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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어려운 관계
<꽃을 던지고 싶다> 18. 홀로 명절을 맞이하며 
 
*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날엔 차들은 비상등을 켜고 달린다. 서로에게 안전거리를 지키라는 신호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안전거리를 알려주는 비상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잘 모르는 내 마음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때로는 상처를 받더라도 내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알려주는 비상등.
 
8남매의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가부장의 외도와 폭력, 경제적 무능력에도 마치 의무를 치루어내 듯 명절과 제사를 준비했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이상하리만큼 명절과 제사에는 음식이 차려졌고, 철이 없던 어릴 적 나는 엄마와 음식을 준비하는 그 때가 참으로 좋았다. 엄마도 그 날만큼은 정성껏 조상에게 바칠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을 성스럽게 여기시듯 화도 짜증도 신세한탄도 잠잠해지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기도 했다. 명절을 혼자 준비해내야 하는 것도, 명절을 앞두고는 잠잠해지는 가부장의 폭력도, 마치 엄마가 이용당하는 것만 같아서 화가 날 때가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면 나는 음식 만드는 것을 도우면서 일부러 할머니와 작은 어머니들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엄마는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이라며, 나에게 ‘어른들게 함부로 말하는 나쁜 아이’라고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그런 엄마의 도리는 이혼을 하고도 3년간 지속이 되었다. 법정다툼까지 갔지만 엄마는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는지 혼자서 그 어려운 과정을 다 처리하셨다. 법정다툼이 끝난 후에도 3년간이나 집에서 나가지 않았던 가부장은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엄마는 3년 간을 제사를 지내고 명절이면 음식을 준비하셨다. 그 이상한 관계가 정리가 된 것은 나의 신고로 가부장이 유치장 신세를 지고, 새로운 여자의 집으로 가게 되면서 끝이 났다.
 
나와 형제들은 그 악마만 우리 집에서 방출되면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우리 형제가 원하는 화목한 가족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오래된 상처에 우리는 너무 지쳐있었고, 자신을 돌보기에도 너무도 버거워 보였다. 상처를 회복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너무도 어색했다. 마치 가시돋친 선인장처럼 그렇게 존재한 시간이었다.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의지하기엔 서로에게 난 가시가 아프게 했다.
 
무엇보다 엄마의 우울은 깊어졌다.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에 빠져든 것처럼 엄마는 무기력해지고 자주 눈물을 보이셨다. 엄마의 깊은 상처를 알기에 우리 형제들은 엄마에게 효도하는 것이 엄마의 삶을 보상이라도 해줄 듯 최선을 다했지만 엄마의 우울은 자꾸자꾸 깊어만 갔다. 상처는 원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결핍만을 드러낸 채 점점 더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엄마는 자신이 힘들게 지켜왔던 가정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하셨다. 자식들의 호소로 이혼을 하셨지만 드라마에서처럼 가부장이 늙고 병들면 조강지처를 찾아올 것이고, 엄마는 병수발을 하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하시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부장은 새로운 여자와 새 가정을 잘 꾸리고 있었고, 평생을 맞고 살며 고생했던 엄마가 병이 들어 있었다. 우리의 가정이 드디어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믿기엔 엄마는 정상가족에 대한 갈망이 크셨고, 이혼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그 옆을 지키던 나도 함께 그 우물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는 좀 자유롭게 살라는 오빠의 권유에, 나는 엄마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도 조금은 안정을 찾아가던 2007년 12월, 어릴 적 강간당하는 꿈을 꾸게 되고 나는 미처 스스로 알지 못하고 깊게 묻어 두었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엄마가 사로잡혀 있던 어둡고 깊은 우물에 내가 들어가 앉아 있는 듯했다. 그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나는 더더욱 생채기가 났고, 살아가는 것에 지쳐만 갔다.
 
그 다음 해 명절에 우리 형제는 모였고, 오랜만에 찾아간 나에게 가족들은 한 마디씩 했다. 그 말들은 가시처럼 날아와서 생채기를 만들었다. 내가 왜 힘든지 알지 못했던 형제들은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왜 너만 유난하게 힘든 척을 하고,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느냐는 말을 했다. 맏딸이라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포기했던 언니는 결혼하기 전 엄마에게 집을 사주었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오빠는 대학과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는데, 너는 하는게 뭐냐는 비난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서 더 서러웠는 지도 모르겠다. 그날 나는 우물에서 기어나오기 위해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가부장이 칼을 들던 날, 그 날의 기억.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내지 못해서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던 칼날의 번뜩이던 기억. 나에게 여전히 두렵고 어지럽던 기억. 내가 명절이면 집에 있지 못했던 이유는 날 강간한 삼촌이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오는 날이기에 내가 나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고, 나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쏟아내고 있었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단 두 가지 사건이었지만 가족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공감과 지지에도 연습이 필요하지만 우리 가족은 살아오면서 연습이 부족했던 것이지, 나의 말이 끝나자 각자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남아있던 나는 내가 살던 집으로 되돌아왔다. 함께 울어주었다면 내 안의 가시가 녹아내릴 수 있었을까?
 
그후 몇 달만에 찾아온 엄마에게, 엄마도 힘들었겠지만 나도 힘들었고 이젠 괜찮아지기 위해 2년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5년이 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가족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너무도 보고 싶은 엄마이지만, 엄마의 가시가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우물에서 나와야만 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세상에 온전히 혼자 던져진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5년이라는 시간으로는 부족한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낯선 시간.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혼자 맞는 명절을 낯선 표정을 지으며 보낼 것이다. (너울)

         * 2012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인터뷰 전문강좌> 소식!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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