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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까페 버스정류장] 고령가야의 왕릉에 내린 석양에 물들어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8월이 시작되던 어느 날, Y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여름방학 내내 청주의 한국교원대학에서 교장 직무연수를 받게 되었다며, 둘째 주 토요일에 연수동기생들과 함께 들리겠다고.
그는 나와 동년배지만 이미 공립 대안학교의 공모교장이고 교육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한마디로 낙숫물로 댓돌을 뚫은 의지의 교육운동가인 것이다.
그들은 둘째 주 토요일 정오 무렵에 왔다.
“저처럼 꼴통 교장들만 골라서 모시고 왔습니다.”
“모두 참 말 안 듣게 생기셨네요. 아하하하......”
그리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초면에 죄송함돠~~, 하고 덧붙였다.
카페와 담을 같이 하는 백련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한 분 한 분 소개를 받았는데 Y선생님과 나를 기준으로 모두 한두 살 터울이었다. 그들은 내가 1999년에 교육 전문잡지에 연재했던 ‘나의 학급운영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며 반가워했다.
‘저처럼’이라는 말과, 내부형공모제로 선출된 분들이라는 Y선생님의 언질에 선입견을 가진 걸까,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흔한 말에 따르자면 그들은 책임을 잘 진 게 분명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은 단순한 연수 동기생을 넘어 공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뜻과 고민을 공유하고 나누는 지기들 이었다. 아무리 젊은 교장들이라도, 아니, 교장이라는 직위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온 사회적 배경 속에서 체화되었을 중년의 이미지가 있을 법한데, 그들은 한결 같이 유연하고 사려 깊었으며, 형식적인 언행은 찾아볼 수 없는,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분들이었다.
오후 두 시가 다섯 시로 바뀌는 동안 나는, ‘학교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곳이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의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소신(?)을 잠시(!) 내려놓고 있었다.
▲ 함창의 옛 이름은 고령가야국이다. 까페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선 십분 거리에 있는 고령가야국의 왕릉 © 일다
너무 늦기 전에 가신다고들 해서 딸 나라에게 카페를 부탁하고,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고령가야태조왕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정확히는 전(傳)고령가야태조왕릉인데 첫째로는 우리 카페에서 가깝고, 둘째는 내가 처음 본 느낌을 그들도 가질 것이란 확신이 있었고, 셋째로는 시간상으로 곧 기막히게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어서였다.
“이 시간에 거기에 가면 석양(夕陽) 때문에 신비한 느낌이 더하지요. 능 지킴이도 양이에요. 석양(石羊)!”
나는 그 풍경을 놓칠까봐 서둘러 걸으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함창의 옛 이름이 고령가야국이지요. 능 지킴이 어른도 저희 카페 단골손님인데 왕족이에요. 하하하. 지금 칠순이 넘은 분인데 그 분이 어릴 때는 아직 왕릉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전이라 그 무덤 속에 들어가서 놀고 그랬대요. 무덤 속이 넓고 시원해서 더운 여름날에는........ 아, 저기 아주머니들이 물 받고 계시네. 저 물이 완전 특급수래요. 인근 절의 스님도 매일 저 물로 차를 드시고 한의원에서는 저 물로 약을 달인다는데 나도 우리 카페의 커피를 저 물로 뽑으면 더 맛있을까요? 아, 안녕하세요!!!”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물을 받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아, 물 뜨러 왔어요?”
“아니요, 손님들이 오셔서 왕릉 구경시켜드리려고요.”
“이 물 잡숴봐, 몸에 좋아.”
우리는 주렁주렁 매달아 둔 작은 국자를 하나씩 집어서 물을 받아 마셨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왕릉이에요.”
나는 오로지 석양을 볼 생각에 계단을 향해 촐랑대며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천천히 국자를 제자리에 걸고 있었다. 맞아, 천천히, 라고 생각하며 내가 국자를 잘 걸고 왔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왕릉 너머 하늘을 물들인 노을 © 일다
너른 풀밭이 석양을 받아 붉고 노란 기운에 휩싸여 있는 왕릉은 여전히 내가 본 첫인상 그대로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부처님 손바닥에 앉은 기분이 이런 걸까 싶게, 어떤 말이나 몸짓도, 어떤 기쁨이나 슬픔도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릴 듯한.
왕릉과 잔디마당을 구분하는, 허리높이로 한 단, 층을 지은 돌 위에 걸터앉거나 허리를 기대고 선 채 우린, 각자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보낼 수 없는 사랑을 붙들듯 해를 꼭 껴안은 구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삶은 신기루와 같다고.
결국은 어둠이 성큼 내려앉기 시작하자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담하건대 모두가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네 분 중 유일하게 여자인 N선생님은 나와 나란히 앞서고, 세 분은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행복하세요?”
N선생님이 물었다.
“행복해 보여요.”
N선생님이 말했다.
카페 문 앞에 이르자 그들은 나선 김에 이대로 출발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 너무 좋았습니다. 꼭 또 오겠습니다.”
다음 주에 친구랑 오겠다던 N선생님은 다음 주에 친구랑 오셨고, 이 방학이 끝나기 전에 꼭 학교 선생님들을 모시고 오겠다던 U선생님은 개학을 코앞에 두고 학교 선생님들을 모시고 오셨고, 참여소통교육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오고 싶다던 L선생님은 가을 어느 주말에 스물여덟 분의 회원들과 함께 우리 카페에서 정기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다시 그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왜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교장으로 추대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출현에 나는 정녕 행복하였다.
P/S 카페 버스정류장은 나영성, 유수용, 이범희, 여태전 교장선생님을, 아름다운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박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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