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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찌려고 녹용주사 vs 살빼려고 성형수술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⑩ 남한과 북한의 의료 
 

 


10여년 전, 한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북한이주여성 효주씨가 북한 서민문화와 남한에서 겪은 경험을 전하는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무상의료’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북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공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링거를 맞거나 입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병원도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북한 주민들이 식량난을 겪기 시작하면서 병원에 영양실조로 입원하는 환자들이 늘기 시작했고, 영양실조로 인한 각종 질병과 전염병 환자들이 생겨났다. 병원 병실들이 꽉 차서, 위험한 환자들만 입원시키고 경한 환자들은 통근 치료를 하도록 퇴원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병원에 가도 약이 없었고, 오히려 의사들이 장마당에 가면 중국사람들이 가지고 나와서 파는 해열제가 있다며 그 약을 사먹으라고 권하는 상황에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각양 각색, 병명에 따라 다양한 약들도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끼 먹기도 힘든 현실에서는 아파도 그 비싼 약을 사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특히 부모들은 자신의 질병을 외면해야 했다. 아이들이 아프면 온 식구가 하루 굶을 작정을 하고 약을 사 먹이기도 했다.

 

내가 급성 폐렴으로 피를 토하고 높은 열에 시달릴 때, 딸이 어디 가서 콩 이삭을 주워 팔아 해열제 두 알을 사온 적이 있었다. 한 알에 얼마를 주었냐고 물었더니 6원씩 주고 사왔다고 하기에, 비싸게 돈을 주고 왜 약을 사왔냐고 꾸짖었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아들도 기침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갔더니 페독산이라는 기침약을 주었다. 페독산은 한약제로 만든 가루약인데 몹시 써서 먹기 힘든 약이다. 양약은 제약회사에서 만들어야 하지만 원료가 없어 생산이 중단된 지도 오래였고, 의사들이 처방해줄 수 있는 약은 한약제뿐이었다. 

 

▲   북한은 무상의료 제도이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병원도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손그림 - 효주  

 

1990년대 중반에 북한 전역에 파라티푸스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위생 상태도 열악해서, 전염병에 감염되어 39~40도의 고열과 장이 꼬이는 아픔에 시달리다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북한에서 파라티푸스 환자들에게 주는 약은 신토미찐이라는 알약이다. 경제난이 있기 전에는 병원이나 약국에서 얼마든지 처방 받아 먹을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귀한 약으로 둔갑하였다. 병원에 가도 약을 구할 수 없고, 함부로 물을 마셔도 안 되는 병이라 목이 타면 입술이나 적셔주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중국으로 넘어올 당시 영순이라는 애기엄마가 있었는데, 함경도 어느 역전에서 겨우 돌 지난 여자애기를 업고 와서 나오지도 않는 빈 젖을 물리며, 또 사카린 물을 먹여가며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집 없이 떠도는 북한 아이들을 칭하는 말) 생활을 하다 결국은 딸아이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얼마 후 영순이도 꽃제비 생활을 하면서 파라티프스 고열병에 걸렸다. 그가 사는 거주지가 아니라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앓고 있었는데, 물보다는 그렇게 오이를 먹고 싶다고 찾던 모습이 생각난다. 다행히 영순이는 그 병을 앓으면서도 국경을 넘었고, 중국에 있으면서 고마운 한국 사람들을 만나 약을 먹고 놀랍게도 금방 나을 수 있었다.

 

한국 병원에서 약을 타먹고 부작용이 생기다

 

북한의 병원은 양방과 한방을 병행하기 때문에, 의사들이 침도 놓고 한약 처방도 할 수 있다. 북한의 침술과 한방은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 있는 것으로 안다.

 

약초 채취 철이 되면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일주일에서 길게는 몇 달 동안 약초를 캐러 다니거나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사들인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북한에도 약국이 있는데, 군에 하나 있거나 시 단위에 몇 개 정도 있어, 경제난이 심해 약국 문들이 닫히기 전까지는 비상약을 아무 때나 사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처방을 받아 먹는 약은 병원에서 타갔다.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산을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채취하곤 하였다. 할아버지들이 약초를 캐오면 할머니들이 집 앞 마당에 앉아 약초를 손질해 말리거나, 말린 약초들을 마대에 담아 쌓아놨다가 병원에서 차가 오면 저울에 달아 팔고 돈을 받는 풍경을 종종 보았다.

 

한국에서는 약초도 재배를 하던데, 북한에서는 모두 야생에서 자라는 것을 채취해 한약을 만든다. 함경북도의 대홍단 5호농장에서는 황기를 재배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5호농장 자체가 중앙당 간부들을 위한 것이어서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한국의 건강원에서 내리는 물약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 대개는 환이나 가루약으로 만들어 처방을 해주었다. 그리고 북한의 의사들은 양약을 처방할 경우에 소화가 안 되면 소화제, 기침을 하면 기침약, 설사를 하면 지사정 등 병에 따라 약 한 가지만 처방했다.

 

한국에 오니 양방과 한방이 따로 있고, 무엇보다 가는 곳마다 병원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북한에는 개인병원이 없고, 민간에서 몰래 치료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한국에는 치과, 성형외과, 안과, 정형외과, 그리고 한의원도 많고, 나라에서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것이 낯설었다.

 

한국에 와서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의사가 무려 5~6알의 양약을 한꺼번에 먹도록 처방해주었다. 또 기관지 확장증으로 호흡곤란이 와서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약을 엄청나게 많이 주길래 내가 정말 중병에 걸린 줄 알았다. 그런데 약을 많이 먹지 않고 살았던 나로서는 그 약 한 봉지를 먹고 부작용이 생겨 어지럽고,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온몸이 떨려서 못 견딜 정도로 힘들었다.

 

의사에게 나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고 약을 많이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약을 먹고 힘들다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면서 다시 처방해주었다. 그래서 약이 쑥 줄었는데 기관지 약 두 알과 소화제 한 알이었다. 정말 먹어보니 속이 편하고 아무렇지도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회진을 돌던 의사선생님이 옛날 약이 없던 시절에 하던 대로 처방해준 거라고 하셨다.

 

‘세 쌍둥이나 낳아봤으면 좋겠다…’

 

북한에서는 첫 애의 경우엔 병원에서 낳지만, 둘째부터는 산파나 진료소(지역보건소) 간호사를 불러 집에서 낳는 경우가 많다.

 

북한의 평양산원은 그야말로 현대적인 의료설비들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산모들조차 아무나 갈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간부 집의 산모들, 그리고 북한이 자랑하는 세 쌍둥이, 네 쌍둥이들을 위한 병원이기도 하다.

 

북한에서는 세 쌍둥이가 태어나면 나라가 흥할 징조라고까지 하면서 대대적으로 방송하고, 김정일 장군님이 산모의 고통을 헤아려 직접 헬기까지 띄워 평양산원에서 순산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세 쌍둥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큰 집도 주고, 정기 건강검진도 하고, 생일이나 명절이면 선물을 보내주며 아무 근심 없이 살 수 있게 돌봐준다. 그러니 북한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 쌍둥이나 낳아봤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집에서 출산을 하는 산모들은, 아이를 낳다가 질 입구가 찢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병원에선 꿰매주지만 집에선 의사가 없다 보니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둘째를 낳고 난 이후 오랫동안 괴로움을 겪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을 수도 있지만 창피하다는 생각 때문에 참고 살아가다 보니, 걸을 때도 앉을 때도 오래 서 있을 때도 항상 불편하고 힘이 빠졌다.

 

우리동네 50대 중반이 넘은 아주머니도 아래로 뭔가 나와 있는 게 너무 불편하다 보니 인두를 달궈 그 부위를 지졌다가, 염증이 생겨 썩어 들어가 나중엔 목숨마저 잃어버렸다. 오죽 힘들고 아팠으면 그랬을까. 그런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그 아주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한국에 와서 초기에 산부인과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이쁜이 수술’을 하겠냐고 묻기에 나는 그런 건 상관 없고 걸어 다닐 때 불편하지만 않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때 치료를 받은 이후, 더 이상 아래로 빠져 나오는 느낌이 없어 무슨 일을 해도 신경 쓰이지 않아 편하다. 그렇게 간단한 수술로도 해결되는 문제였는데, 목숨까지 잃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간요법으로 아픈 이들을 치료해주던 남편

 

북한에서는 경제난을 겪으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자연의학, 즉 민간요법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가 되었다. 나라에서 승인을 해준 것이 아니고, 미신이라 하여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몰래 물어 물어 찾아 다닌다. 그러나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전국에서 몰려들기 때문에 금세 알려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중앙당 간부급들도 찾아간다니 입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다.

 

황해북도 남포시의 한 마을에 민간요법 치료를 잘하기로 유명한 여자가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편이 앓게 되면서 혼자 침 공부를 독학하고 민간요법으로 남편을 치료해주었는데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소문이 돌면서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몰려오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업혀갔던 사람이 걸어서 나갔다느니, 말 못하던 사람이 말을 했다느니, 중풍환자가 완치되었고, 허리와 다리를 고친 환자도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내 남편도 오랜 병원 생활을 하면서 ‘100가지 민간요법’ 책을 열심히 보고, 나와 자식들이 아플 때 치료해준 적이 있다. 가끔 동네 사람들도 치료를 해주었는데 신기하게 효과를 보게 되어, 입 소문을 타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중한 병은 고치지 못하지만, 감기나 기침, 설사, 소화불량, 다래끼, 편도선염 등은 거짓말처럼 낫는 것을 보고 감탄했었다. 남편은 자주 한약방에 가서 손질하지 않은 쑥을 사다가 직접 뜸쑥을 만들어서 아픈 사람들에게 떠주거나, 뜸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뜸 자리도 정해주었다.

 

남편은 자신이 앓는 몸이다 보니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돈을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어려운 살림 형편이니, 대신 답례로 입초 담배나 호박, 감자 등을 조금씩 가져오곤 하였다.

 

남편은 원래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 어떤 때는 그마저도 가져온 것들을 되돌려 보내곤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 서운했지만,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누가 고자질하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도 신고를 한 사람이 없어서 남편이 살아서 거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이웃을 치료해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질병인 편도선염으로 고생을 해왔는데, 남편이 양쪽 엄지손톱 한가운데 뜸을 세 장씩 떠준 덕분에 오랜 기간 편도선염을 모르고 살았다. 지금도 내 엄지손가락에는 그 자국이 남아있다. 남편이 죽은 뒤에 내 몸이 많이 아프게 되었는데, 남편이 몹시 그리울 때가 많았다.

 

돈 주고 살 빼는 남한사람들

 

북한에서 1990년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갈 때, 상류층들은 병원에 가서 녹용주사를 맞고 의사들과 뒤로 짜고서 약을 빼돌려 부모에게 팔도록 하기도 하였다. 간부들이 녹용주사를 맞는 것은 살이 찌고 배가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선 뱃살을 빼려고 난리인 상황이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북한사람들은 간부가 되면 멜빵바지를 입고 다니곤 하는데, 아마 위엄을 돋구려고 하는 것일 게다.

 

처음 한국 공항에 도착해 승용차를 타고 이동할 때, 거리에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 ‘남한에는 간부들이 참 많네요’ 했더니 ‘무슨 간부?’ 하고 묻기에, ‘저기 양복입고 배 나온 사람들이요’ 하자 막 웃었다. 그는 ‘맞다’고 하면서, 한국에 배 나온 사람은 다 간부들이라고 한 수 더 떠서 농담을 했다. 나는 그 말이 진담인줄 알고 ‘아, 남한이 잘 산다더니 간부도 많은가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야 남한사람들이 다 잘 먹어서 살이 찐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사람들 입에서는 둘 셋이 모여 앉으면 자연스럽게 살을 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다이어트, 성형수술로 세계 1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한두 군데는 성형을 했거나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성형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성형을 고려하는 걸 보면, 한국은 ‘성형의 나라’ 같다. 성형수술로 예뻐지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그래도 웬만하면 성형을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북한의 미에 대한 기준이 정말 다른 것이, 얼마 전 어떤 아가씨가 ‘1만원어치 먹고 살쪄서 100만원주고 살 뺀다’는 말을 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공감이 가는 말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미인이라 하면 키는 보통에, 약간 포동포동하고, 복스럽고, 엉덩이가 좀 큰 여성을 칭한다. 나처럼 마른 여자들은 별로 인기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나같이 마른 여자들을 부러워한다. 마른 몸매가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는 한국에 와서 처음인 것 같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신문을 보는데 ‘살을 뺀다’는 제목이 보였다. 참 할 짓거리들이 없구나 생각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먹고 살찐 사람들이 별 짓을 다 한다고 욕이 나왔다. 그런데 이곳에서 살다 보니 누가 잘살고 못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 사람들의 얼굴에 기름기가 돌고, 북한말로 포동포동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말 뚱뚱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전혀 몰랐던 ‘비만’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병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과, 이 세상에는 별의별 질병이 많다는 것도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왜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북한보다 중병에 걸린 환자들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수수께끼처럼 의아했다.

 

어쩌면 북한에서는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산과 들의 풀이라고 생긴 것은 독초 빼고는 다 뜯어먹고 살았으니 약초도 많이 먹게 되어, 영양실조에는 걸릴지언정 암처럼 큰 병에는 잘 걸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고혈압이나 당뇨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간부들이거나 간부집 가족들이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남조선에서는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가 돈부터 내놓으라고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에서 무상의료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의사에게 뒷돈을 찔러주거나 간부쯤 되어야 약도 타먹고 치료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정말 마음이 아프다.  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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