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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이야기] 자궁 초음파 검사를 받고서
난생 처음 초음파로 내 자궁을 봤다. 흐린 흑백 화면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의사는 연신 “저기 보이는 게 질이고, 여기가 자궁이고, 여긴 난소고…” 어쩌고 하는데, 정말이지 자궁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스케일과 다르게 참 작은 기관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생물 교과서에서 봤던, 성교육을 받을 때 봤던 자궁의 단면은 완벽한 5 대 5의 대칭을 이루는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모습이었는데, 의사가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얼추 그려준 내 자궁의 모습은 상당히 비대칭적이었다. 내가 알던 그림과 달라 나한테 문제가 있는가 싶어 잠시 놀랐다가 ‘아, 자궁도 사람마다 다를 테지.’ 하고 새삼 깨달았다.
사실 내게 자궁은 애물단지와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를 낳을 일도 없는데 매달 겪어야 하는 생리통과 온갖 증후군들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생리 양도 적지 않아 면생리대를 쓰기도 어렵고, 생리통에 한몫한다는 화학생리대를 매달 돈 들여가며 사 쓰는 심정이며(마트에서 어떻게든 샘플 하나라도 더 받으려 애쓰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항상 구비돼 있어야 하는 진통제, 잠 잘 적에 혹시나 옷을 버릴까 싶어 생리대로 무장을 하고 통나무처럼 누워 잠들 때의 심정. 그마저도 생리통으로 인해 밤중에 깰 때는 정말 짜증은 물론이거니와 서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자궁을 들어낼 수도 없고, 여성성의 상징이라고도 하니 내 딴에는 생리를 할 적마다 이래저래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렇다보니 내게 자궁은 내 몸의 일부라는 생각보단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기관 정도로 여겨졌다. 왜냐면 그곳은 ‘자궁’이니까. 아이를 위한 공간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여자로 태어났으니 원치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 정도로 여겼다. 아무도 내게 자궁은 너의 몸이라고 설명해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신세한탄을 해도 돌아오는 말은 “어쩔 수 없지 뭐. 어쩌겠냐”, “결혼하면 다 괜찮아져” 라는 말뿐이었다.
초음파 검사를 받기 전날 인터넷을 뒤져 자궁과 관련된 병명들을 찾아보았다. 자궁내막증, 자궁근종, 자궁경부암, 자궁선근증, 자궁암 등등. 이외에도 여러 질병들과 물음들이 인터넷 상에 올라와 있었다. 이런 저런 원인과 증상 등을 읽어보니 내 증상은 자궁내막증, 자궁근종과 비슷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혹의 크기가 6~7cm 미만인 경우엔 수술을 권하지 않는다고 하며, 한의학에서도 어혈을 풀어내 자궁 질환으로 인한 생리통을 완화시키고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세밀하게 적혀있었다.
검사 결과는 자궁근종. 수술할 정도는 아니니 앞으로 주기적으로 검진하면서 상황을 살펴보면 된다 하였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도 있었고 어젯밤 나름 마음의 준비 과정(?)을 거쳐서 그런지 담담히 소견을 듣고 나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초음파라 자세히 보이지 않았음에도 난생 처음 보는 자궁을 보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 몸을 모르고 있었는지, 몸을 탐구하는데 소홀했는지, 그리고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왜 모두 ‘결혼하면 괜찮아져’, ‘아이 낳으면 괜찮아져’ 라고 말하며 자궁과 나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는지. 억울하고 속상하고 서러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기에, 병명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내 몸임에도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아온 시간들. 그 시간들이 너무나 억울했다.
무엇이 나와 자궁을 분리시켰을까
처음 월경을 했을 때가 13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반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름방학을 지나며 초경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조금 있으면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기 전 변기를 살펴보며 혹시 생리가 시작되진 않았나 확인해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난 엄마에게 사과를 하며 초경을 맞았다. 밤중에 속옷에 큰 볼일을 본 줄 알고 엄마에게 미안하다면서 팬티를 내보이며 말이다. 엄마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곧 생리대라는 것을 속옷에 붙여주며 괜찮다고 말했다. 언니는 그 모습을 슥 쳐다보더니 “이제 니도 귀찮은 일 생겼네?!”하며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지나갔다. 난감했던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마.”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저녁이 되어 돌아온 아빠는 내게 장미꽃다발을 내밀며 “숙녀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난 아빠한테 얘기한 엄마를 째려보며 화를 냈다. 이게 내가 처음 경험한 월경의 풍경이다. 사과와 귀찮은 일,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
그러곤 한 동안 월경이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생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유독 심했던 통증과 많은 생리양으로 인해 ‘생리통 너만 겪냐’, ‘하여튼 여자애들은 생리가 무기라니까’, ‘안 아픈데 아픈 척하기는’ 등의 비난과 조롱의 말들을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생리’ = ‘몸 간수, 통증, 귀찮은 일, 애물단지’가 되어갔다.
아이라도 가지면 평생 한 번은 자궁이 대접을 받아볼텐데, 아이는 물론이고 비혼주의인 내가 과연 자궁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애물단지로 취급하는게 아니라 건강히 보살피고 애정을 줄 날이 올까? 실컷 울어도 여전히 억울하고 서럽다. 꼭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도록 아파야 날 돌아보게 되니 더욱.
ⓒ 크리스티안 노스럽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한문화)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라는 책을 추천해줬다. 가부장제가 여성의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와 관련해 여성 질환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바라본 책이라고 했다. 꽤 흥미로운 주제라 생각했지만, 아직은 나와 먼 주제라고 생각해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여성 질환과 관련된 글은 40-50대, 그때쯤 되어서야 내 주제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그 책을 펼쳤다. 건강을 나이와 개인의 관리 차원으로만 여겼던 내게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무엇이 나와 자궁을 분리시켰는지, 또 내 몸과 나를 다시금 연결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여전히 자궁이라는 단어는 소리 내어 말하기가 어색해 입에 붙지 않는다. 다른 말은 뭐가 없을까 고민해보다 자궁(子宮) 말고 아궁(我宮)은 어떨까 생각해보곤 실실 웃어본다. 아궁이라. 하하. 그래, 이렇게 시작해보자.
책을 펼치니 ‘몸의 메시지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감정과 육체와 영혼을 치유하게 된다!’는 글귀가 눈에 띤다. 이제 연결점을 찾아나설 차례다. ▣ 고래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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