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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22) 

인터넷 신문 <일다>
www.ildaro.com 는 2003년 5월 1일 창간한 대안언론입니다. <일다>는 "이루어지다, 되다"라는 의미의 우리 옛말이며 "없던 것이 생기다, 희미하던 것이 왕성해지다,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려내다"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다>는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비추는 매체로, 다양한 작가와 저널리스트들을 발굴해왔으며, 독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딴 일을 나한테 하라고 하니? 

명동을 다녀온 후엔 취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쫓겨, 동네 보습학원에 이력서를 넣어 놓았다. 생활비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마침 남편의 원고료 나올 데가 있어, 난 그것을 기다렸다. 꽤 액수가 되어 그걸로 한 달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 원고료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이번에 받은 원고료 30만원은 빌린 돈을 갚았어. 돈이 너무 없어서 ㅇㅇ한테 좀 빌려 썼거든.”
 
난 무척 실망했다. 남편은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돈을 빌려 용돈으로 썼던 것이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편에게 용돈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껴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돈까지 빌려 쓰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부부가 함께 감당하며 헤쳐 나가려 하지 않고,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혼자만 여유롭게 살았다는 게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돈을 빌렸다면, 당연히 그것부터 갚는 게 순서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달 생활비는 불과 몇 달 전에 받은, 아이의 돌반지와 백일반지를 모두 팔아 마련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내가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 결혼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지만 난 남편과의 관계를 끝장내지 않기 위해 취업을 하려고 애를 썼다. 염치불구하고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를 해,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해놓았다.
 
결혼한 여성이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조금씩 확인하면서 좌절감에 싸여가고 있을 무렵, 어떤 출판사에서 한 유명인사의 수필집 대필 제의를 해왔다. 그것이 수치스럽고 비도덕적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우리는 너무 가난했고 돈이 필요했다. 난 두 말 않고 그걸 수락했다. 그 사람을 만나 몇 차례 인터뷰를 했고, 글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점점 더 비참해져만 갔다. 인격적으로 본받을 점도 없는 시시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찾고, 또 만들고……. 그렇게 가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매스꺼워갔다. 무엇보다 내 글을 쓰고 싶었다.
 
당시 내 이런 심정을 남편에게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꼭 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 그 글을 읽고 누군가 감동한다면, 그것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잖아”라고, 나를 격려하며 위로했다.
 
그러던 차에 한 출판사에서 취직제의가 들어왔다. 안정된 수입은 물론, 출판사 업무는 내게도 충분히 만족감을 주는 일이었기에 이 행운을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필이 문제였다. 아무리 욕심을 내봐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대필을 하기로 한 출판사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는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몇 푼 안 되는 그 돈도 우리가 벌면 좋을 것 같아서, 난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 대필을 ‘당신이 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그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내게 장황하게 말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남편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딴 일을 어떻게 나한테 하라고 하니!”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날, 그 말이 문제였다. 참고 있던 분노가,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분노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난 기어이,
 
“그래 너한테는 그딴 일이 나한테는 의미 있고 할 만한 일이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밀린 각종 청구서들과 얼마 안 되는 생활비가 담겨 있는 소쿠리를 그 앞에 내팽개쳤다.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난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린 대학생들과 몰려다니고, 걔네들이 형! 형! 하니까 네가 대단한 줄 아는데, 넌 골.목.대.장이야!”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그에 대한 생각이었지만, 충분히 상처가 될 수 있기에 결코 발설하지 않았더랬다. 이런 말은 마지막에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건 용기를 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분노가, 가슴 속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불덩어리들이 목구멍을 통해 튀어나온 것이다. 내 이런 행동에 대한 남편의 반응은 이혼 요구였다.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시, 남편으로부터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아무 대응도 안하고 조용히 넘어갔더라면, 이혼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늘 잘 참는다면, 어쩌면 그와 지금까지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그렇게 분노가 살아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아기 때 헤어진 딸을 한 번도 못 본 채 긴 세월을 뭉떵뭉떵 빠져나왔어도, 여전히 그때 그러길 정말 잘했다고,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비겁하게 살아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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