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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아프리카 로드트립> 남아공⑦ 축구가 아프리카에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애비(Abby)와 장(Jang)은 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 서른되던 해 여름 함께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www.ildaro.com]
 
‘에이즈 고아’ 천백만 명, 심각한 아프리카 에이즈 문제 

▲ 에이즈로 부모를 잃었거나 에이즈 투병 중인 아이들이 머무는 '에이즈 센터'     ©권순섭  
 
“룻을 고아원에 맡기고 왔습니다. 세 살짜리 제 손녀입니다.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아이를 떼 놓고 돌아서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딸은 지난 달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이의 아비는 지난 해 에이즈 판정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이와 살고 싶습니다. 아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음베야, 51세)
 
프레토리아의 활동가들이 일하는 빈민촌에서, 어느 날 서럽게 통곡하며 털어놓은 한 할머니의 사연이라고 했다. 51세, 한국에서라면 대체로 아직 신체도 정신도 사회 활동도 한창일 중년 여성이지만, 흑인 백인 합친 평균 수명이 간신히 60세를 웃도는 남아공에서의 51세 흑인 여인은 몸도 마음도 꼬부랑 할머니다.
 
케냐의 고아원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보았다. 부모 중 한 쪽, 혹은 양 쪽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고, 손주를 기를 수 없는 조모(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 갔는지)가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긴 경우다. UN에이즈계획(UNAIDS)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에이즈 고아는 1,100만 명에 이른다. 오늘날 서울 하늘 아래 모인 모든 사람이 고아인 것과 같다. 그것도 하나같이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프리카 에이즈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아프리카에 야생 동물이 많다는 말만큼이나 식상한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수치를 들여다보면 덤덤히 넘길 수가 없어진다. 전 세계 에이즈 환자의 70%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비율은 차치하더라도, 매년 소아 에이즈 사망자의 90%(약 310만명)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무척 심란하다. 보츠와나의 15세 청소년 세 명 중 두 명은 에이즈로 50세 이전에 사망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WHO의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는 2분에 한 명꼴로 에이즈 사망자가, 15초마다 한 명씩 새로운 HIV감염자가 발생한다. 남아공 정부는 인구의 20%가 HIV감염자인 것으로 공식 발표했지만, 오래도록 남아공의 에이즈 퇴치를 위해 일해 온 비영리 기관 전문가들은 실제 감염자가 70%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축구로 에이즈 문제를 극복한다?! 

▲ 아이들은 골대 삼을 기둥만 있으면 어디에서고 축구를 한다.   ©권순섭  
 
- 존, 에바, 부탁 좀 하자.
 
빈민촌과 교도소, 에이즈 센터 등지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시는 연 감독님이 어느 날 우리를 부르셨다. 네, 그리고 저희는 장, 애비라니까요! 항의해 보아야 소용없다. 몇 번을 고쳐 드려도 우리 이름을 제대로 부르시는 법 없는 아버지 연배의 어르신이 넉살좋게 대답하신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에바야, 존은 어디 갔니?
 
난데없는 에이즈 공부는 그렇게 부여받은 임무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달 P국에서 열리는 체육인들의 컨퍼런스에서 아프리카의 상황과 축구를 엮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웬만하면 ‘발표 시간에 슬라이드를 쭉 보여 주고 마지막에 한두 마디만 더해도 되게 해 달라’는, 말인즉 영상과 논리와 스토리를 모두 갖춰 담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였다.
 
     말하자면, 에이즈로 받는 고통이 말도 못한단 말이야. 희망이 없어. 그런데 내가 축구를 가르치면서 희망을 봤단 말이지. 아프리카의 에이즈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축구로! 그러니까 성원해 달라! 이런 얘기를 만들어 줘.
     자료는 좀 있으세요?
     자료는... 찾아 봐. 많이 있을 거야. 교도소 사역이랑 에이즈 센터랑, 사진은 많이 있어.
 
에이즈를 축구로 극복한다...라.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가 더 무언가를 질문할세라 그는 서둘러 자리를 뜨셨다. 소설로 느껴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일단 각종 보건 관련, 에이즈 관련 국제기구 홈페이지를 뒤지며 자료를 취합하기 시작했다. 센터엔 인터넷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가까운 교민의 집과 카페를 전전하며 인터넷을 얻어 써야 했다. 장은 이미 이 단체의 남아공 홈페이지 기획과 제작을 맡아 바빴다. 그 사이사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개들도 산책시키고, 때때로 방과후학교 준비를 돕기도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예배에도 참석했다.
 
여행지에서 자원활동을 한다는 것
 
아프리카 도착 전, 일 년 반의 여정동안 우리는 숱한 자원봉사를 거쳤다. 애초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세운 몇 가지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다양한 지역에서 자원봉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현지인 입장에선 수많은 관광객의 하나에 불과한 이방인이 여행지에 좀 더 깊이 들어가려면, 현장에 오래도록 몸담은 이들의 삶에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글로 읽는 현지의 이야기와 며칠이라도 몸으로 함께 부대끼며 체득하는 이야기의 깊이와 강도는 확연히 달랐다. 몇 차례의 경험 후에, 우리는 여행의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자원활동을 추천한다.
 
그렇다고 정해진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오래 된 사리(여인들의 일상복)를 가공해 패브릭 제품을 만드는 여인들 옆에 앉아 실밥을 정리하고 사리를 마름질했다. 태국에서는 카렌족 아이들에게 한글을, 동티모르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이스라엘에서는 끝도 없이 펼쳐진 올리브 밭의 추수를 도왔다. 캄보디아에서는 우연히 우리가 한국에서 하던 일이 필요한 곳을 만나, 장은 단체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고 나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내부 커뮤니케이션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케냐에선 아이들을 사진 찍고 인터뷰해 연간보고서를 정리했다.
 
자원봉사자에게 필요한 제일의 덕은 순발력과 유연함이었다. 사실 현장에서는, 짧게 머물고 가는 봉사자가 끼치는 도움보다 그들을 위해 일을 마련해 주려는 활동가들의 수고가 더 큰 경우도 많았다. 특히 본인들이 프로그램을 미리 짜 오는 봉사단과 달리 우리 같은 개별 여행자의 경우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일이 없는 날도 즐겁게 보내고, 그러다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무조건 현장 활동가들의 방식과 생각을 따라 손을 보탰다. 때로는 옳지 않은 방식이라고 여겨지거나 논쟁을 하고 싶을 때조차, 일단은 입을 다물고 귀를 여는 것이 잠시 머무는 여행자가 취할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원봉사의 목적도 열매도 ‘배움’임을 기억할 때에도, 그 쪽이 좀 더 유익했다.
 
물론, 어떤 자원봉사자들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캄보디아에서 어느 여행사 관광 코스의 하나로 반나절 자원 봉사를 했던 한국인 관광객의 무리가 그랬다. 그들은 아무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자원봉사 고객’의 보람찬 봉사를 위해 종일 스태프들과 기존의 자원봉사자들이 널을 뛰어야 했다.
 
우리 직전에 프레토리아에 다녀갔다는 의료 자원봉사팀도 그런 경우였다. 아프리카 실정보다는 ‘의사의 눈높이’가 끼니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보다 몇 달 앞서부터 이곳에 머물던 청년 ‘민’과 ‘안’은, 하루 두 끼 수십 명의 만찬을 차리고 치우느라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의료 활동이 아니면 무엇에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 들었던 의사들은, 따지고 보면 같은 자원봉사자인 민과 안을 ‘식당 아가씨 취급’했다. 의사들의 활동이야 너무 확실하고 절실하니, 어떤 태도까지 갖춰 달라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일까. 그렇게 어떤 자원봉사자들은 그야말로 상전이 되기도 한다.
 
의료진이 머무는 동안의 일화를 듣다가 포복절도한 것이 여러 차례라, 대체로 종일 나가서 일을 하는 민과 안에게 종일 방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우리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가능한 한 빨리 끝내자는 조바심과 달리,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은 언제나 예상보다 더디게 진도가 나갔다. 게다가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축구와 아프리카’, ‘축구와 에이즈’ 라니. 센터에 구비된 몇 가지의 낱장 자료를 기초로, 버벅대는 인터넷을 헤매며 근근이 한 줄 한 줄 스토리를 엮고 한 장 한 장 슬라이드를 채웠다.
 
코트디부아르 내전 종식에 기여한 축구선수 ‘드록바’ 

▲ 아프리카 최고의 축구 선수 디디에 드록바 (출처: 위키피디아)     
 
다시, 자료로 눈을 돌린다. 이번엔 아프리카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야 한다. 아프리카에 축구를 들여온 것은 역시나 식민 시절 백인 지배자들이었다. 맨 처음 축구는 노예들의 여가 생활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우월한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축구는 점점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아프리카는 축구를 통해 처음으로 지배자인 열강의 나라들과 동등해질 수 있었다.

축구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골드블렛은 “흑인 노예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수단이었던 축구가 곧 아프리카 정신을 지키는 저항의 정신이 되었다”고 평한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오래도록 축구는 누구든지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거의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그 ‘사커 드림’의 가장 파급력 있는 예는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프리미어리거 드록바다. 그의 조국은 언제나 내전 중이었다. 국가대표팀 주장이 되어 건국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날, 드록바는 카메라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일주일만이라도 총을 내려놓고, 전쟁을 멈추어 달라고. 그리고 한 마음으로 자신들을 응원해 달라고. 믿을 수 없게도 그 후 일주일간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처음으로 총성이 멈추었고, 여세를 몰아 이듬해 내전이 종식되었다.
 
“나는 다른 나라처럼 동등한 기회와 부를 갖지 못한 나라에서 자랐습니다. (중략) 나는 내가 무척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돕는 일은 제 삶에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략) 제게는 경기에서 이기는 것보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듯 축구 선수로 이룩한 세계적 성공을 개인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드록바는, 선수 활동만큼이나 왕성한 사회 활동을 지속했다. UN 홍보 대사를 역임하고, 드록바 자선 재단을 세워 고향에 병원을 세우고 학교와 유소년 시설 등을 지원했다. 에이즈 퇴치 재단을 세워 에이즈 예방 교육과 의료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한다. 여러 모로 축구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꿈이고, 멋지게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 드록바는 별명대로 아프리카 아이들의 ‘드록신’이다.
 
‘세상에는 절망을 극복하려는 기운도 가득하다’ 

▲ 축구를 사랑하는 건 여자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 권순섭 

아프리카 아이들의 축구 사랑은 유난하다. 아이들은 얼추 기둥 두 개가 선 곳이면 어디든 ‘골대’로 간주하고, 찰 수 있는 적당히 둥근 물체면 무엇이든 ‘공’으로 삼아 땅을 누빈다. 연 감독님은 아이들에게 축구는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했었다. 남아공에서의 활동을 담은 그의 개인 자료를 종합해 보면, 아이들은 체계적인 축구 교육을 통해 자기 절제, 팀을 이루는 법, 몸을 단련하는 법, 성취감과 실패감 등 다양한 가치를 익힌다고 했다.
 
프레젠테이션은 <열강의 오랜 지배와 착취에 이은 부족 간의 내전, 수백 년간 나아지지 않는 가난, 그 위에 닥친 에이즈의 재앙. 과연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멈추어 있었다. 축구가 그 답이야! 하는 연 감독님의 주장으로 이르는 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로 멈추어 둔 작업이었다.
 
그러나 막상 진지하게 파고 들어보니, 아프리카의 맥락에서 축구가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아주 억지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돌아보면 내 나라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마라톤으로, 권투로, 탁구로, 골프로 다 같이 어려운 고비마다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 준 ‘고마운 스포츠’에 대한 기억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된 경험도 있지만!)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극복하려는 기운으로도 가득하다’는 헬렌 켈러의 말을 떠올렸다. 근본적인 해결이 요원한 절망 앞에서 절대적 출구로서의 축구를 주장할 순 없을지라도, 그 기운찬 몸짓의 하나인 축구에 성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은 온당해 보였다. 게다가 아이들을 가르친 수년의 세월 후, ‘축구공 앞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고아도 에이즈 환자도 아니’라고 강하게 변호하는 지도자의 진심은 퍽 와 닿는 것이었다. ‘에이즈가 절망을 가르친다면, 축구는 희망을 가르칠 것이다’라는 연 감독님의 주장을 마지막으로 슬라이드를 마무리지었다.
 
시사회(?) 날, 다행히 고객님은 작업에 만족감을 표하셨다. 내게도 짧은 시간동안 압축된 많은 학습이 남은 작업이었다. 엉망이 된 책상을 정리하고, 다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설거지와 청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민’, ‘안’과 함께 아이들의 방과후학교를 위해 산더미처럼 한 달치 장을 보는 날이다. 이곳에서의 일상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Abby)

      *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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