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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다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오진성의 ‘내 삶’ 찾기①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고등학교를 자퇴하다 

▲  오진성(23).  '나는 이제 부모님의 품 안도, 학교라는 틀 안도 아닌 내 스스로 길을 찾아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학교 안 가면 안 돼?”
“무슨 소리야,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다 참고 가는 거야~”
 
글쎄, 이 정도면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와 그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정상적인 대화가 될까?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했다고 말하면 다들 한 번쯤은 묻는 것이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지는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들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니요, 저는 어릴 때 한 번 엄마한테 학교 가기 싫다고 투정 부렸더니 ‘그래? 그럼 가지마. 학교는 꼭 안 가도 돼’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오히려 제가 ‘허거덕!’ 하고는 다시 학교 잘 다녔어요.”
 
혹시 엄마는 어린 나를 겁줘서 계속 학교에 다니게 하려고 하셨던 걸까? 분명 그건 아니었다. 엄마의 ‘진심 어린’ 말에 내가 오히려 당황해서 ‘헐, 어떻게 학교엘 안 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하니까.
 
이 대화를 가진 뒤 몇 년이 흐르고, 내가 고등학교 자퇴를 결심하자 막상 그 때는 엄마가 조심스러워하셨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도, 고등학생이 될 때에도 일반학교가 아닌 대안학교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지만, 나의 대답은 매번 ‘NO!'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그 때 어떻게 학교에서 나올 생각을 다 했는지 모르겠다. 자퇴하겠다고 했을 때 선생님도, 친구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학교 생활을 나름 잘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 공부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를 위한 공부는 어디에?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첫 학기부터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더 크게는 진로를 찾아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적성검사를 하기도, 선생님과 상담을 하기도 한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 때는 웹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기에, 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교로 가고 싶었다.
 
당시는(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성적이 좋든 나쁘든 학생들이 인문계에 가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는데, 놀랍게도 우리 반에서 실업계에 가겠다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혼자 손을 든 나를 두고 선생님과 친구들은 무척 놀란 반응이었다. 그 날 오후 나는 곧장 선생님께 불려갔고, 몇몇 선생님들께 걱정 어린 훈계를 들어야 했다. ‘아무리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실업계 나온 사람을 곱게 보지 않는다. 실업계로 가면 좋은 대학 가는 것도 무리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대학 가서 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게 요지였다.
 
결국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선생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는 아니다. 사실 나는 대학 들어가면 끝인 수능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대세를 거스를 마음이 있었던 것도, 웹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 진학이면 몰라도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그렇게까지 고민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수업 강도도 중학교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진로에 대한 결정들을 밀어붙이는 게 힘들었다. 1학년 때부터 문과냐 이과냐를 정하고, 가고 싶은 학과와 대학을 정해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모르겠다’고 하는 나에게는 ‘넌 늦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3년간의 레이스를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도 목표점을 알지 못하니 늦었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그렇게 빨리 내려야 하다니! 오히려 그 결정들을 잘 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었나? 과연 3년간의 수능 공부가 나의 진로를 밝혀줄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나를 찾고 싶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나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2개월만이었다. 학교에 대한 의구심은 계속 가져왔지만 학교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던 내가 단숨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 한번 마음을 먹고 나니 그 다음엔 오히려 편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걸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어요.’ 자퇴서를 쓰러 가서 선생님께 조심스레 했던 말이다. 부모님은 전적으로 나를 믿어주셨다. 학교 안 가도 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던 엄마 말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었으니.
 
학교 밖에서 배우다 

▲ 배움은 어디에나 있다!  '어른들과 함께 공부하며, 이미 자기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자퇴 후 나의 공부 편력은 꽤나 화려하다. 그것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들로만 골라 배웠다. 아마 학교 공부에 이골이 나서였을 테다. 우선 웹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결국 이뤘다. 학교에서 나온 그 해 여름, 직업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열일곱의 나이라는 이유로 높은 점수를 샀는지(?) 가장 어린 나이로 합격되어 어른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됐다.
 
어쩌다 보니 직업학교를 졸업하고도 어른들과 공부하게 되었다. 매주 몇 번씩 영어회화 동호회에 나가 공부하고 뒤풀이에 쫓아다니기도 했고, 직장인들과 함께 제빵을 배우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도자기 핸드페인팅을 배우러 갔을 때도, 맹자와 도덕경 같은 한문 강독을 하러 갔을 때도 항상 어른들 속에 끼어있었다.
 
하기야 내가 대안학교나 다른 대안교육공간에 간 게 아니니 또래가 아닌 어른들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도 항상 막내인데다가, 자퇴했다고 하면 왠지 대견한(?) 아이로 인식되어 예쁨 받는 게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자기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참 좋았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진짜 살아가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렇다고 어른들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졌던 건 아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배우면서도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하나를 조금 배우고 나면 다른 게 또 배우고 싶어졌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 뿐이었다. 그런 마음도 시들해지고 집에서만 보낸 시간도 많다. 도서관에서 여행 관련 책들만 잔뜩 빌려와 책과 함께 뒹굴기도 했고, 그러다 심심하면 클래식 기타를 튕기기도 했고, 새벽 네다섯 시까지 만화를 보고 다음 날 오후까지 자기도 했고,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하루 종일 미드랑 영드만 주구장창 보기도 했다.
 
뭔가를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잤다. (특히나 잠을 많이 잤던 나를 보고 엄마는 누가 물으면 ‘홈스쿨링’이 아니라 ‘홈슬리핑’을 하고 있다고 말하라고 했다. 나처럼 고1 때 자퇴한 내 동생은 ‘홈플레잉’을 한다.)
 
아기를 돌보다 

▲  나를 성장시켜준 결정적 계기는, 바로 늦둥이의 탄생이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들과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부모님이 일을 쉴 때는 부모님과, 동생이 학교에 안 갈 때는 동생과 어울려 지냈다. 나야 항상 집을 지키고 있으니 각자가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마다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함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소통했다. 우리 가족을 더욱 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성장시켜준 결정적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늦둥이의 탄생이다.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는 바람에 나는 16살 차이가 나는, 생각지도 못한 동생을 갖게 되었다. 나는 곧장 엄마를 도와 육아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받기 위해 집안일을 했는데, 아예 집에 상주하게 된 이상 나도 아기 보는 일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막내 동생의 ‘작은 엄마’가 됐다. 사실 분만 과정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았기에 마치 내 아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그다지 동안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아기엄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졸지에 어린 아줌마 취급을 받은 것! 그럴 땐 뭔가 억울하기도 했다.)
 
엄마 노릇이란 게 물론 쉬운 건 아니었다. 기저귀를 갈아주다 오줌을 맞는 건 예사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재우려다 내가 먼저 잠들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동생이 울기 시작하면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데,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어떻게 해도 나는 ‘엄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동생이 엄마를 찾을 때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밤마다 꼭 한 번씩은 깨는 동생 때문에 엄마는 항상 잠 못 이뤘다.
 
워낙 엄마와 사이가 좋긴 했지만, 엄마가 ‘엄마’로 보낸 나날들을 함께 겪고 이해하게 된 이후로 나와 엄마는 더 끈끈한 친구 사이가 됐다.
 
‘내’ 삶을 살다 

▲ 우리 가족은 단순히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서로 힘이 되는 동지들이다.
 
학교 밖에서의 3년은 학교가 아니라고 해서 ‘배움’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 세상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또한 단순히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서로 힘이 되는 동지를 만들 수 있었다. 가족과 함께 삶을 고민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학교에서 멀어진 나는 남은 십대 시절을 다양한 배움들로,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그것 말고도 큰 수확이 있다면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나는 항상 내성적인 아이였다. 주어진 일에만 충실했고, 뭐 하나 자신 있게 나서서 한 것이 없었으며, 그저 조용하게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땅만 보고 걷고 사람들 눈도 잘 쳐다보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가슴을 펴고 걷고 당당히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아끼기 시작했기 때문일 테다.
 
정해준 대로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했기에,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부모님의 품 안도, 학교라는 틀 안도 아닌 내 스스로 만들어가는 나의 삶. 앞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데도 마음은 훨씬 편했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모든 길이 곧 ‘내 삶’을 이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진성)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독립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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