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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책읽기> 제인 정 트렌카 “덧없는 환영들”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www.ildaro.com 

 

백만 명의 ‘살아있는 유령’들을 만든 해외입양 

 

▲ 해외입양인 제인 정 트렌카의  <피의 언어> 
 

제인 정 트렌카(Jane Jeong Trenka)를 처음 본 것은 1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학술회의에서였다. 거기서 그녀는 한국의 해외입양에 대해, 다른 곳에선 들을 수 없는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온몸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점잖고 차분한 느낌의 다른 발제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생생했고, 자신의 삶과 존재를 걸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때 섹션의 주제는 “지구지역 시대 볼모로서의 모성”이었다. 백만 명의 ‘살아있는 유령’들을 만든 한국의 해외입양은 구조적 폭력이고, 사회적 죽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정당하게 분노해야 한다. 아이들을 돈과 맞바꾸고 불안정한 어머니들을 착취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그들을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알을 낳는 암탉들처럼 취급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모두의 인간성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서 읽어보았다. <피의 언어>(송재평 역, 도마뱀출판사)는 정말 피로 쓴 책이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가끔 이런 책들이 있다. 책에서 인생을 담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어떤 책은 정말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런 책들을 존경한다.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삶의 살이 떨어져나가고 뼈 같은 단어만 남아 있지만, 그 단어와 문장들이 환기하는 삶의 질감이 우리를 다시 삶으로 이끌어준다.

 

<덧없는 환영들>(이일수 역, 창비)은 그녀의 두 번째 책이다. 책을 펼치자 눈을 뗄 수 없었고, 타협하지 않고 직시하는 정직한 시선에 사무칠 지경이었다. 그것은 반가움이었고 고마움이었고 두려움이었고 저자가 끝까지 잃지 않는 용기에 대한 감탄이었다.

 

“덧없는 환영들마다 세상이 보이네, 다채로운 무지갯빛 가득한 세상들이”. 책 맨 앞에 있는 시구다.

 

분단과 자본주의, 식민지성과 소외를 기록하다

 

그녀는 여섯 번 한국에 왔으며 여섯 번째 한국에 왔을 때는, 미국인과 결혼하고 다시 미국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다음, 이혼을 한 직후였다. 그녀는 “서울에서 학생처럼, 수도사처럼 가로세로 5미터 남짓한 방에서 살면서” “가진 물건이라고는 컵 세 개, 밥솥 하나, 요 한 장, 책 몇 권”뿐인 생활을 했다.

 

돌아온 그녀는 서울의 풍경을 기록한다. 외국인 동네이면서 한국인 동네인 연희동, 미군이 주둔한 용산, 자신을 한국인이거나 성매매 여성으로 취급하는 이태원 거리, 북한의 빈곤 상황(“그러나 북한은 입양을 보내지 않았다”), 자신의 근거지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떠도는 이백여 명의 입양인들,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동경하는 학원 학생들(그들에게 ‘입양’이 ‘유학’과 다르다는 것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잘산다는 것과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아직 동의어인 한국의 편견,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깊은 골, 언어를 배우면서 느끼는 경험과 인식의 간극, 그것을 그녀는 낱낱이 기록했다. 

 

▲ 제인 정 트렌카 <덧없는 환영들> 원서 <Fugitive Visions: An Adoptee's Return to Korea>(2009년 6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그 뒤에 자신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입양인이었던 그녀는 풍경의 본질을 그 어느 작가보다 날카롭고 빠짐없이 그려낸다. 분단과 자본주의, 식민지성과 소외를 이렇게 정확한 언어로 그리는 작가는 드물다.

 

한국의 작가가 일상적이고 나른한 풍경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풍경을, 그녀는 긴장되고 부릅뜬 시선을 통해 그려낸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내려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서해 바다에 재로 뿌려진 아버지도, 자신이 다섯째 쓸모없는 딸이라고 베개로 얼굴을 덮어 죽여버리려던 아버지의 이야기도, 돈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아이를 빼앗기던 어머니같이 가난한 여자들도, 화려한 한강다리, 경제성장의 이면에 가난한 이들의 노동을 추방한 역사도 모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다리를 보면서 이 모든 부를 함께 일궜으면서도 몫을 받지 못하고 추방당한 부모와 또 추방당해 사라져야 했던 자신들을 생각한다. 거의 들리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게 불가능에 가깝지만 말을 하고 있는 입양인, 존재로서 시위하는 자신들을 떠올린다.

 

자신을 죽이려던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살아 남았다. 아시아 여성이라고 자신을 표적으로 삼고 강간 살해의 계획을 세운 스토커도 있었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다. 미국에서 적응하기 위해 자신이 빼앗기고 강탈당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였다. 인종차별 속에서 완전한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일상의 차별을 겪었고, 거듭된 성추행(“한국은 여성에게 위험하지만 아시아계 여성은 외국에 나가면 더더욱 위험하다”, 고 그녀는 썼다)을 당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까지 갔다.(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곳에서 그녀가 잘못된 게 없다고 깨우쳐주고 살려준 책이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였다), 한국어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영어로 쓰고 사고할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 사는 ‘괴물’.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은 그녀가 말을 걸면 한국인이라 생각해서 도망쳐버리고, 토할 정도로 한국음식을 먹어대지만 미국식 치즈가 그리워 이태원을 기웃거린다.

 

미국인 부모의 역사는 배웠지만 한국의 역사와 부모의 이야기는 배울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뗀 입양기관의 서류들은 모두 다른 날짜와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름조차 달랐다. 돌아오는 답은 ‘그땐 그런 일이 흔했다’는 것이었다. 입양을 시키려면 고아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고아를 만들어 팔아버린 아이들. 잘사는 외국에 가면 행복해질 거라고 인간에 대해 무지하고 잔인하게 예단한 사람들.

 

우리는 이처럼 두렵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졌고… 

 

▲  제인 정 트렌카의 <덧없는 환영들> (창비) 
 

그러나 ‘덜 허기지고’ ‘덜 불안할 것’이라는 희망의 끝자락을 붙잡고, 입양인이었던 그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월세를 벌기 위해 영어 강사를 하고 고시원에 모여 살면서, 처음의 반듯했던 모습을 술과 고통에 무너뜨리면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서로 애타게 사랑하고 헤어지면서도, 결국 떠나지 않는다. 그치지 않고 찾는다. 자신을, 인간다울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기를 꿈꾼다.

 

한국의 자연 속을 걷다가 자연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너는 누구인지 묻지 않고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나는 누구일까? 이 덧없는 인생의 맹렬한 허기, 여기 존재하는 나, 그것을 부정할 수 있겠냐고 던지는 물음.

 

“나를 쫓던 것이 한국, 즉 자기가 낳은 자식을 돌보지 못하고 대신 그들에게 팔아버린 그 짐승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돌아와 제 배 속으로 돌진했으니 더는 날 쫓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입양된 인생은 나를 나 자신이 되지 않게 해주어야 했음에도, 나는 언제나 그 짐승의 일부였고, 그럼에도 난 다시금 그 짐승의 일부가 되었다.”(259p)

 

“미화 800달러에 내 몸이 팔려간 지 사십일 년이 지났다. 어마어마한 확률을 뚫고 나를 비롯한 수많은 해외 입양인이 국외 추방과 입양생활에서 살아남아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우리의 ‘부재’가 아닌 우리의 ‘존재’가 이 나라 현대사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여전히 민주화가 진행 중인 이곳에서,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어판에 붙여 쓴 말에서)

 

이 책에는 삶을 통과한 아름답고 진실에 찬 문장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절실하게 빛나며 그 예리한 날의 빛을 축복처럼 우리에게 전해준다. 피가 흐르는 언어에서 다시 심장이 뛰고, 칼날 같은 인식이,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너그럽게 허락한다는 것은 불가해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함께 할 일이 남아 있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겠지.

 

자신의 내밀한 고통을 말한 적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인 정 트렌카가 온몸으로 쓴 언어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끌어안는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피아노 건반이 있는 풍경. 그 속에서 현재의 덧없는 환영들은 과거가 되고, 그것은 다시 현재의 현실에 제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과거를 지나왔든, 우리가 어떻게 다르든, 우리가 무엇에 실패하고 무엇에 성공했든 간에, 우리는 결국 혼자, 또 다 함께 마지막에 이를 것이다. 음악가들, 시인들, 공장노동자들 모두 그곳에 이를 것이다.

 

위험한 정도로 미친 사람들, 암살자들, 피살자들 모두. 마음씨 좋은 사람들, 악의 없는 사람들, 악덕업자와 타락한 사람들 모두. 엄마들, 아이들,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들, 우리(uri), 위(we), 모두. 우리는 이처럼 두렵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졌고, 자기 말과 자기 손이 빚어내는 하나뿐인 미래의 거주민이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그때에 우리가 하는 일은 공정하고 너그럽고 진실되고 풍요로울 수 있으리라.

 

그러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

 

※ 제인 정 트렌카는 1972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육개월 만에 미국 미네소타주 백인가정에 입양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모임’(TRACK) 설립에 참여했으며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 안미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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