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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
나의 페미니즘> 나를 구원한 것은 여성주의였다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 www.ildaro.com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기억은 여섯 살 때였나, 같은 유치원에 다녔던 단발머리의 여자아이였다. 항상 그 친구 앞에서는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애가 시소를 타고 있을 때 반대쪽에서 힘껏 시소를 밀어 내려줬던 그 때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네가 즐거웠으면 좋겠어’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초등학교에서도 학년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꼭 반에서 한 명씩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하얀 얼굴과 하얀 체육복이 잘 어울렸던 그 애부터, 얼굴에 비해 큰 안경을 썼던 똑똑했던 부반장, 보라색 코트를 즐겨 입었던 작은 눈의 아이까지.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아이들 사이에서 ‘저질’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했다. “저질이야!”, “저어지일~” 하는 말이 애들 사이에서 욕처럼 사용되었다. 어느 날 친구들 중 하나가 어제 TV에서 저질이 나왔다고 하면서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끼리 좋아하는 걸 봤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얼굴을 과장되게 찌푸리며 “아, 저질!”, “더러워, 저질이야!”라고 외쳤다.
 
나 역시 “저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알 수 없는 기쁨으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알 수 없는 기쁨이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안심을 주었던 것이다. 아직 어렸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스스로를 ‘남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정체화하고 있었나 보다.
 
당시 친구들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놀리며 키득대고, 당사자들은 얼굴이 발개지거나 할 때 나는 그 순간을 왜 다들 그렇게 신나고 비밀스럽고 즐겁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 부럽기는 했다. 나도 축구 잘하는 그 놈이 좋다고 말하고 얼굴이 발개지며 부끄러운 척하면서 즐겁고 싶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남자애 없냐’고 물을 때가 제일 곤란했다. 결국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아이들도 치마를 입기 싫어하고, 머리 짧고, 남자아이들 마냥 거칠게 노는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수군댔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창조하셨나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진짜 짝사랑을 했다. 동네 교회에 다니던 성가대 언니였다. 그 언니가 너무 좋아서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는 일요일을 기다렸다. 하루 종일 그 언니 생각만 하는 내가 이상했다.
 
당시 일기장은 그 언니에 대한 이야기와, 이런 나를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하나님께 ‘왜 나를 이렇게 창조하셨냐’ 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목사님도, 성경책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다 동성애자를 “동성연애자”라고 부르며 “마약보다 끊기 힘든 동성연애”, “하나님이 역겨워하는 더러운 죄인”, “구원받지 못할 자”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죽기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죽지 못했다.
 
당시에 엄마는 나 몰래 내 일기장을 뒤져보곤 하셨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기장에만 적어놨던 일에 대해 뜬금없이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남의 일기장을 함부로 봤냐고 소리쳐도, 엄마는 항상 당당했다. 그 당당함이 밉고 뻔뻔했다. 작은 가슴 안에서 팽창하는 분노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일기장에게조차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외로웠다.
 
‘얼린 배설물’ 같은 존재가 된 딸
 
고등학생이 되고, 연예인 홍석천씨가 게이라는 사실이 이슈가 되었을 무렵에 같은 반 친구와 처음 ‘연애’라는 것을 했다. 평생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자인 나를 좋아해주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은 날 들뜨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애를 한다는 것을 눈치 챈 반 아이들은 대놓고 우리를 따돌리며 손가락질했다.
 
딸이 여자아이와 사귄다는 것이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간 후부터, 집안에서의 나는 마치 얼린 배설물이 된 것 같았다. 꽁꽁 얼려진 더러운 것.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썩은 내가 날 테니 차갑게, 차갑게 얼려야 된다고 나도,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부모님과의 대화는 표면을 어색하게 겉돌다가 쾅 하고 불꽃 튀게 충돌하기를 반복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달라질 거라 믿었지만 여전히 동성애자인 딸에게, 부모님이 내린 첫 번째 ‘처방’은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권사님께 정기적으로 기도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남부끄러워 모임에서는 기도 제목으로도 못 내놨다는 ‘박은우 정상인 만들기 중보 기도’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집안 거실에서 행해졌다.
 
권사님은 나를 볼 때마다 ‘너 때문에 네 엄마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 가족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그래서 반 년 정도 선교단체에 있어보라는 부모님의 두 번째 ‘처방’이 내려졌을 때, 순순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세상과 고립된 그곳에서도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극도로 괴롭고 피곤한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끝까지 오기로 버텼다. 이런 곳까지 다녀왔는데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부모님도 이젠 나를 바꾸는 일을 포기할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교단체에서 돌아온 뒤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차라리 밖에서 살인을 하고, 살인자라고 하는 게 더 낫다”, “죽어버려라”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셨다. 그러면서도 나를 붙잡고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를 위해 음식과 선물을 아낌없이 사오길 반복했다. 엄마와 내가 서로 미쳐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크리스천들과 만나며  

▲ 여성주의는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일다- 정은의 빨강그림판 
 
가족과 교회와 애인 사이에서 점점 분열되어가던 이십 대 초반,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사건이 일어났다. ‘동성애자여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그전까지 아무도 나에게 동성애자여도 괜찮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입 밖으로 ‘동.성.애.자’,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단어와 존재를 낯부끄럽게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그만큼이나 역겨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일기장에도 쓰지 못했던 외롭고 무서웠던 지난 시간들이 마치 참았던 구토가 올라오듯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창피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다 토해낼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이 고마웠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만난 연령도, 생김새도 다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공통적인 감수성을 공유한 듯 보였다. 그것은 소수자의 감수성 그리고 여성주의 감수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생김새나 옷차림 때문에 혹은 나이가 적거나 많다고 해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은 ‘이성애주의’ 때문이라는 것도 배웠다.
 
이처럼 나에게 여성주의는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녀’(여성주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은 극도로 삼갔다. 보통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혼을 낼 때는 매우 엄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참 든든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친구들과 새로운 교회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동안 기독교인들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또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와 싸우기도 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정말로 역겹고 부끄러운 것은 성소수자인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배척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분열적 행동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몸을 사리며 고지식하게 살아왔던 엄마는 사랑하는 딸이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까 봐 너무 두려웠던 게다. ‘숨기고 살면 되는데 왜 숨기질 못하니…’ 가슴을 치며 눈물로 호소했던 엄마가 가엾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꽁꽁 얼린 배설물이라 생각했던 시절, 어디에도 마음 속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그 때에 진짜 죽어버렸으면 어쩔 뻔했나? 또 살아남았더라도 내 인생에서 여성주의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죽거나 미쳤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글을 쓰며 나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
‘오, 주님. 여성주의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박은우

[나의 페미니즘 원문 보기] http://ildaro.com/sub_read.html?uid=624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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