을 해주셨다.
 
그렇게 긴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하던 날 부천생협의 이사장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부천에 집을 구한 것을 아시고 생협 매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물론, 이력서를 넣고 면접도 봤다. 도보순례를 하겠다는 짧은 순간의 결정으로 이미 부천생협과의 인연이 정해져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부천생협 사무실에서 홍보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입사하고 첫 달은 매장과 사무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하다가 그 이후부턴 계속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부천생협 소식지를 만들고,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조합의 사업이나 매장의 이벤트 등을 외부에 홍보하는 일이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노는 거 말곤 제대로 뭐하나 배운 게 없는 몸이라 처음부터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타자도 엄청 느렸다. 선배활동가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고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그냥 부딪혀보기도 하면서 일을 배웠다. 여전히 미숙한 점이 많고 실수도 많지만 어쨌든 지금은 부천생협에서 일한 지 어느새 1년이 넘었고 목표했던 독립은 학교를 졸업한 시점부터는 용돈을 받지 않고 부족한 것 없이 나 혼자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의 무기가 무엇이더냐. 그래 바로 깡다구! 죽이 되 든 밥이 되든 일단 한번 부딪혀보는 거다. 그대들은 고삼이 아니라 열아홉 살이다. (박두헌)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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