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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희곡작가 ‘지망생’인 나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시급제 예술 강사로 일하며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예술 분야 학부…취업률은 묻지 마세요

 

연극영화학부에서 극작을 전공, 육 년 동안 다녔다. 우스갯소리로 ‘군대 다녀왔냐’는 말을 듣곤 한다. 일, 이학년 때는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삼, 사학년 때는 공연을 열심히 했다. 뭘 육 년씩이나 다녔나 돌이켜보면, 삼 년을 내리 다니다가 휴학하고 놀까 했는데 중간에 아파서 더 쉬었다. 그 외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작업을 했다.

 

졸업하니 스물 여덟 살이었다. 올해엔 스물 아홉 살이 되었다. 흔히들 아홉수네, 하고는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는 나이다.

 

중학 시절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시인 이상을 참 좋아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다 못해 그처럼 살고 싶었다. 건축을 전공하려 이과를 택했다. 땡땡이도 안치고 열공하여 내신 관리를 했다. 스무 살을 맞이하며 얻은 입시의 산물은 수시, 수능 망함이었다. 노렸던 학교에 떨어졌다. 때마침 몸이 아팠다. 졸업식도 못 갔다. 일 년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요양했다. 그 동안 못했던 PC게임도 하고 진로 고민도 했다.

 

결론은, 미래에 대한 고민은 정말 쓸데없다는 것.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부업으로 예술 하려던 꿈’을 접고 그냥 예술 하기로 했다.

 

전공 동기들은 10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마도?) 졸업해 다양한 현재를 살고 있다. 작가로 데뷔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대기업에 가거나, 전공 강사가 되거나, 다른 분야로 취업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실종됐거나, 작가지망생이거나.

 

과거 우리 학부는 폐과의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취업률 0퍼센트를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예술 분야의 특성상 정규직이라는 건 보편적이지 않다. 선배들을 보아도 정규직으로 작업하는 분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알지 못하고, 대부분 작업을 위한 서브-잡을 병행했다. 현재 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예술 강의를 하는 동시에 작가지망생이다.

 

주1회 6개월 단위로 일하는 ‘예술 강사’가 되다
 

▲ 나는 매주 토요일, 1년에 6개월 정도 일하는 예술 강사이다.   © 아니
 

졸업 직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하는 예술교육사업에 지원해 예술 강사로 취업했다. 취업이라는 단어를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내가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한 해에 한 번 강사를 모집한다. 재계약이나 갱신을 하는 게 아니라 일 년마다 완전히 새로 뽑는다. 일년살이 벌레가 있다면 그의 목숨은 나보다 조금 낫다. 나는 일 년 동안 육 개월 정도 일한다.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하는 체험과 과정 중심의 예술융합 문학놀이 수업으로, 지원 동기는 예술 교육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돕자!는 원대한 꿈  같은 게 있었다…고 쓰고 싶다만, 그건 거짓말이다. 심지어 학교 다니면서 교직 이수를 할 생각도 안 했었다. 왜냐면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선생님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나를 지나쳤던 수많은 별로인 선생들처럼, 나 역시 별 수 없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별다른 기술 없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벗어나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다. 또한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고 그 외의 시간에 내 작업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큰 매력이었다. 최저시급 근처를 맴도는 아르바이트만 해오던 나에겐 강의 시급도 세다고 느껴졌다. (물론, 일을 시작한 이후엔 시급을 더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0년째 동결이라니!)

 

서류, 면접, 워크숍, 시연 평가를 거쳐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충청도의 한 도서관이었다. 집은 서울인데 일은 충청도라니! 지도를 보며 멘붕했던 당시가 떠오른다. 그래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였다. 안 그러면, 뭐 어찌하겠나. 그렇게 난생 처음 충청도에 갔다.

 

수업 전날까지도 내리 준비만 했다.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선생님 캐릭터를 설정했다. 그것은 내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선생님 모델을 적극 반영한 것이었다. 밝고 긍정적이며 에너지 넘치고 방긋 웃어주는, 어렴풋한 ‘무언가’였다. 수업 대본을 만들어 외우고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시연도 해봤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 앞에는 진짜 어린이가 없었다. 대학 때 농활에서 만났던 동네 아이 몇이 말을 섞어본 마지막 아이였다. 그렇다. 나는 부모님, 나, 동생의 4인 가족 체제에서 자랐으며, 동네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도시의 흔하디 흔한 20대였던 것이다. 준비한 수업이 과연 아이들에게 맞을까, 걱정과 긴장으로 밤을 새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일을 한다는 것

 

“어린이 여러부운~ 만나서 반가워요~^^” 


▲  대부분의 아이들은 글쓰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여러 어린이들을 만나본 결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글쓰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놀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휩쓸렸다. 정신줄의 끄트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진도 나가야 돼! 글 써야 돼!’를 되뇌었다. “얘들아, 한 줄만 더 쓰자~”를 외치며 분열되어가는 나만의 선생 캐릭터를 느꼈다. 그렇게 거의 탈진 상태로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수업 일지인지 반성문인지 모를 글을 쓰고 수업 사진, 영상, 그리고 아이들의 작품을 확인하며 다음주에는 꼭 더 나은 수업을 하겠다고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순간 벅찬 일이 되었다. 일주일 내내 수업을 준비해도 막상 수업에서 발휘하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컸다. 고민한 결과, 애초에 설정했던 선생 캐릭터가 나와는 영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만들어진 ‘선생’이라는 작자는 내게 극악의 수업 난이도와 감정 노동을 요구했다. 그렇다. 아이들도, 심지어 나 자신도 소외시켰던 것이다. 선생답다 생각되는 선생을 연기하려 들었었다. 그런다고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선생질 잘 하나 못 하나 평가할 것도 없이, 곧장 수업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만나야 했다. 그렇게 수십 번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좋아하는 수업 진행방식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방해하거나 싸우는 아이 대처법도 생겼다. 가령, 글쓰기 싫다고 할 땐 왜 싫은지 써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종이 한 가득 써 낸다. 거기엔 아이가 가진 고민이 들어있다. (물론 아이에 따라 다르다.)

 

아이들과 룰을 합의할 것, 기본적인 기대치는 갖되 제시할 뿐 요구하지 말 것, 기다려주기, 섬세하게 칭찬하기 등 몇 가지가 놀이판을 만들어준다. 함께 만든 판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상당히 즐겁다. 무엇보다도 과정 속에서 아이가 서서히 마음을 여는 모습을 지켜볼 때 행복하다. 선생님이라고 불리지만 매번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참 많다.

 

이 글에서의 낭만적인 부분은 이 정도이다. 사실, 아이들은 망아지마냥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뒤통수를 깨먹고는 피를 흘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공부 스트레스로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 채로 앉아있기도 하며,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무의미한 신경전을 선포하기도 한다. 마음에 상처가 났지만 어디를 다쳤는지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몰라 무작정 화를 내기도 하고, 주의력 결핍인 아이도 있다.

 

보조 선생님과 함께하지만 매 순간 아슬아슬하다. 더 나은 수업을 해보려 교육 워크숍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참여하고, 다른 강사들의 수업도 유심히 관찰한다. 심지어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도 공부했다. 운전면허를 제외하고 내가 가진 유일한 국가 공인 자격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장 잔고의 의미 


▲ “예전엔 몰랐는데, 나는 아이들을 참 좋아한다. 다만 선생님으로 사는 건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 프로그램은 한 과정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 발표회를 연다. 발표회는 수업의 최종 결과물 중 하나다. 담당자마다 발표회 준비 요구치가 다르다. 속된 말로 빡세게 준비하는 곳도 있는데 학생과 강사 모두 힘들어 보였다. 과정 중심의 교육과정에 멋들어진 결과를 내놓으라니, 이런 모순이 없다.

 

내가 일했던 도서관은 담당자가 강사의 의견을 먼저 물어봐 아이들과 자유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자유로웠다고는 하나 준비하는 데 며칠 밤을 샜다. 도서관이 멀기에 발표회 전날 내려가 준비를 하고 모텔에서 1박 후 발표회를 진행했다. 순전히 내가 계획한 것인데 그리 됐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이것저것 시도해본 탓이다.

 

학부모들을 초대하고 아이들과 그 동안의 결과를 나눴다. 끝까지 소감 발표하기 싫다고 때를 쓰던 몇몇 학생들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모아 만든 문집을 나눠 주었다. 발표회를 무사히 마치고 한 학부모가 말했다. “이 수업을 지지하고 있어요.” 그렇게 충청도의 사계절을 맛보았다.

 

올해는 예술 강사 정원이 반 토막 났고 지원자는 늘어 경쟁이 심했다. 면접을 본 후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무일푼의 삶은 무엇일까 상상해 보았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장은 자존감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돈이 없다면, 어떤 삶이 펼쳐질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굶어 죽진 않을 것 같은데 심신이 불편해질 게 분명했다. 아득해졌다. 겨울 동안 했던 아르바이트를 다시 할 수 있을까? 우울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진짜 자존감이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지금은 인천에서 일하고 있다. 수업 가기 전날은 긴장이 되어 잠이 안 온다. 2년차인 나는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나는 언제 희곡작가로 데뷔를 하게 될까?

 

이것이 내가 일주일 중 하루, 일하는 날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날에는 수업 준비를 하고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한다. 글을 쓰거나 합창단 활동도 하고, 수업을 듣기도 하며, 공연을 보거나 극단 연습실에 간다. 얼마 전 친구들과 만든 극단 이름으로 대학로에서 공연을 올렸다. 공연을 올리려면 돈이 필요하다. 다행히 지원금을 받았다. 돈을 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받지도 않았다. 모두가 그랬다.

 

지금까지 했던 작업들은 터무니없는 액수지만 보수를 줬던 작업, 주겠다고 했는데 못 받은 작업, 보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한 작업 등이었다. 보수가 적거나 없는 작업은 돈을 쓰는 작업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작업하는 데에 번 돈을 쓰곤 한다. 광대가 재주부려 극장주(다른 이름으로 ‘건물주’)가 돈 버는 이상한 구조를 비롯해, 다양한 이유들로 연극해서 밥 먹기는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연극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렇지 않다.

 

아홉수가 되니 주변에서 비슷비슷한 말을 듣는다. ‘그거 돈 되니?’, ‘결혼할 때 다 됐네’, ‘취업의 막차를 타라!’ 혹은 ‘늦었다.’

 

졸업과 동시에 데뷔를 하고 작품을 쏟아내는 삶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바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졸업 2년차 스물아홉, 여전히 희곡작가 ‘지망생’인 나는 언제 정식 데뷔를 하게 될까? 작가가 되는 것도 선생이 되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작가라는 이름은 누가 붙여주는 거지? 학생이 내게로 와 선생이 되었으니, 공연 보러 올 관객이 있으면 작가일까.

 

다만 일전에 범했던 실수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상처럼 군다고 이상이 되지 않듯, 선생다운 것이 선생을 만들지 않듯, 작가다운 것으로는 작가가 되지 않는다. 일단은, 내가 이름 불러 보련다. 얘, 작가야. 이 작가야. (술집 같네…)

 

이 길 끝엔 무언가 있겠지 - 나의 걷기
 

작업으로 소고기 먹을 수 있다면 교육은 그만둬야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얘기한다. 오롯이 작업만 하고 싶으니까. 교육이 싫은 건 아니다. 예술놀이 교육과 작업을 어떻게 하면 섞을까 고민하고 있다. 게다가, 예전엔 몰랐는데, 나는 아이들을 참 좋아한다. 다만 선생님으로 사는 건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렇게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선생님’ 소리를 듣다가 어느 날, 완전히 매료되어 모든 걸 접고 교육에만 전념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진로로 방향을 급선회를 할 수도 있겠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내일 죽을 수도 있지만 산다면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아직은 번 돈으로 버틸 수 있다. 내년에 채용되지 못한다면 힘든 나날을 보낼 수도 있겠다. 다른 일은 뭘 하면 좋을까. 작업은 계속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못 보면 어떡하지.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아이들이 나오는 희곡을 쓸 수도 있겠지- 여러 가지 생각을 시작해 놓는다.

 

어쨌든, 내년 일이니까 차차 고민하기로 하고 지금은 다가올 토요일 수업에 집중하기로 한다. 작업을 하고 매주 수업을 하다 보니 삶의 리듬은 자연스레 정해졌다. 

 

“그런 짓을 할 필요도 있지 않나요, 지름길로 가기 위해 아주 먼 길을 돌아가는 짓이요.”

- E.올비 <동물원 이야기>

 

길 끝에는 무엇이 있나. 내가 그토록 되고 싶어하는 ‘나’가 있을까, 아니면 주변사람들이 바라는 ‘나’일까. 아마 나와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걸어온 길을 똑같이 걸은 사람은 없다. 계속 걸어보기로 한다. 천천히 가는 게 마음에 든다면 그렇게 걸었으면 좋겠다. 근처의 백 명이 뛰기 시작했다고 덩달아 뛰지 않길 바란다. 걷다가 쉴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걸었던 그 길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 그렇게 걷다 보면 길의 맨 끝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엔 현재의 내가 있다. 삶은 계속된다.  ▣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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