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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일곱째 이야기 
 
지난 봄이던가. 꽃샘추위가 한창인 어느 날 아침, 한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해서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야, 너 지리산 어디 산다고 했지? 어제 티비에 지리산 나오던데. 와, 진짜 죽이더라. 재미있는 사람들도 많고. 나 한 번 놀러 가도 되지?”
 
한참 소식이 뜸했던 것 치고는 지나치게 허물없는, 심지어 흥분하기까지 한 친구의 목소리가 어찌나 생경하던지. 그에 말문이 막혀 수화기만 멀뚱히 들고 있는 나를, 그는 다시 한 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란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그러고 보니 니 얼굴을 어제 본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너도 지리산 학교 다니지? 푸하하!”
 
모든 도(道)는 ‘내비도’로 통한다

함양에 오면서 텔레비전을 처분한 나는 처음엔 친구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공지영 작가가 쓴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책이 인기를 얻자, 그에 힘입어 모 방송국에서 같은 주제의 다큐를 찍어 방영한 모양이었다. 그 덕이라 해야 할지, 탓이라 해야 할지. 주로 교류가 적조했던 지인들에게서 위와 같은 뜬금없는 전화 몇 통인가를 더 받았고, 그때마다 나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해서 들려줘야 했다.

 
거기는 하동이고 나 사는 데는 함양이고 어쩌고. 놀러 오는 건 괜찮지만 우리 집에 와도 티브이에 나온 사람들은 전혀 볼 수가 없고 저쩌고.
 
새삼 텔레비전의 위력을 실감한 나는 불현듯 그 다큐가 보고 싶어졌다. 공 작가의 책을 이미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은 터여서, 활자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영상으로는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내비도’ 교주이자 일명 최도사라 불리는 이. 그러니까 나는 그가 나오는 장면을 보기 위해 다시 보기 비용 700원을 들여 그 프로그램을 뒤늦게 시청한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해서 특별히 꾸미는 것 없이 맨 얼굴에 있는 그대로의 삶을 내보이는 모습이 다들 좋았지만, 역시 내게는 최씨가 하루 종일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다만 해 드는 자리를 피해 이리저리 옮겨 앉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심심한,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고 품위 있는 게임을 즐기는 도인의 풍모를 엿보았다 할까. 또한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 고통스럽기보다 그냥 내일 걱정 없이 오늘 행복한 게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의 말이야말로, 지리산 학교를 일구며 살아가는 이들이 왜 행복한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메시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씨가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는 내비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일 일 걱정 말고 남의 일 간섭 말라’는 것이다. 그저 한 번 웃자고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짧고 유머러스한 구절엔 전 세계의 많은 영성가들이 강조하는 ‘지금 이 순간을 살라’와 ‘자기 자신의 일을 하라’는 삶의 지혜가 내재해 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실재(reality)며 그 외의 것은 망상 혹은 허상에 다름 아니므로, 내가 지금이라는 실재에 현존할 때 비로소 과거와 미래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지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말에 담긴 핵심 내용이다. ‘지금’의 영적인 의미와 힘을 널리 알린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란 사실상 시간의 부재며, 그 상태에서는 모든 문제와 고통이 사라진다”고.
 
그러면 ‘자기 자신의 일을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진정한 자아 탐구의 과정을 네 가지 질문으로 압축한 ‘작업’(Work)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바이런 케이트(Byron Katie)는, 이 세상엔 세 가지 일(신 혹은 우주의 일, 다른 사람의 일, 나의 일)이 있는데 그 중 내가 간섭하거나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행동하는 나 자신의 일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마치 내 일인 양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조절하고 변화시키려는 오류를 범할 때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게 변한다면
 

▲지리산 아래 엄천강. 이곳에 댐이 건설되면 강의 생태가 파괴되고 마을 문화와 이야기가 유실될 것으로 보인다. ©자야

 
그런데 나는 최현 씨가 자신의 거처에 떡 하니 써 붙인 내비도 세 글자를 보면서, 다른 어떤 영적 메시지보다도 사람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회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대신 뒤엎고 파헤치고 허무는 광경을 너무나 많이 보아온 탓이다.
 
그래도 시골은 사정이 낫지 않느냐고 하면 천만의 말씀. 버스나 기차를 집어 타고 어디로든 떠나기만 해보라. 아스팔트를 깔거나 펜션을 짓거나, 아니면 공장을 들이고 전봇대를 새로 놓거나. 하여간 포크레인 서너 대쯤 눈에 안 띄는 곳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나 사는 곳도 예외는 아니다. 함양군 버스터미널에서 삼사십 분 달리면 제법 강폭이 넓은 엄천강이 펼쳐지는데, 발아래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든지, 그 강 위로 겹겹이 포개진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든지, 아니면 산허리마다 박혀 있는 작은 마을에 시선을 맞추든지, 어느 경우든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배어나올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고 정겹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지리산 댐이 들어서고 케이블카가 설치될 예정이라 한다. 지리산에 기대어, 혹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주민들이 반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눈앞의 이익을 위해 손을 맞잡고 밀어붙이는 개발업자와 지자체를 이기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단순한 간섭을 넘어 무지막지한 폭력이 된 지 너무나 오래된 지금, 이제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나는 좀 겁이 나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렇게 묻게 된다. 우리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마야력의 예견대로 2012년에 인류의 수명이 다한다면, 그건 필경 인간의 폭력을 더 이상 견디다 못한 자연이 스스로를 복원하려는 시도에 의해 생기는 결과가 아닐까.
 
나는 그리 환경 문제에 유별난 사람이 아니고, 그 방면으로 의식과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친구들이 종종 비웃듯 무늬만 시골사람인 것도 맞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자평한다.
 
더 많은 이들이 오르기 편하고 접근하기 쉽게 만들면 좋은 거 아니냐는 관점은 순전히 인간만의 것임을. 자연을 개발하여 얻은 이익을 업자와 주민이 나눌 수만 있다면 서로 이기는 게임 아니겠냐는 말 속엔 정작 자연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로 변한다면 인간의 삶은 그보다 더 흉측하게 뒤틀리라는 것까지.
 
개비리길, 궁금해도 안 찾는 이유
 

▲낙동강을 끼고 걷는 남지 개비리길. 한 사람씩 다닐 수 있는 좁은 벼랑길이다.

 
며칠 전, 지리산의 생명과 평화를 지켜 나가는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지리산생명연대>에서 운영하는 <카페 어슬렁>에 들렀다가, 환경단체인 <풀꽃세상을위한모임>(이하 풀꽃세상)에서 2010년 말에 펴낸 작은 잡지 《풀씨》를 보게 되었다. <풀꽃세상>은 환경이 파괴되면서 점차 사라져가는, 그래서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대상을 선정해 ‘풀꽃상’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단체인데, 마침 내가 펴든 잡지에는 16회 풀꽃상을 수상한 남지(경남 창녕군 소재) ‘개비리길’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기사가 유난히 반가웠던 건 내가 개비리길을 걸어봤기 때문일까. 그때 받은 인상이 유난히 찬란하여 내 가슴에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길 하나를 냈기 때문일까. 실제로 나는, 비록 상상이지만 이따금 그 길 위에 다시 서보곤 한다. 그러면 그날처럼 마삭줄이 마치 내 바지춤을 휘감기라도 하는 듯 걸음이 휘청거리고, 대나무 숲이 내뿜는 청량한 기운에 목 언저리를 쓰다듬게도 된다.
 
개비리길. 개 한 마리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을 지녔다는, 이름부터 촌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 길을, 나는 2010년 2월에 걸었다. 4대강 삽질에 반대하는 종교인들의 결의대회가 함안보 공사 현장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서 진행된다기에 <지리산생명연대>를 따라나선 참이었다. 굳이 개비리길을 통해서 집회 장소에 가는 이유는, 개비리길 역시 개발 논리에 휘말려 조만간 2차선 국도로 포장될 예정이기 때문이라 했다.
 
한쪽은 산의 몸통과 닿아 있고 다른 한쪽은 낙동강으로 떨어지는 절벽으로 되어 있는 길을, 그날 동행한 사람들은 마치 순례자처럼 아픈 마음으로 걸었다. 한 명씩 열을 지어 강의 속도로 천천히. 아직 바람이 차기는 했으나 우리는 어디에나 봄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 밑에 깔린 흙은 폭신했고, 키 큰 나무들은 물이 올라 흠뻑 젖었고, 심지어는 곧 물길이 끊기고 갇힐 운명에 처한 낙동강마저도 자신을 활짝 열고 연두 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던 것이다.
 
천지에 가득한 봄기운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창 물막이 공사가 진행 중인 함안보 현장은 더욱 서글퍼 보였다. 강 쪽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얼굴을 묻자니 이런 말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당신들 인간은 무엇이 급해서 이리도 서두르는 건가요? 먼저 강에게 묻고, 나무에게 묻고, 햇살과 바람에게 묻고, 또 그와 더불어 오래 살아온 생명들에게 묻는 게 순서 아닌가요?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잡지 《풀씨》를 읽어가는 내 귀엔 여전히 그 말들이 윙윙거리며 소용돌이쳤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전히 강은 파헤쳐지고 숲은 사라지고 야생동물은 죽어가고 있으니. 비극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을 오직 인간만 모르고 있으니. 무거운 마음으로 잡지를 덮는데 문득 개비리길이 궁금해졌다. 정말로 그 좁고 예쁜 길이 2차선 국도로 바뀌었을까? 이제는 개도 사람도 아닌, 차들만 쌩쌩 달리는 길이 돼버린 것일까?
 
집에 돌아온 나는 인터넷으로 알아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니, 차마 그러지 못했다. 혹여 그 길마저 그렇게 파괴된 것이 확인된다면 내 가슴에 난 길마저 끊길 것 같아서. 다시는 상상으로라도 그 길 위에 설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다 떠나서 그저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더 솔직하게는 나 자신이 속한 인간이라는 종이 너무나 무서워질 것 같아서.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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