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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꽁부르성, 조슬랭성, 그리고 지롱성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www.ildaro.com 

 

브르타뉴에 성이 많다는 것은 이곳에 직접 와서야 알았다. 많은 성들은 옛날 프랑스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성이었고, 프랑스에 복속된 1400년 말 이후에는 방치되어 있던 것을 귀족들이 사들여 주거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성들은 여전히 그 후손들이 소유한 개인 재산인 경우도 있고, 시에서 사들이거나 기증받아 시민들을 위한 장소로 쓰이기도 하고, 아쉽게도 무너져 폐허로 존재하는 곳들도 있다.

 

샤또브리앙 가문이 소유한 ‘꽁부르성’의 절경

 

이런 성들 가운데 하나가 ‘꽁부르성’이다. 꽁부르(Combourg)는 렌의 북쪽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다. 여기에는 ‘돌 드 브르타뉴’의 대성당을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건설한 요새성이 있다. 

 

▲  호수 건너편에서 본 꽁부르성. 작가 샤또브리앙이 유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 정인진 
 

브르타뉴에는 작가 샤또브리앙(Chateaubriand)의 추억이 담긴 곳으로 유명한 장소들이 많다. 샤또브리앙의 무덤이 있는 생말로도 이런 곳 중 하나지만, 꽁부르에 있는 성은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특히 유명하다. 샤또브리앙의 아버지는 이 성을 구입해, 여름 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꽁부르성은 무척 아름답다.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볼 수 있는 성 내부에는 작가 샤또브리앙의 발자취를 읽을 수 있는 물건들과 그 가문에서 수집한 진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내게는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샤또브리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지만, 서양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취미를 반영한 물건들에는 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성 내부를 슬쩍 둘러보고 나와, 오랫동안 성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을 걸었다. 성 둘레는 나무들과 화초들로 자연스럽게 조성된 넓은 영국식 정원이 둘러 싸고 있다. 흐드러진 키 큰 주목나무들이 성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정원이 어찌나 넓은지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도 넘게 걸린 것 같다. 샤또브리앙은 그의 책에서 ‘꽁브르성에서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는데,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정원만 거닐어도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성을 나와 근처에 있는 호수도 한 바퀴 돌았다. 꽁부르성 발치 아래는 ‘락 트랑낄’(Lac Tranquille: 고요한 호수)이라고 불리는 넓은 호수가 있는데, 성과 어울어진 호수 건너편 풍경은 브르타뉴의 고성을 소개하는 책자에 빼놓지 않고 나올만큼 절경이다. 이름처럼 호수는 매우 고요하고 잔잔했다.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다 보이는 성과 호수, 가장자리에 줄지어 서 있는 미류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걸었다.

 

아름다운 경치에도 놀랐지만, 이 모든 것들이 사유 재산이라는 사실에 더 놀라며 걸었다. 성과 성 둘레의 정원, 호수까지, 지금도 샤또브리앙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사유 재산의 절정을 보여주는 고성들

 

사유 재산의 절정을 보여주는 성들 중에는 ‘조슬랭성’도 있다. 브르타뉴 내륙 깊숙히, 숲 사이의 고장(pays a travers les bois)이라 불리는 ‘포로에’(Porhoet) 지역의 한가운데 ‘조슬랭’(Josselin)이 있다. 

 

▲  조슬랭 성의 서쪽 편, 세 개의 탑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정인진 
 

조슬랭은 11세기에 건설된 도시로, 골목마다 나무 조각이 곁들여 있는 개성 있는 중세의 꼴롱바주 집들이 줄지어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조슬랭성’이다. 반나절만 둘러봐도 도시를 여러 바퀴 돌고도 남을 만큼 작은 도시인데, 그럼에도 관광객들로 활기 넘치는 이유는 바로 이 성 때문이다.

 

조슬랭성은 이 도시 중앙, 아르두와즈 편암 돌출부 위에 위치해 있는데, 프랑스의 화강암 성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성은 12세기 중엽 영국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2세기 말 돌로 다시 쌓았고, 1500년 경 쟝2(Jean II)세가 부속 건물도 새로 건축했다. 현재는 60미터에 달하는 탑 세개를 포함해 1/4 정도가 남아있다.

 

이 성은 ‘로앙’(Rohan) 집안의 소유였는데, 지금도 그 후손의 사유 재산이다. ‘로앙’ 집안은 ‘조슬랭성’뿐 아니라 ‘퐁티뷔’(Pontivy)에 있는 성도 소유하고 있다. 이 성들 안에는 모두 로앙 집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곳들은 둘러보지 않았다. 꽁부르성 안의 샤또브리앙 집안의 전시물에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한 후로는 귀족 집안의 살림살이에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사유 재산들은 꽃 한 송이 심을 손바닥만한 땅도 갖고 있지 못한 나같은 사람을 질리게 한다. 지역 주민들은 그들 덕분에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좋아하려나?

 

시민들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성들

 

개인 소유의 성보다 마음에 드는 건, 현재는 지방 정부가 소유해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고 성들이다. 브르타뉴에 있는 성들 중에는 시에서 사들였거나 기증받아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곳들도 많다. 그 중 하나가 ‘샤또지롱’(Chateaugiron)에 있는 성이다. 마을 이름과 같은 이름의 ‘지롱성’은 시내버스로 갈 수 있을 만큼 렌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성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내려 지롱성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아주 작고 귀여운 꼴롱바주집들이 줄지어 서있는 마들렌느 거리(La rue de la Madeleine)를 가로질러야 한다. 16~18세기에 건설된 이 집들은 당시 상인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 ‘샤또지롱’의 망루, 왼편에 시청으로 쓰이는 건물이 보인다. ©정인진 
 

샤또지롱의 성은 11세기에 건설된 중세의 전형적인 성으로, 수도인 렌과 브르타뉴의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성이다. 중세 내내 이 성은 공작령으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기념물이었지만, 18세기 한 귀족 가문을 거쳐 현재는 시청으로 쓰이고 있다.

 

엄청나게 크고 높은 망루는 이 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되었고, 성의 주거 건물(logis)은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이드를 따라 망루는 물론 시청 안까지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사무실과 회의실, 시민들을 위한 넓은 홀까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 홀에서 주말이면 동네 주민들의 결혼식이나 문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이곳에서 음식을 나누며 파티까지 할 수 있으니, 시민들에게 이 성은 중요한 공간임에 틀림없다.

 

유물들을 전시하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성보다 이런 곳이 사람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다. 1천 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의 삶이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훈훈한 느낌이다.

 

지롱성은 시청 청사로 쓰이고 있는 주거 건물을 약간 넓힌 것 외에 옛날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성내에 존재하는 12세기에 세워진 예배당을 수리하는 중이었다. 이 공사가 끝나면 예배당 건물은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 공간이 될 거라고 한다. 역사적 기념물들이 시민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모색하는 샤또지롱 시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롱성’처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고성이 사용되는 경우는 여러 곳 존재한다. ‘비트레’(Vitre)에 있는 성도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고, 루아르 아틀랑티끄 지역의 ‘샤또브리앙’(Chateaubriant)시에 있는 성은 전시회장으로 변모해 다양한 전시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제국의 멸망, 폐허가 되어버린 자리를 거닐며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생또뱅뒤꼬르미에’(Saint-Aubin-du-Cormier)에도 성이 있다. 이 성은 마을에서 200m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 성이라지만 지금은 모두 허물어져 잔해만 흩어져 있는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브르타뉴의 마지막 역사적 사건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 폐허가 된 ‘생또뱅뒤꼬르미에 성’은 햇볕 좋은 날임에도 착잡함에 젖게 했다.  
 

1223년 브르타뉴의 피에르 1세 공작이 직접 지휘해 건설한 ‘생또뱅뒤꼬르미에 성’은 브르타뉴 변방을 지키는 곳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래서 이 성은 브르타뉴 공작의 강성함을 상징했다. 피에르 1세는 건설 당시에도 황량한 벌판에 세운 성 발치 아래 마을도 건설하고자 결심하는데, 이곳 주민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건설된 이후에도 200여년 동안 여러 차례 수리와 보강을 거치며 성을 확장시켰다. 1486년과 1487년, 프랑스의 공격에 직면해 이 성은 방어를 맡게 된다. 1488년 7월 28일, 이곳 생또뱅꼬르미에 전투에서 브르타뉴가 대패함으로써 브르타뉴는 프랑스에 복속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왕 샤를르 8세는 자신의 승리를 확증하고 브르타뉴인들의 독립 의지를 영원히 꺾어놓기 위해 ‘생또뱅꼬르미에 성’을 초토화시키기로 한다. 1489년의 일이다.

 

‘생또뱅꼬르미에 성’처럼 새로운 통치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파괴된 성들도 있지만, 더 이상 방어 능력을 갖출 필요가 없어진 성들은 방치되어 손상되기도 했다. 허물어져가는 성들은 또 다른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돌들을 쓸 목적으로 주민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경우도 있다. ‘오래’(Auray)의 성이 그렇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에데’(Hede)의 성은 1597년에 주민의 요구에 의해 허물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은 모두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어쩜, 제국의 멸망이라는 건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도리어 참혹한 전투를 더 이상 치루지 않게 되어 잘 되었다고, 드디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려나? 그저 나같이 평화를 위협받고 있는 분단 국가의 여행객만이 패망한 나라의 폐허 위를 거닐며 침통함에 젖는 건지도 모르겠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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