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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진보정치 활동가 최현숙(1)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경험으로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나의 페미니즘”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www.ildaro.com]
 
마흔다섯, 진보정당 활동 속에 만난 ‘여성주의’
 
나는 만 56세의 여성이다. 내 삶의 과정이나 우리 사회 여성주의 운동의 과정으로 볼 때, 상당히 나이를 먹고 나서야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와 운동의 흐름을 만났다. 아마도 45살이던 2002년에 민주노동당에서 여성위원장을 맡고서부터 ‘여성주의’에 대한 좌충우돌 성찰이 시작된 것 같다.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남성중심적인 진보정당 안에서 여성위원장을 맡으면서, 당 안팎의 현안들에 대해 ‘어느 위치에서 어떤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쉴새 없이 발생하는 이슈들 때문에 감성과 몸이 먼저 움직이고, 머리는 뒤늦게 그 감성과 몸의 활동을 해석하고 성찰하는 순서였다.
 
정치활동을 하며, 나보다 먼저 여성주의를 접한 진보정당 인근의 소수 여성주의 활동가들(나이 상으로야 후배들이지만 여성주의 활동가로서는 선배인)의 애정 어린 비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진보정당 안에서 여성주의 그룹과 흐름을 만들고자 노력을 계속해왔다.
 
더불어 나 개인의 삶을 재해석함과 동시에 나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 계속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큰절을 싫어하는 ‘기집애 답지 않은’ 아이
 
경제적으로 중상층. 3녀 2남의 큰 딸. 가계의 책임에서 상당히 물러서 있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명석하고 낙천적이지만 “양반집에 여자로 태어난” 것이 평생의 한이자 트라우마였던 어머니. 두 살에 시골에서 서울로 와, 시골에 대한 기억이나 정서가 거의 없는 도시형인간 ‘나’.
 
저항은 나의 천성인 걸까? 셋째 아들네를 방문하러 시골서 오신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싫었던지…. ‘왜’의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싫은 느낌은 확연하게 기억한다. ‘천성’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 말고 다른 유추를 해본다면, 아마 다섯 살 여자아이가 들어왔을 “양반 타령이나 하는 시댁 것들”에 대한 엄마의 불만과 넋두리 때문일 게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 ‘왜’를 해석한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몸을 온전히 엎드려 배[拜]하는 행위에 대한 싫음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큰절을 하는 자리와 큰절을 받는 자리가 싫다. 정 피할 수 없으면 엉거주춤 맞절을 하면서 내 안의 인식과 타협한다.
 
세 살 위 오빠가 “다마”(유리구슬)나 딱지를 잃고 오면, 뒤쫓아 나가 그걸 다시 다 따오고야 마는 여자아이였다. 남자아이들과의 놀이(다방구, 딱지치기, 자치기, 공놀이, 전쟁놀이 등)를 더 좋아했지만,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아이스케키, 고무줄 끊기 등) 남자아이들은 끝까지 쫓아가 주먹질과 발길질까지 하며 뒤엉켜 싸웠다.
 
엄마는 내가 놀러 나가면 동네 남자아이들이 “도토리(오빠의 별명) 동생 나왔다~” 하며 우르르 도망갔다는 말을 하곤 한다. 당연히 주로 아버지로부터 “기집애답지 않다”고 많이 혼났다. 하지만 ‘여자다움’에 대한 내 안의 고민과 혼돈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단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외부와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때로 전략적으로 협상하는 것이 과제이다. ‘설득’이 주요 방식인 정치활동가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천형 같았던 ‘액취증’의 양면
 
사춘기의 시작과 함께 ‘액취증’(겨드랑이의 아포크린 샘에서 분비되는 물질이 피부 표면의 세균에 의해 분해되면서 악취가 나는 증상. 대체로 몸의 성숙과 함께 증세가 강해지며 유전적임)과 ‘아버지와의 싸움’은 나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공부 잘하기’는 그 혼돈과 좌절 속에서 자긍심을 지켜주는 보루이자 아버지나 사회와의 타협지점이었으며, 스스로 즐기기도 했다.
 
외향적이고 낙천적인 여성 청(소)년에게 여중-여고-여대 시절을 거친 ‘액취증’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천형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증상이다. 일찍 아포크린 샘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아버지는 “여자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을 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수술을 반대했다.
 
겨드랑이 냄새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거라는 지레짐작에, 내가 먼저 공간적 심리적 거리 두기를 했다. 내 안으로 들어가 또아리를 틀고 웅크려 앉아 혼돈하고 모색하고 자족하고 자괴하다가, 불가피한 외출로 사람들과 사회를 건성건성 만났다. 승객이 적은 새벽버스들을 타댄 이유 중 하나도 액취증이다. 누구에게도 내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명랑하고 적극적인 사람으로만 여겼던 듯하다.
 
반면, 액취증은 다른 천형의 사람들이나 상황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주었다. 독버섯을 주워 책상 위에 놓아두고, 많은 생각과 넋두리를 독버섯과 함께 나누었다. 무시당하고 가난하고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에게 마음이 갔다.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액취증’은 내게 천형임과 동시에 ‘여성주의’라는 단어조차 듣지 못했던 1970년대 여성청(소)년에게 여성주의 감수성과 시선을 갖게 한 ‘소중한’ 생물학적 조건이었다.
 
당시 ‘아버지와의 싸움’은 자아를 인식하면서부터 피할 수 없는 저항이었다. 내 시선에 양반네 허울뿐인 권위와 폭력으로만 여겨졌던 가부장은, 큰딸인 내게 ‘양반집 여식(더구나 큰딸)으로서의 태도와 심지어 모범!’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큰딸에게 요구되는 집안일과 동생들 돌봄만을 형식적으로 처리하며 가능한 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다.
 
아버지는 대체로 무직이거나 집 인근에서 일하셨고, 나는 ‘아버지의 집’을 가능한 일찍 나와 가능한 늦게 들어가는 것이 매일의 중요한 목표였다. 새벽 통행금지만 해제되면 첫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고, 학교서 공부하고 온다는 핑계로 최대한 늦게 귀가했다. 대학시절 서울역에 출발하는 순환 교외선을 타고 2시간 10분이 소요되는 서울 외곽을 한 바퀴 돌고 등교해도 여전히 거의 첫 등교생이었다. 학교 성적은 ‘집에 잘 있지 않음’을 확보하기 위한 아버지와의 무언의 타협지점이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싫어하는 나, 아버지의 폭력과 거짓 권위에 독기를 드러내며 대드는 나에 대해, 스스로 ‘나쁜 아이’라는 자책과 자괴를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나 태도를 달리할 수는 없었다. 독기를 드러내며 매를 벌어 맞는 동안 내 속에 수없이 되뇌인 ‘나는 정당하고 네가 틀렸다. 다만 네가 힘이 세서 내가 맞는 것뿐이다’라는 그 확신을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가부장에의 저항’은 모든 사회적 통념과 가치관에 대한 의심과 혼돈의 출발지점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신념과 가치관’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침반 없이 많은 방황과 혼돈과 이상행동들을 하는 나를, 나 스스로도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집안의 나’와 ‘집밖의 나’의 배반하는 듯한 다름에 대해, 스스로를 이중인격자로 해석하며 자괴하곤 했다.
 
하지만 그 양면성을 통해 다른 종류의 양면성과 경계들을 넘볼 수 있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온갖 이중성과 차이들 경계에서 어슬렁거리거나 구경하거나 혼돈하면서, 때로는 욕망과 호기심으로 그 경계의 위태로운 꿀맛들을 탐닉하곤 했다.
 
배타와 이타, 이기와 이타, 자아집중과 외향, 구심력과 원심력, 낮과 밤, 선함과 악함, 정(靜)과 동(動), 자긍와 자괴…. 일기장에는 늘 “파열할 것 같다”는 표현을 썼다. 미치지 않음과 자살하지 않음은, 이 모든 혼돈들과 미로들을 모두 거치고 나서 반드시 ‘나’와 만나고 ‘착하게’ 살고야 말겠다는 다짐 덕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서들은 거의 경전 같은 것이었고 많은 책들을 난독했다.
 
아버지의 집에서의 마지막 가출은 아버지의 표현으로 “근본을 모르는” 가난한 남자와의 결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배반이었고, 그 결혼을 통해 아버지의 모든 것들과 한동안 떠났다. 아버지 역시 나를 놓았고, 이후 단 한 번도 내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의 늙음과 아버지 역시 피해자 위치에서 겪었을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은, 내 편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러 가는 경로가 되었다. 또한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가족, 특히 명석하고 열정적이지만 양반집 여자의 굴레와 한을 이를 갈며 감수한 엄마를 ‘아버지의 집’ 안에서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싸움의 맹렬함과 아픔과 철없음, 그리고 자기집중과 혼돈으로 나는 어머니나 다른 가족들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그들에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가족 안에서 나는 여러 다른 맥락들 속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며, 수혜자이자 방관자였다. 이제야 혈연들을 다른 경로로 다시 만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뒤늦게 성찰하는 것은, 그때나 이제나 나는 자아집중형 인간이며, 주변사람들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 예수, 여성주의: 내 삶의 만남
 
나와 결혼했던 남자를 통해 가난을 만났고, 그 가난을 대체로 즐겼다. 부유하게 살았으니 이제 가난이 내 차례가 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방’을 가져야 했다. 두 아이와 남편과 구로공단 인근 닭장집 단칸방에 살면서도, 거의 매일 새벽시간에 홀로 깨어 부엌 부뚜막에 밥상을 펼쳐놓고 나 자신과 마주 앉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가톨릭 신앙. 젊은 시절 그 혼돈의 와중에 골목길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유혹한다고 느꼈지만, 늘 ‘아직은 아니고 더 헤매고~’ 라며 뿌리치곤 했던 예수. 서른셋 즈음 그 예수와 충돌했다. 가난을 나의 정체성으로 선택하고 남은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마침내 ‘나’를 만났고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만나가고 있다.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인지력과 건강이 버텨줄 때까지 나는 가난한 자리에서 사회운동가로 살 것이다. 뒤늦게 만난 여성주의와, 먼저 만난 예수, 그리고 사회주의적 지향은 내 안에서 거의 온전히 일치하고 있다.
 
1980년 두 아들을 만나게 한 결혼과 가정생활은 내가 선택한 삶이었고, 육아에 집중하고 남편의 사업을 함께하던 시기까지는 별다른 부딪힘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를 경로로 한 ‘나와의 만남’과 이어진 사회운동으로 남편과 부딪힘이 잦아졌다. 갈등의 핵심은 ‘나의 여성임’(그의 표현대로라면 여편네, 애엄마, 주부)에 대한 그와 나의 해석의 차이였다.
 
그의 수단은 신체폭력과 언어폭력이었고,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려웠던 건 그의 콤플렉스에 기인한 자기 과잉과 허위였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많은 것을 가졌었고, 더 많이 배웠고, 더 잘나가는 친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어린 자녀가 있다는 것’ 등의 이유로, 갈등과 분노와 ‘사랑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해해보려 하고, 그의 폭력을 참고, 결혼관계를 유지했다. 혹은 ‘나와의 만남’ 이후로는 남편과의 갈등은 부차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가난을 감수하고 선택한 ‘자유’
 
2004년, 결혼생활 25년 만에 이 관계를 끝낼 확실한 계기를 만났다.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서, 그리고 갈등 없이 나의 신념과 욕망으로 살기 위해서 별거를 시작했다.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소송 중간에 합의이혼이 이루어졌다.
 
나중에야 나는 그 결혼을 ‘아버지 가부장’에서 ‘남편 가부장’으로의 이동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 역시 나는 피해자만이 아닌 일면 가해자였고, 권력자였고, 수혜자였다. 부모라는 두 권력자의 싸움을 견뎌야 했던 두 아들에게 아픔을 주었고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여성과의 사랑’은 보다 철저한 홀로서기이자 자유의 시작이었다. 더 많은 경제적, 사회적 가난을 선택하고 감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다른 가난’의 친구들을 만나는 기회였으며, ‘여성주의와의 긴밀한 만남’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후 가난과 자유는 때때로 불안과 함께 나의 동반자이다. 그리고 아마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가고 있다. (‘착한 여자는 하늘에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우테 에어하르트) 아직 기력이 있는 나는 어디든 가서 내 노동으로 밥을 벌어 먹고, 그 노동으로 사람과 사회를 만나며,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최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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