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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11. 나이듦을 바라보는 시선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새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나는, 늙고 있다
 
“노년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운명의 순간까지 질질 끌려온 것 같다. 나는 거울 속에서 쭈글쭈글한 할망구의 얼굴을 본다. 결국 이렇게 늙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짜증스러운 병, 고통,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 흉한 모습으로만 가득한 노년의 여정을 밟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다.” -미셸 스파이더 <죽음을 그리다>(아고라, 2006)
 
하루에 두 번 정도 거울을 볼까? 세수할 때나 잠깐 거울 앞에 서 있으니, 내 얼굴을 바라볼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안경을 벗으면 거울 앞에 서 본들, 도무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 얼굴은 안개에 가린 듯 뿌옇게 흐려져 있다. 윗글을 쓴 여성처럼 노년의 고통을 체감할 정도로 늙지도 않았지만,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짬이 없어 그 고통이 더 적을 수도 있겠다.
 
어쩌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때면, 주름이 전보다 늘어난 것이 느껴진다. 주름만 많아진 것은 아니다. 잡티, 점, 주근깨, 기미도 얼굴 표면 여기저기에 거무스름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더 지쳐 보인다. 몇 년 전부터 가까운 사람들이 내게 기미와 잡티 좀 제거하라며 성화다. 내 눈에도 날로 얼룩덜룩해지는 얼굴이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부터는 바닥을 쓸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들 틈에 흰 머리카락 한 두 가닥 정도가 눈에 띈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진한 밤색이나 검정색으로 머리염색을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좀 더 생기 있어 보이려면 머리카락에 검은 물도 들이고 점과 기미도 제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요즘은 불안이나 근심, 불쾌감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아졌다. 몸의 통증도 그 범위가 넓어지고 더 빈번해지고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건망증도 부쩍 잦아졌다. 나도 분명 늙고 있는 것이다.
 
늙음을 부정하는 우리들
 
늙음은 피하고 싶은 고통일까? 아니면 지혜를 퍼 올릴 수 있는 힘일까? 나도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노년은 내게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죽는 것만큼이나 나이 드는 것이 궁금했다. 노년은 하루 중 늦은 오후, 저녁을 거쳐 깊은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에 들뜬 대지가 서서히 식어서 서늘해지듯, 노년도 차분히 가라앉는 나이처럼 여겨졌다. 주변이 완전히 어둑해지기 전, 하늘은 붉은 빛으로 눈부시게 물이 든다. 늙음도 그처럼 황홀한 빛을 발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늙음은 내 어린 시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늙음은 끊임없이 부정된다. 나의 가족들, 친구들, 주변의 이웃은 조금이라도 덜 늙고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애쓴다. 주름을 펴주고 피부의 젊음을 유지시켜주는 화장품이나 마사지를 찾아 바쁘다. 젊어 보이는 외모를 위해서라면 점 등 잡티제거는 필수다. 몸매관리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성형을 해서라도 젊어 보일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젊어 보이려는 노력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보기에 젊어 보이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젊어 보이려는 욕망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있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끊임없이 젊음을 갈망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늙고 있는 나, 늙어버린 나는 이 사회의 부끄러움인 것만 같다.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늙음은 드러내서도 안 되고, 꽁꽁 감춰야 하는 무엇인 걸까?
 
앨리스 워커는 자신의 소설 <새로운 나여, 안녕>에서 케이트의 입을 빌어 말한다.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은 삶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반문한다. 젊어 보이려 한다는 것은 세월이 안겨준 것을 부정하는 것인 만큼 인생의 일부를 잃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늙은 나무의 껍질을 바라보며  

▲ 홈이 패고, 혹이 자라나 둥치가 불룩해지고... 긴 세월을 살아낸 나무의 몸에는 나무가 경험한 삶이 새겨진다. © 이경신 
 
나는 수 백 년의 긴 세월을 살아낸 나무을 맞닥뜨릴 때면 잠시 걸음을 멈추곤 한다. 그 껍질의 아름다움, 경이로움을 경탄하기 위한 여유를 갖기 위해서다. 홈이 패고, 나뭇가지가 잘리고, 혹이 자라나 둥치가 불룩해지기도 한다. 이끼가 자리 잡아 푸른빛, 노란빛, 갈색, 검은 빛을 띠기도 한다. 어쩌면 그 어떤 수피도 똑같지 않아 더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무들이 경험한 삶이 제각기 달라서이리라.
 
비록 인간이 나무처럼 긴 세월 동안 살아남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몸도 나무처럼 세월을 담는다. 상처가 무늬처럼 새겨지기도 하고 주름으로 구불거리기도 하고 뼈가 틀어지기도 하고 피부에 점이 박히기도 하고……. 살아온 대로 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육신에 남는다. 그 흔적은 우리가 살아낸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어머니의 학대로 한겨울에도 얼음물에 맨손을 담그고 일해야 했던 그녀의 뒤틀어진 손, 남동생을 위해 간을 나눠준 그녀의 배 위를 구불구불 기어가는 생생한 상처, 암으로 한쪽 가슴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그녀의 길쭉한 갈색 흔적 등. 그 사람의 얼굴을, 손을, 몸을, 발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겉모습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까지 엿보기도 한다. 얼굴의 표정, 몸의 자세, 그리고 질병까지도 모두, 삶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몸의 기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살아온 삶도 긍정하고 사랑할 것이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는 내 피부가 늙은 나무의 수피와 뭐가 다를까? 그럼에도 아직 나는 나이든 내 얼굴에 늙은 나무의 껍질을 바라보듯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지는 못한다. 그나마 희끗해지는 머리카락을 담담히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정도다.
 
‘이빨이 닳아가듯 마모되기’
 
케이트가 말하듯, 늙음이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늙음은 ‘힘’이나 ‘지혜’이기에 앞서 기운도 빠지고 생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몸도 정신도 둔해지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늙음을 이빨에 비유한 것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이빨이 닳듯이 마모되는 것이 늙음이라는 생각, 공감이 간다.
 
정말로 나이가 들면 이빨이 닳는다. 수 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이가 망가진 것 같아서 치과에 간 적이 있다. 의사는 내 이를 살펴보더니, 치료할 것이 없다고 했다. 단지 이가 닳았을 뿐이라면서. 집에 돌아와서 이를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어금니 하나가 심하게 닳아 있었다. 그때 이후 차례로 이가 닳기 시작했다.
 
이빨이 닳듯이 몸, 정신, 마음이 나이가 들면서 마모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니,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마모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오겠는가! 그렇게 닳아서 사라지다 보면, 어느 날 죽음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변화들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 변화를 그냥 바라볼 마음의 여유 정도는 가졌으면 좋겠다. ‘늙으니까 나의 몸과 마음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하고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 싶다. 누구처럼 늙음을 ‘지렁이와 땅강아지’에 비유하며 늙음을 경멸하고 싶지도 않다.
 
흉한 노년을 보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보다 그저 늙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행보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이 드는 일로 기뻐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울하거나 슬퍼하지는 않기를! 세월을 되돌리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이 들어 죽는 행운을 얻은 것에 감사하길 바란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만큼이나 늙어 죽는 것도 삶의 놀라움, 신비로움일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늙을 수는 없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노년을 보내는 노인을 아직까지 만나지는 못했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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