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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어떤 말을 남길까?
[죽음연습] 종교적 유언과 법적 유언, 그리고 사전의료의향서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일다> www.ildaro.com      

 

 

지금껏 나는 여러 차례 유언장을 작성했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판단과 사후에도 내가 소유해 온 것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처분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사실 ‘유언’이라면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남기는 말이겠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라도 죽을 수 있으니까, 굳이 임종 직전이 아니더라도 남길 말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게 나을 성 싶다. 실제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급히 이 세상을 떠나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데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비행기가 추락하기 직전,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둘러 메모를 남기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임종 직전에 남기고 싶은 말

 

그런데 죽는 마당에 무슨 말을 그리 남기고 싶은 걸까. 우선, 남겨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사과하고 사랑을 전하고 이별의 인사를 나누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일 거다. 이 마음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평소에 감사하고 사과하고 사랑하며 잘 지냈다면 설사 죽음 직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해도 크게 유감은 없을 듯하다.

 

또 내가 죽은 다음 진행될 장례식과 남은 나의 육신, 즉 시신 처리가 신경 쓰여서 한 마디 남기고 싶을 수도 있다. 장례식을 호사스럽게 할 것인지 검소하게 할 것인지, 장례식장에 사용할 영정 사진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제단의 꽃은 무엇으로 할지, 장례식장 분위기를 위해 어떤 음악을 틀지, 조문객에게서 부조금은 거둘 것인지 말 것인지, 또 어떤 음식을 대접할지 등을 일일이 지시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또 죽은 내 육신에 어떤 옷을 입힐지, 평소 입던 옷을 입은 채로 입관할지, 아니면 특별히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 입힐지, 관은 무엇으로 할지, 고급 나무 관으로 할지, 환경오염이 적은 종이 관으로 할지, 매장, 화장, 수목장 가운데 무엇을 택할지도 세세하게 거론해서, 사후에도 살아 있듯이 간여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장례 행사도 생전에 미리 기획해 두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내 육신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은 다음 내 육신이 어찌 된들 무슨 상관일까 싶다. 또 장례식은 죽은 사람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의식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꾸리면 될 일 아닐까? 장례식, 시신 처리와 관련해서 유언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그리 안타깝지도 않을 것 같다.

 

법정 상속이 아니라 유언 상속을 원한다

 

내가 유언장을 쓰는 이유는 내가 소유했던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길 재산이 많건 적건 내 의지대로 분배되고 상속되길 바란다. 한 마디로 ‘유언 상속’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유언 상속’보다는 ‘법정 상속’을 그냥 따르거나 법적인 상속은 무시한 채 고인의 유지를 따르기도 한다.

 

민법상 효력을 가진 ‘법정 상속’은 이성애에 기반한 법률혼, 혈연과 입양을 통해 형성된 가족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유언 상속’을 하지 않고 사망하면, 죽은 사람이 남긴 재산은 ‘법정 상속’ 된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의 바램과 의지가 어떠했건, 법률에 따라 일방적으로 처분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법정 상속’은 순위에 따라 결정된다. 직계 비속이 1순위, 직계 존속이 2순위, 피상속인(상속하는 사람)의 형제자매가 3순위, 피상속인의 4촌 이내 방계 혈족이 4순위로 정해져 있다. 직계 비속에는 자녀, 손자, 증손자가, 직계존속에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가 해당된다. 4촌 이내의 방계 혈족이라면 피상속인의 직계 존속의 형제자매(고모, 이모, 삼촌)나 그 형제자매의 직계 비속(사촌 형제자매)이다.

 

같은 순위의 상속인이 여러 명이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상속된다. 배우자는 1순위인 사람과 공동 상속하지만, 1순위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으면 2순위와 공동 상속한다. 1,2순위가 모두 없으면 배우자에게만 상속된다.

 

이런 식의 상속법은 법률이 인정하는 가족을 위한 것으로, 무엇보다 가장이 유언 없이 사망했을 때 배우자와 자녀가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 형태는 법이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다. 결혼 제도에 편입하지 않고 비혼으로 살아가는 사람, 결혼 제도에 편입할 수 없는 동성 가족을 비롯해서 법이 끌어안지 못하는, 현실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한다. 그러나 법제도 밖의 가족은 상속법이 보호하지 않는다.

 

법정 상속인이 죽은 사람과 일상 생활을 공유하지도 않고 평소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지만(심지어 사이가 틀어진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혈연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사람의 재산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죽은 사람이 자기 재산을 특별히 상속하고 싶은 사람이나 기부하고 싶은 단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내가 죽게 되면 직계 존속이나 직계 비속에 해당되는 1,2순위 법정 상속인이 없고 배우자도 없으니까 3순위인 형제자매가 법정 상속인이 된다. 만약 이들이 나보다 먼저 사망하게 되면 이들의 자식들, 즉 조카들이 법정 상속인이 될 것이다. 비록 내가 형제자매와 조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내 재산을 이들에게 상속할 생각은 없다. 나와 별도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형제자매는 나와 현실적인 경제공동체가 아니다. 나는 내 재산을 나와 함께 경제공동체를 꾸린 사람이나 내가 돕고 싶은 곳에 건네주고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내세 위한 ‘종교적 유언’에서 상속 위한 ‘법적 유언’으로

 

개인의 재산 상속을 위한 사법적 유언장의 출연이 서양에서조차 (로마 시대를 제외하고)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자신의 저서 <죽음 앞의 인간>(새물결, 1985)에서 재산 상속을 위한 법적 유언장이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에야 등장한다고 적고 있다.

 

12세기부터 유언장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지만, 이 시기부터 17세기까지는 교회법에 따라 ‘내세를 보장받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사후의 삶을 위한 유언장이라니, 우리 현대인의 눈에는 낯설기만 하다.

 

육신을 교회나 교회묘지에 묻고 영혼의 천국행을 보장받으려면, 신도들은 생을 마감할 때 신앙고백을 하고 죄를 인정하고 속죄하는 공문서, 즉 유언장을 반드시 남겨야 했다. 또 천국에 가서도 부를 보장받고 싶은 부자들은 현세에서 기부나 적선을 통한 종교적인 증여를 해야 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유언이 종교적 행위라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비록 재산 상속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적선이나 미사를 위한 기부는 유언장에서 덜 중요해진다고 한다. 19세기에는 대다수의 유언장에서 종교적 내용이 사라진다. 이제 유언장은 교회법에 따라 사후의 삶, 내세를 보장받기 위해 작성된다기보다 국가의 법률에 따라 남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배분하기 위해 쓰여진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유언이 덧붙여진다. 마침내 종교적 행위였던 유언이 세속화되면서 국가의 법제도 속으로 편입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유언장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 왔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서구 사회나 우리 나라나 국가의 법에 의거해서 유언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종교적 유언이건 사법적 유언이건, 사실 유언은 자의식, 자신의 영혼과 몸, 재산을 스스로 처분하고자 하는 등 최후의 개인적 소망이나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두드러진다.

 

‘사전의료 의향서’, 임종 직전과 관련된 유언

 

19~ 20세기의 유언이 사후 재산 상속과 관련한 개인적 소망과 의지를 담았다면 21세기에는 ‘임종 직전과 관련한 유언’이 덧붙여져야 할 상황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고, 현대의술의 발달로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이 상당 기간 연장될 수 있게 됨에 따라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은 채, 죽기 전 ‘살아 있는 시체’로 한동안 병원에서 억류되는 ‘죽음 유예 기간’이 생겨났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죽지 못하고 삶에 붙들려 있는 상태가 더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따라서 죽은 후 내세를 보장받기 위해서나 죽은 후에도 현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원치 않는 생명연장의 희생양이 되기 않기 위해서 어떻게 죽어가고 싶은지를 분명하게 밝혀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심폐소생술, 대장 부분절제술과 같은 대수술, 기도 삽관 후 인위적으로 숨을 쉬게 하는 기계호흡, 복부에 튜브를 꽂는 인공투석, 수혈 및 혈액제제투약, 인공영양 및 수액요법, 혈액 및 X선검사와 같은 간단한 진단적 검사, 감염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 죽음을 촉진할 수도 있는 진통제 투여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미리 밝혀두자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모든 시도를 할 것인지, 아니면 완화 의료를 원하는지도 함께 명시해두는 좋을 것이다. 

 

                  ▲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sasilmo.net)에서 제공하는 사전의료 의향서 양식   

 

이러한 필요성을 인지하고 ‘사전의료 의향서’(Advance medical directives)를 미리 작성해두자는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sasilmo.net)까지 국내에서 생겨났다. 이들이 말하는 ‘사전의료의향서’란 “말기 질환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으며 자신의 의사결정능력이 상실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건강할 때 생명의 연장 및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 여부에 관한 보다 구체적으로 의사표시를 명시한 문서이다.”

 

결국 ‘사전의료 의향서’는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해 죽어가는 과정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분명한 의식이 있을 때 준비해두는 또 하나의 유언인 셈이다.

 

현재 사전의료 의향서와 관련된 법률이 없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 이 서류를 반드시 존중해야 할 법적인 의무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에서는 ‘2009년 세브란스 김할머니 사건’의 대법원 판시에 근거해서, 사전의료 의향서가 법적 효력이 있으리라 추정한다.  적어도 담당 의사가 사법적 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생명 연장의 무모한 시도를 막을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가족이 말없이 고통 받는 환자를 마냥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사전의료 의향서를 쓰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연말에는 유언장을 다시 써 볼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이번에는 사전의료 의향서도 유언장에 첨부하리라. 남길 말이 또 늘어났다. ▣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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