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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책의 도시’ 베슈렐(Becherel)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테마 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일다] www.ildaro.com 

 

고서점과 헌책, 예술가들의 마을 베슈렐

 

렌에서 북쪽을 향해 시외버스로 30분 정도 달리면, 베슈렐(Becherel)이라는 작은 도시에 다다른다. 전형적인 브르타뉴 농촌 풍경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성당의 높은 뾰족 지붕과 함께 고풍스러운 마을 끝자락이 시야에 들어오면,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과 함께 목을 길게 빼고 슬쩍 둘러보게 된다. 렌에서 버스로 디낭을 가다가 몇 차례 살짝 엿본 베슈렐의 인상은 이랬다. 

 

▲  멀리서 바라본 ‘책의 도시’  베슈렐(Becherel)  풍경   © 정인진  

 

그런데 그곳이 ‘책의 도시’인 줄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책을 테마로 한 도시는 본 적이 없던 터라,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더욱이 읍 정도 규모의 작은 도시에 고서점과 책과 관련한 공방들이 20여 개나 있다는 관광안내서를 보고는 한시라도 빨리 베슈렐에 가보고 싶어 몸이 들썩거렸다.

 

나는 헌책방을 기웃거리는 걸 좋아한다. 옛날 유학 시절, 북부 릴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서는 장 한 켠엔 헌책을 파는 상인들이 꼭 왔다. 상인들이 가져오는 책들 가운데는 좋은 책들이 제법 많아서, 책값이 비싼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읽고 싶었던, 또는 읽어야 할 책들을 헌책 틈에서 발견할 때는 마치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운이 좋으면 논문 작업에 필요한 책을 살 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20세기 초에 발간된 베르그 송(Henri Louis Bergson, 프랑스 철학자, 1859-1941)의 <창조적 진화>와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프랑스 신학자, 고생물학자, 1818-1955)의 저작들을 찾은 건 행운이었다.

 

난 프랑스의 오래된 책들을 정말 좋아했다. 꾹꾹 눌린 활자 자국도, 바느질해서 묶은 것도, 썩썩 썬 낱장의 거친 칼자국들 모두, 좋았다. 그래서 이미 읽었거나 가지고 있는 책도, 오래된 것을 보면 또 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1931년 출판된 꼴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 1873-1954)의 한 소설책은 순전히 책이 예뻐서 산 것이었다. 종이 질과 인쇄 방법이 오늘날과 판이하게 다르고, 간간히 판화가 곁들여진 아주 잘 만든 책이었다.

 

그러니 ‘책의 도시’ 베슈렐에 안 가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매우 가까운 그곳을 놓칠 수는 없었다.

 

‘이런 동네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 책의 집(maison du livre)을 겸하고 있는 베슈렐의 관광안내소  ©정인진 
 

어느 햇볕 좋은 날, 베슈렐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관광안내소였다. 다른 도시와 달리 이 안내소에는 전시실이 딸려 있어 놀랐다. 상설 전시장과 특별 전시실을 갖춘 제법 큰 규모였다. 전시회는 물론, 포럼이나 심포지엄 장소로 쓸 수 있는 방도 여럿 있었다.

 

상설 전시는 이 마을의 특색인 ‘책’에 대한 것과 베슈렐의 전통적인 아마 산업을 소개하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는 프랑스의 유명작가 쟝 꼭또(Jean Cocteau 1889-1963)의 저서와 그림을 소개하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본 베슈렐의 관광안내소는 단순하게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구경 거리를 안내하는 업무에 머물지 않고, 의미 있는 행사와 전시를 지속적으로 기획하면서 베슈렐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관광안내소의 모습부터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베슈렐은 가이드북에 소개된 대로 도시 전체가 책을 테마로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고서적을 취급하는 사람들과 장인들, 화가나 공예가 같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둥지를 틀고 마을 깊숙이 터를 잡고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기웃거리다가 들어간 책방에는 오래된 골동품들을 함께 팔기도 했고, 또 어떤 곳은 차를 마실 수 있는 북카페이기도 했다. 목을 축이고 숨도 돌릴 겸 해서 들어간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책을 둘러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책도 한두 권 사 들고 나오게 마련이다.

 

베슈렐을 다녀온 뒤에도 이런 저런 이유들이 내 발길을 다시 이 도시로 이끌었다. 이곳에선 계속해서 흥미로운 전시와 이벤트들이 열렸거니와, 많은 책방과 예쁜 공방들을 구경하고 싶어서 자꾸 가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카페를 겸하면서 브르타뉴를 소재로 하는 책들만 취급하는 고서점에서 차를 마셨고, 흥미로운 책들을 꼭 한두 권 사가지고 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런 마을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멋지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한번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곳은 없었다. 베슈렐은 살고 싶은 마음이 든 브르타뉴의 첫 번째 도시였다. 그런 나 자신에게 놀랐다.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도시!

 

자립하며 문화적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들 

 

▲ 베슈렐의 ‘앙시엔느 알 광장’     ©정인진 
 

중심가를 어슬렁거리며 거닐면 나처럼 구경 온 관광객들과 자꾸 마주칠 정도로 베슈렐은 작은 마을이다. 몇 번이나 같은 사람들과 마주치자 결국, 그들과 눈인사까지 주고받게 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질 것 같은 그런 작은 동네였다. 관광안내서에 소개된 대로 베슈렐에는 정말 고서점들이 많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값싼 헌 책들은 물론, 한 눈에도 오래되었을 것 같은 희귀한 책들도 엄청 많았다.

 

베슈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곳은 ‘브르타뉴의 특색 있는 작은 도시’ 목록에 등재된 곳으로, 작은 마을에 고서점 14곳과 책과 관련된 공방 7개가 자리잡고 있다. 그 근방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아마와 삼베의 생산지였고, 목축업이 발달되어 우유와 요구르트를 생산하는 전형적인 브르타뉴의 농촌 마을이다.

 

이런 베슈렐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86년 ‘사벤 두아르 친목회’(L’association Savenn Douar) 회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이 친목회는 “지방에서 일하며 살기”라는 제목으로, 자립과 연대에 기초한 문화적인 삶을 시골에서 시도해 볼 장소로 베슈렐을 택한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친목회의 독서그룹이 주축이 되어, 브르타뉴의 문화유산을 재발견하고 브르타뉴 언어 수업 및 전통 요리법 강습 등이 시도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브르타뉴 문화연구소’ 소장인 베르나르 르 나일(Bernard Le Nail)은 베슈렐에 정착한 사벤 두아르 침목회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그는 유럽에 존재하는 웨일즈의 ‘Hay-on-Wye’와 벨기에의 르뒤(Redu)라는 ‘책의 도시’를 소개하고, 베슈렐을 이 도시들처럼 책 마을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하였다. 친목회 사람들은 벨기에의 르뒤를 직접 방문해 연구한 뒤, 이 제안에 크게 공감하며 책 마을 프로젝트를 전개시켰다.

 

시골에 ‘책 마을’이 만들어지다 

 

▲ 한 제본 공방에서 ‘책묶는 장인’(relieur)인 스테파니 토마(Stephanie Tomas)씨의 작업 모습    © 정인진 
 

1989년, 드디어 제 1회 책 축제가 열리고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쳤다. 이 축제 이후, 여러 고서점들이 속속 들어와 베슈렐에 문을 열었다. 시골에 책 마을을 건설한 것이 매우 혁신적으로 평가되었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언론을 통해 소개된 베슈렐에 흥미를 느껴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활기 넘치는 마을이 되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베슈렐에는 해마다 부활절 주말 3일 동안 ‘책 축제’가 열린다. 7-8월 바캉스 기간에는 한 달 동안 수요일 밤마다 ‘야간 책 시장’이 펼쳐진다. 베슈렐은 이제 프랑스에서 첫 번째 책의 도시가 되었고, 유럽에서는 Hay-on-Wye와 르뒤에 이어, 세 번째 책의 도시가 되었다.

 

또, 이곳에는 일상적으로 책과 관련한 아뜰리에 수업들이 있다. 붓글씨(caligraphie), 채색 삽화(enluminure), 책 묶기(reliure)는 물론,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 그리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특색 있게 실내장식을 한 책방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것도 즐겁지만, 베슈렐에서는 고서점들만 볼만한 건 아니다.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던,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는 성벽을 따라 산책하면서 브르타뉴 내륙,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보는 것도 즐겁다.

 

시내 중앙에는 역사적 기념물인 중세의 오래된 성당도 있다. 이 성당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인근 주민들이 모두 모여 종교행사를 거행한다. 또 가파른 작은 오솔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나면, 호숫가에서 평화로운 시간도 즐길 수 있다. 볕이 잘 드는 공동묘지 안 벤치에 앉아 있는 것조차 베슈렐에서는 편안한 느낌이다. 좀더 짬이 있다면, 안내 표시가 잘 되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브르타뉴 농촌의 오솔길들을 걸어볼 수도 있다. 

 

▲  브르타뉴 언어로 ‘뿌리’(gwriwienn)라는 뜻의 이 책방은 베슈렐을 책의 도시로 만든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다.   © 정인진 
 

귀국한 뒤, 우리나라 몇몇 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중 파주의 헤이리나 경주의 교촌 마을에 갔을 때는 베슈렐을 떠올렸다. 두 곳은 특별한 테마를 가지고 관광 명소를 만들기 위해 기획된 동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인위적이고 상투적인 느낌을 감출 수 없었는데, 자발성에 근거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곳을 특별한 마을로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살만한 곳보다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곳, 관광객을 많이 끌어 모으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베슈렐처럼 사람들이 자꾸 다시 찾을 수 있게 하고, 방문객들이 살고 싶도록 마음을 흔드는 그런 마을이어야 테마관광도시로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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