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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양심적 병역거부자 길수 (1) 


<일다>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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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너무나 생소했던 페미니즘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던 스무 살의 2월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생회가 마련한 반성폭력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강사는 성과 관련된 세간의 통념들을 나열한 스무 가지 사항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나는 몇 가지나 Yes라고 생각하는지 세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여관에 가면 함께 자겠다고 동의한 것이다’, ‘야한 옷을 입는 여자는 성에 더 개방적이다’ 등 세 가지에 Yes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강사가 한 가지라도 Yes를 꼽은 사람은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분노보다는 억울함(난 겨우 세 가지를 꼽았다구!)과 궁금함(여관에 가면 동의한 게 아니란 말인가?)이 동시에 들었다. 강좌를 끝까지 들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페미니즘과의 첫 만남이었다.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던 신입생 시절, 1학년 1학기 초반부터 공부하는 것은 너무하다 싶어 한가로이 지냈던 나는 여러 집회에 나가서 많은 주장들을 듣게 되었다. 그 가운데 유독 페미니즘만은 단숨에 이해되지 않았다.
 
과 학생회에서 남자 선배들이 여자들을 두고 점수를 매긴 사건이 논쟁이 되었는데, 왜 ‘인간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지 당시의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님의 노래 "마스터베이션"을 거리에서 처음 들었을 때 주변 분위기에 덩달아 환호를 보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왜 그리 내게 페미니즘은 생소했을까?
 
나는 왜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페미니즘과 만나기 이전까지, 내 삶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수업을 듣고, 자습하고, 기숙사에 돌아와 자는 고등학교 시절의 삶이 나는 좋았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불만도 없었고 남과 다른 시각을 가지지도 않았다. 친구 관계에서 큰 갈등도 없었다. 공부하는 것, 사고치지 않는 것만 충실하게 이행해도 ‘좋은 사람’일 수 있었으니, 삶도 그렇게 쉬운 것인 줄 알았다. 그런 체계에서 수혜를 받은 내가 그 체계에 의문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한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된다.’ 이때 ‘사람이 된다’는 평가의 의미는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윗사람의 말을 충실히 이해하고 동료들을 보듬으며, 아랫사람을 잘 이끄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자면, 군대에도 계급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있고, 그런 만남들에서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공동체의 규범을 중시하는 방법들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맡은 일을 문제없이 처리하기 위해서 성실함과 책임감도 어느 정도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적어도 입영 연령기의 남성들에게는 부족한 덕목이니, 군대를 다녀와서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도 이해할 법하다.
 
이러한 덕목들이 사실은 우리사회 공교육의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입시에만 힘을 쏟는 학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은 공교육의 실패를 부끄러움없이 실토하는 말이다.
 
나는 이런 입시위주 공교육을 곧이곧대로 잘 받은 사람이다. 그랬더니 세상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남에게 관심이 없으며 문제집 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성주의가 말하는 이야기들과 내 삶을 이을 연결고리를 전혀 찾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이다. 그나마 반감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두려움, 마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위기감으로 받아들인 것이 다행이랄까.
 
‘계집애처럼 머리 기른 남자’가 되어보니…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바야흐로 페미니즘 운동이 기존 학생회 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문제를 제기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런 지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것에 게을렀던 내가 페미니즘이라고 특별히 진지하게 사유했을 리 만무하다. 평화운동을 하면서 군사주의와 페미니즘을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여성주의학회도 같이 만들어서 세미나도 했지만, 고민의 수준은 기초적인 부분에 머물렀다.
 
그 얕은 인식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까봐, 그리고 자신의 마초성이 까발려질까봐 침묵하면서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다. 하나를 들으면 하나는 알까, 둘은 몰랐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나의 경험에 빗대어 상상하는 능력이 당시에는 너무 부족했다. 가령 임신 중절을 허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그 선택 또한 여성에게 큰 고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족과 사회의 압박도 가벼이 여겼다.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에 억눌린 남성들 또한 해방시킨다고?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은 젠더 질서에서 억압 받는 부분을 내 안에서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과 행동들은 고칠 것투성이이었고, 페미니즘을 통해 내 속이 시원해지는 지점은 없었다. 페미니즘이 내 행위에 대한 일종의 검열 장치로만 작동하던 시기에, 페미니즘이 해방이라고 말하는 데 떳떳할 수 없었다. 

▲ 여성주의를 타자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던 것이 바뀌게 된 계기는 머리를 기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 일다 
 
여성주의에 있어서 타자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던 것이 바뀌게 된 계기는 머리를 기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성별을 나누고 남성에게 안락함을 부여하는 질서 안에 가만히 있는 것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심에는 당시 사귀던 여성의 권유와 설득, 지지와 격려가 있었다. 불편한 진실이기는 하지만, 나를 성장시킨 것은 한 여성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어쨌든 머리를 기르면서부터 나는 사람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네 뜻은 알겠으나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애정 어린 조언도 들었고, 계집애처럼 머리를 기르느냐는 직설적인 질책도 들었다. 밖에 나가면 낯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목했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주의 깊게 나를 보면서 성별을 판단하려고 했다. 웃는 사람도 있었고 무서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사람을 자꾸 그 사람의 성별로, 성적 지향으로 판단하려는 시선에 대한 불편함을 이런 방식으로 경험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경계를 넘는 것'의 편안함을 알게 되다 
 
선을 긋는 그 시선들에 오기가 생겼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그러다보니 머리 감는 것에 시간을 많이 써야 했다. 긴 머리는 서로 자주 엉켰다. 자연스럽게 찰랑거리는 머리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으면서, 긴 생머리가 청순미로 읽히는 것의 우스움을 알 수 있었다. 내 어린 시절 판타지 속의 청순한 여성은 집에서 머리를 빡빡 감고 드라이를 공들여 해야 하는 고단함을 감내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머리가 길어지니 자연스럽게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게 되었다. ‘여성적인’ 행동이나 색깔 등을 부담스러워하던 내가 그 행동을 하고 있으니 신기했다. 여성만의 특징인 것처럼 보이는 몸짓들이 실은 성별로 나뉜 외모와 옷, 신발에서 나온다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잘 넘어지는 여성은 힐이 문제인 거지, 균형 감각이 없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 같은 것을 말이다. 더 많은 관리가 필요한 옷, 드라이와 빗질이 필요한 머리가 외출 준비 시간도 길게 만들고 말이다.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도 들었다. 내 머릿결에 조금씩 도취되어가면서 좀 더 귀여운 디자인의 옷을 입고 싶었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고 싶었다. 그랬더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성용으로 나온 티셔츠는 옷의 라인이 다르고, 캐릭터 디자인도 확연하게 성별 구분이 되어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속칭 '유니섹스' 의류도 치수의 융통성만 있을 뿐 디자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정말 답답하구나, 이 사회. 아기의 얼굴이 아니라 입은 옷으로 성별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사회, 인간의 아름다움을 다르게 기대하는 사회.
 
페미니즘은 그 경계를 뛰어넘고, 흐릿하게 만든다. 혹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아직 그 언저리에서 주저주저하고 있지만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의 편안함을 알고 있다. 비로소 페미니즘이 나에게도 즐거움이 되었고, 나는 행복해졌다. 더 많은 페미니즘들을 알고,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 위해서, <일다> 독자위원도 되고 관련된 토론회나 강좌에도 참석했다. 그런 공간에서 함께 웃고 즐겼다. 여성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많아져서 기쁘다.
 
남성인 내가 여성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나 권력, 욕망, 억압은 개인의 몸에 새겨진다. 남성인 나는 성폭력, 성매매, 임신 등에 대한 인식을 철저하게 하기 어렵고, 결혼과 육아에 대한 압박도 나에게는 다르게 가해진다. 관계를 성별에 따라 동성 간의 관계와 이성애 관계로 나눠버리는 가부장제 틀 안에서, 남성인 나는 이성애 욕망에 더 강하게 속박되어 있다.
 
남성보다 여성이 편한 이유가 남성의 마초성이 싫어서, 페미니즘 분위기가 편해서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또한 여성이 이성애 대상으로서 친근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또한 나는 남성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여전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남성성’을 지니고 있으니, 여성들 사이에서 언제든 누구에게든 내가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학교에서 여성주의 학회를 만들고 활동할 때는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남자 선배로서 학회 활동을 하는 것이, 여성주의를 나의 시각으로 이야기하게 되어 오히려 왜곡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걸렸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다. 여성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남성도 있다는 것 덕분에 페미니즘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맞다. 나의 페미니즘은 여전히 불안정한 것이지만,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폭력 가해자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주변 남성들이 성폭력을 저질렀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으로 자라오면서 습득된 남성성과 남성의 경험을, 불편하지 않게 드러내는 것도 잘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그러면서도 여전히 잘 바뀌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살아오면서 쉽게 저지른 성폭력 가해의 경험, 또 같은 남성에게 받은 성폭력 피해의 경험 등 남성들이 쉽게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을 발언할 책임도 있는 것 같다.
 
그 동안 나는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런데 <나의 페미니즘>을 쓰려고 보니, 사실 나는 주변에 ‘나의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남성’이란 존재는 호의적인 평을 사기 쉽고, 나는 잘 모르는 문제들에 적당히 침묵했기 때문에 더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롭게 말하고 얘기해서, 여성주의와 여성주의자로 살아가는 서로의 고민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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