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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24. 폭염보다 강렬했던 심연의 기억 
 
올해 여름 기온이 평년을 웃돌긴 하지만 1994년 폭염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는 기사를 인터넷 상에서 보았다. 순간 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치고야 말았다. 불과 며칠 전, 1994년 여름이 얼마나 끔찍하게 더웠는지 K에게 들려준 나로서는, 뭔가 중요한 증거 자료를 확보한 것 같아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는 그래도 바람이 제일 잘 통하는 부엌 바닥에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있는 K에게, 나는 낮에 본 기사 내용을 전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 해 여름을 통 기억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는 그가 안타까워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얼마나 덥던지 그때는 밤마다 울었다니까."
 
빠르고 완벽하게 지쳐간 그 해 여름
 
내 말이 과장이라고 여긴 K는 설마 울기까지 했겠느냐고 반문했으나, 그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 해 여름을 생각하면 아무 때고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만큼, 다소 유치하고 청승맞은 감상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정도로 그 해 여름은 더웠고, 나는 지쳤고, 삶은 애처로웠다, 고 나는 생각한다.
 
1994년이면, 내가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작은 운동단체에서 실무자로 일하던 때다. 당시엔 거의 모든 운동단체가 그랬듯이 딱히 월급이라는 게 없었기에, 나는 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국어와 논술 따위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나와 비슷한 경로를 거쳐 다른 단체 실무자로 근무하고 있던 한 후배와 함께 생활한 곳은 단독주택 2층의, 녹슨 철제 난간을 따라 일렬로 배열된 세 개의 방들 중 두 번째였다. 1970, 1980년대를 다룬 노동소설에서 흔히 묘사되곤 하던 '닭장'까지는 아니어도, 그때 내가 거한 공간은 충분히 좁고 낡고 불편했다.
 
난간을 등지고 현관문을 열면 보이던 연탄보일러와 수도, 그 흔한 찬장 하나 없이 부뚜막 위에 덩그마니 놓여 있던 양은 주전자 하나, 방으로 통하는 문짝 앞에 뒹굴던 몇 개의 신발들. 방에도 별 게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후배가 가져온 초소형의 냉장고와 텔레비전, 나무 냄새 대신 본드 냄새가 진동하던 앉은뱅이책상, 그리고 방구석에 세워진, 일명 비키니 옷장이라 불리던 사각형의 비닐 장롱이 전부였다.
 
그 방을 거처 삼아 스물네댓 살의 두 청춘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과 거리를 오가며 분주하게 일을 하고, 최소한의 돈을 벌기 위해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엔 온갖 종류의 뒤풀이를 명목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또한 좀도둑에게 두어 번쯤 방을 털렸고, 어느 날 새벽엔가는 방에 달린 좁고 긴 창으로 넘어 들어오려는 한 사내를 발견해 둘 중 누군가 먼저 소리를 질렀으며, 시시한 연애와 실연을 반복할 때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혹은 둘이 동시에 서로를 질타하고 때론 위로했다.
 
돌아보면 1993년, 1992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일상은 늘 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비슷한 속도로 흘러갔으니. 다만 1994년에는 유독 펄펄 끓는 더위와 열기 속에서, 내가 다른 때보다 더 빠르고 완벽하게 지쳐간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눈물의 원천, 그 어둡고 뜨거운 심연
 
그러던 어느 날 밤. 다른 날보다는 이르지만 보통 직장인들의 퇴근시간보다는 늦은 9시 무렵에 집에 도착했을 때다. 주인 할머니가 사는 1층 건물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좌회전을 하여 두 번째 방문 앞에 선 나는, 왠지 모르게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술한 알루미늄 새시 문 너머에 뭔가 어둡고 뜨거운 덩어리가 있어, 문을 여는 순간 그것이 마치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막함과 두려움을 억누르고 마침내 문을 여니 실제로 어둡고 뜨거운 뭔가가 나를 향해 밀려왔고, 한없이 무기력해진 나는 그로부터 빠져 나가지도, 그 속으로 뛰어들지도 못한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몇 분쯤 후엔가, 겨우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선 나는 그제야 알았다. 흘러 넘친 눈물이 끈끈한 땀과 하나로 엉겨 붙어 온몸을 폭삭 젖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날의 눈물에 대해 남들에게 말할 때면 너무 더웠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지만, 당시에도 나는 이미 어둡고 뜨거운 심연은 바깥이 아닌 내 속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눈물의 원천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심연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 똑바로 직면할 수 없었다고 할까. 아니면 그럴 용기가 없었거나.
 
확실한 것 하나는 그 시기에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고, 그 분노가 커질수록 흡사 나의 자화상처럼 보이는 그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 해 여름이 지나자마자 다른 방을 얻어 이사했는데,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내 안의 구덩이는, 내가 그것을 외면하고 방치할수록 커지는 것 같았고, 당연하게도 눈물 또한 더 자주, 많이 났다.
 
내가 비로소 내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나아가 소통을 도모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의 일이다. 그 시기가 '나는 누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게 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는 걸 보면, 그 심연은 다름 아닌 진짜 나를 알고 싶고 그 나로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니었나 싶다.
 
그랬다. 1994년을 기준으로 전후 최소 십여 년간, 나는 지금 내 가슴이 원하는 것이 아닌 과거로부터 형성된 관성과 습을 좇고 있었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매여 있었다. 그러니 표현되지 못한 욕망은 안으로만 제 구덩이를 팔 수밖에 없었을 게 아닌가. 깊고 어두운 구덩이에 갇힌 욕망이 빛을 보고 싶어 스스로를 풀어놓은 게 바로 그때 흘린 눈물들일 테고 말이다.
 
내가 되고 싶은, 나로 살고 싶은  

▲ 내가 되어 나로 살고 싶다는 근본 욕망을 발견한 이후, 내 발걸음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이 더 단순하고 선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야 
 
흔히 수행하는 사람에게 욕망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근원적인 장애물로 통한다. 일반인 중에도 욕망이라는 단어를 발설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기는 이가 상당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배경에는 근원적인 욕망이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이번 생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뭔가를 더 갖고 싶다거나 누구를 이기고 싶다는 차원의 바람과는 다르다. 집착 혹은 욕심의 동의어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소유와 승패 여부를 떠난, 세속적인 기준이나 조건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의식(consciousness)에 가깝다고 할까.
 
내 길지 않은 생을 돌아보건대, 이 욕망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 불필요한 갈등과 긴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반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각과 결정은 훨씬 선명해졌고, 덕분에 이 정도나마 현재의 삶을 감사히 누리며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도 언젠가는 이 근본 욕망마저 놓아버려야 할 대상임을 알고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순간 그 마음이 곧 욕심이 된다는 것뿐.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 있는 가능성마저 차단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길을 열어놓을 때, 내가 되어 나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박관념으로 변질돼 또 다른 심연이 되어 나를 빨아들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

자야 /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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