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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성폭력 시나리오’는 집어치우길 바라며
<나의 페미니즘>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 지선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사람들은 언론 보도에 나오는 각종 자극적인 기사에는 열을 올리고 관심을 기울이지만 ‘감정배설’일 뿐이다. 정작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에게 ‘귀 기울여서 이야기 듣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어머 쟤 인생 망쳤네”, “저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불쌍해서 어떡해!” 라고 말하는 것들의 입을 한 방 쳐 주고 싶다. “나, 어릴 적에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적 있어. 근데 잘 살고 있거든? 나 어떻게 살아가는 것 같아? 당신들 눈엔 어때 보이는데?”라고 툭 뱉어내고 싶다. 만약 내가 목구멍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말을 밖으로 뱉어낸다면, 그 사람들의 면상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때론 힘들 때가 있지만, 삶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주시길.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는 마치 성폭력 피해를 겪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 내 마음을 ‘툭 뱉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말하려고 한다.

▲ 정은 作  [생존자 말하기]   © 일다- 정은의 빨강그림판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편이에요”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을 말합니다.
낯선 사람이 몸을 만지면 크게 소리치라고. 좁은 길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 엄마아빠한테 말하라고. 부모님은 우리편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려 해요. 9살 어느 여름, 엄마아빠와 약수터에 갔다 오는 길이었어요. 그들은 저보다 몇 보 앞서서 걷고 있었어요. 집 앞에 다 와가는 순간, 어떤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지요. 그래도 나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 느낌을 믿고 싶지 않았답니다. 설마요. 우리 집 앞인데요, 게다가 엄마아빠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 걸요.
 
근데 그 남자는 몸을 틀더니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어요.
“여기가 너희 집이니?”
“네.”
그러더니 그 남자는 계단 위를 오르는 제 바지 속에 손을 넣었어요. 이럴 땐 소리를 지르라고, “싫어요! 안돼요! 만지지 마세요!” 라는 말을 하라고 배웠는데, 그 순간 그만 머리가 까매지더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갔지만,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잃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쳤어요.
 
그리고 2,3일이 지난 뒤, 유치원과 학교에서 배운 대로 엄마에게 말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용기를 내어서요. 엄마에게 “엄마, 나 할 말 있어. 내 방으로 와 봐.” 라고 했어요. 엄마와 마주 보고 섰지요. 엄마한테 “엄마, 어떤 아저씨가 나한테 이렇게 했어.” 라고 말하며 몸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어요. 차마 바지에 손을 넣는 행동은 할 수 없었어요. 내가 겪은 것을 내 딴에는 조금 축소해서 말했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대뜸 말했어요. “그러길래 일찍 일찍 다녔어야지!” 라고. 그 한마디를 툭 내뱉더니,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어요. 그 방엔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어요.
 
‘어... 이게 아닌데.’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는데요. 엄마는 내 편도 아니었고, 날 도와주지도 않았어요. 학교에서 배울 때는요, 엄마아빠는 우리가 나쁜 일을 겪으면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토닥여 준다고 배웠어요. 말하는 것은 용기라고도 배웠고요. 책에는 엄마아빠가 안아주는 그림들도 나오죠. 나는 배운 대로 했지만, 엄마에게선 내가 배운 대로의 반응이 나오지 않았어요.
 
엄마는 내 이야기를 잊어버린 것 같아요. 뉴스나 신문에 아동성폭력 기사가 나왔을 때 이렇게 말했거든요. “야, 일찍 일찍 다녀. 낯선 길로 가지마.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마.” 엄마는 내 이야기를 까먹고 싶었나 봐요.
 
아빠도 마찬가지에요. 뉴스를 보면서 “저런 새끼는 죽여야 돼. 학교에서 교육 받았지? 모르는 사람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저는 그런 아빠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난 성폭력 피해 경험한 적 없는 척 “어떻게 어린 애한테 저럴 수 있어?!” 하며 마치 남 이야기하듯 대답했어요. 그렇게 내가 겪은 것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연기하는 내 모습이 슬펐어요. 마음 속에선 ‘나 벌써 힘든 일 겪었어!’ 라고 외쳤지만 마음 속 외침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어요.
 
외로웠어요. 난 이미 당했는데...
그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소리를 들은 날에는, 내 방에 혼자 누워서 조용히 훌쩍였어요. 뜨거운 눈물이 귓바퀴를 타고 흐르던 느낌이 선명해요.
 
나중에 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신들이 말한 대로 아이들이 성폭력 피해를 겪었을 때 제대로 대처해주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싫어요. 안돼요.” 라고 말하라 하고, 부모님은 우리편이고, 부모님께 이야기하라는 교육을 하지만, 그럴 때 도와주지 않은 부모님들이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도, 교과서에서도, 그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지요. 왜 그래요? 왜 거짓말 쳐요?
 
알려주세요. 이렇게요. “부모님 중에서 도와주지 않는 사람, 오히려 너에게 상처 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그래도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엄마아빠도 틀릴 때가 있고, 잘못할 때, 바보 같을 때가 있지.” 라고 말해주면 좋겠어요.
 
아이가 성폭력 피해를 겪은걸 알게 된 부모들에게
 
당신의 아이가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혹시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남들이 알면 어쩌지?’
‘애 아빠가 알면 안 되는데. 알면 발칵 뒤집어지는데….’
‘알려져 봤자 딸아이 앞 길만 구겨질 텐데.’
‘내가 모른 척해야 아이가 잊어버리지 않을까? 이야기하면 더 기억나서 힘들지 않을까?’
‘내가 애를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거야. 내 잘못이야.’
 
이렇게 생각하세요? 땡! 틀렸어요. 모두 잘못된 생각이에요. 당신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말해줘서 고마워. 난 너의 편이야.” 라고 말해주는 부모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에 가서 도움을 받는 일이에요. 말하기까지 ‘큰 용기’를 냈을 당신의 아이를 칭찬해주세요.
 
이런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사실 부모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도,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어서잖아요. 성폭력 피해를 겪은 사람에 대해 잘못된 통념을 가지고 바라보고, 성폭력 피해를 겪은 아이의 부모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이지요.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성찰하기보다는 호기심 거리로 바라보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닌 피해를 겪은 부모(특히 엄마)를 비난하곤 하지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속상해요. 내가 ‘용기’를 내서 엄마한테 말했을 때 따뜻한 한 마디를 해 주었더라면, 이토록 오랫동안 혼자 외로워하고 혼자 아파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에요.
 
내 주변엔 피해자가 없을 거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마구 욕을 해요. 뉴스나 신문에서 성폭력 사건이 나올 때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그것이 사람들의 순간적인 ‘감정 배설’인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상처를 준 것 때문인지, 무엇 때문에 욕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불쌍해. 쟤는 이제 어떻게 살아?”
“그러길래 누가 짧은 치마 입고 다니래? 짧은 치마 안 입는 게 지혜로운 거지”
“잰 인생 망쳤다. 남자들이 얼마나 처녀막 운운하는데.”

이봐요. 나는 인생 망치지도 않았고, 불행하게 쭈그려 살아가고 있지도 않아요. ‘그딴 말’이나 지껄이는 당신들보다 훨씬 섹시하게, 발칙하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성폭력 시나리오 따위 집어치우길 바래요.
 
그 사건이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나라는 존재와 내 인생 전체를 아프겐 할 수 없어요. 신이 나에게 “만약 시간을 되돌려 준다면 그 때의 그 사건을 바꾸고 오고 싶으냐?”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말할 거에요. 왜냐하면 그 사건은 나를 아프고 힘들게 했지만, 그 아픔도 내 삶의 일부분 이거든요.
 
사람들은 각자 삶의 결이 달라요. 내가 직접 겪지 않았다고, 또 나도 성폭력 피해자라고 해서 다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에요. ‘싸구려 공감, 싸구려 위로’는 필요 없어요. 타자화시키는 것도 싫어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사유할 줄 아는 것, 우리에게는 어쩌면 다른 이의 아픔을 사유하는 자세가 필요할 거에요.
 
상처를 지나가는 지금, 회복을 지나가는 지금. 지금 나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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