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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이 마을을 되살려준다
<꿈이 있는 인터뷰> 사진작가 혜영이 꿈꾸는 ‘그 다음의 길’  

 

 

성별, 나이, 학벌…“차별은 늘 느꼈어요” 

 

▲  사진작가 혜영(35)   © 안미선 
 

한 여자아이가 살았다. 개울이 흐르는 북한산 자락 바로 아래에 집이 있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물장구를 치고 밤에도 잠옷 바람으로 뛰어 놀았다. 읍내에 가서 떡볶이를 사먹으면 큰일을 해낸 것 같아 뿌듯했다. 가난했지만, 풍요로웠다. 혜영(35세)은 그렇게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만난 친구들은 다들 영화를 좋아했다. 그때 <키노> 잡지가 유행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원서를 사서 함께 돌려보기도 했다. 사진을 보는 게 즐거워서 사진을 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돈 많이 못 벌고 힘들 거야’라는 생각도 같이 했다.

 

“입시 실패하고 대학교에 바로 안 갔어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지냈어요. 그때 길을 가다가 종로에 있는 건물에 사진학원 현수막이 붙은 걸 보았어요. 학원비는 아르바이트로 벌면 되니까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들어갔어요. 첫 날 수업에 온 수강생은 달랑 저 혼자였어요. 그런데 사진작가 선생님이 저를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그때 필름 인화 작업 하던 때라 암실을 운영하는 곳을 찾아 다니며 작업했어요.

 

혼자 작업 하다가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졌어요. 이걸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은 거예요. 사진을 같이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울역에 있는 입시 단과 학원에 갔어요. 매시간 칠판을 지워주면 학원을 공짜로 다닐 수 있거든요. 수능을 보고 스물다섯 살에 대학교 사진영상학과에 입학한 거죠.”

 

대학 현실은 꿈꾸는 것과는 달랐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사진이 너무 좋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 밤을 새면서 작업했다. 졸업 때 즈음에 회의가 생겼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취업이 잘 될 줄 알았는데, 남학생들의 취업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여학생들이 취업되어 가는 곳은 베이비스튜디오 같은 곳이었다.

 

교수님이 추천한 스튜디오에 가보니 처음으로 참여한 외부작업에서 오육십 명의 남자스텝 중에 유일하게 자신만 여자 직원이었다. 영상 촬영 현장에서 실장을 보조하면서 스틸촬영팀으로 합류했는데 실장은 여자인 혜영에게 남자스텝들의 ‘장점’을 거론했다. 그녀는 질문하고 문제 제기를 했지만 계속 비교당하고 ‘싸가지 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다.

 

“차별은 늘 느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때에도 뭔가 하고 싶을 때 선별하는 기준이 대학생이어야 한다는 것에 학력적인 소외감을 느꼈죠. 사진을 배울 땐 ‘너 돈 많아?’ ‘술 잘 마셔?’ 하는 질문을 늘 받았어요. 사진은 돈이 많거나, 남자들 있는 판이니까 술을 잘 먹어야 한다는 거죠. 학업은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교수님들이 취직은 남학생들을 우선으로 시켰어요. 졸업하고 다시 미술관에 취업했는데, 나이는 적지 않고 학교도 좋은 학교 아니니까 차별이 만연되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죠. 대우받는 스펙들이 없을 때 차별 받는구나, 늘 느꼈어요.”

 

‘나는 어떤 사진 작업을 하고 싶은가’

  

▲ 한국여성민우회 단행본 <뚱뚱해서 죄송합니까?> 사진 작업. 2013.  © 혜영 
 

미술관에서 일했지만 자신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월급과 대우가 차별적이었다. 그때그때 잘 넘기려고 애썼지만 허전함을 메울 수 없었다. 그래서 개인 작업을 계속했다. 독립예술단체나 여성사진작가 공모전에 지원하고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 여성단체의 사진 전시 큐레이팅 작업을 만났다. ‘장애여성공감’의 연극팀 <춤추는 허리> 공연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때 본 공연을 잊을 수 없었다.

 

“<춤추는 허리>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배우들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며 느린 호흡의 창작과정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작품들인데 그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나 사회를 향한 질문이 날카롭게 들어 있어서 많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연이었어요. 그런 활동을 같이 한다는 것이 뿌듯했어요.

 

차츰 여성주의에 관심이 생긴 거예요. 지인의 권유로 여성단체에 회원가입을 했어요. 여성주의를 듣고 얘기하는 게 처음이었어요. 모임에서 여성학 책을 읽고 주제별로 이야기해본 경험도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 감정을 언어로 드러낼 수 있고, 얘기하면 공감이 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 인연들로 혜영은 <뚱뚱해서 죄송합니까?>(한국여성민우회 지음, 후마니타스, 2013) 단행본에서 사진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교감을 확인하며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의미와 의지를 사진으로 표현해 내었어요. 그 가치를 짚어 볼 수 있는 기회였지요. 제가 앞으로 어떤 사진작업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사진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하고 다른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되기도 했고요.”

 

여성주의와 예술, 그리고 마을을 잇기

 

그동안 은평은 개발을 명목으로 변하고 있었다. 급격히 바뀌는 모습에 상실감을 느꼈다. 그 변화를 보고 싶지 않았고 마음이 몹시 힘들었다. 서울에서도 집성촌인 자기 동네는 가부장적인 동네여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고생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한편 자신의 감수성을 길러준 자연과 이웃들이 있는 곳이었다. 혜영은 작업 겸 일 년 정도 제주도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개발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모든 기억과 관계가 있는 서울을 완전히 떠날 수 없었다.

 

혜영은 고향인 은평의 집들이 비어가는 것을 보면서 사진 기록을 했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 허물어져가고 사람들이 떠나갈 때 그 상실감이 컸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유배된 공간, 유보된 시간 (2013. 경기도 지축동과 은평 뉴타운 사이)    © 혜영 

 

혜영은 ‘여성주의’와 함께 ‘예술 교육’을 말했다. 문화예술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관련 수업을 듣고 오랫동안 준비를 해온 터였다.

 

“제주도에 있을 때 인턴 교사 일을 했어요. 제주도도 다 관광객 위주로 상업화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갈 곳이나 문화적 여건이 부족하거든요. 그 아이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놀 수 있으면 좋겠다, 지속적으로 즐겁게 내가 사람들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예술교육인 것 같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죠. 서울의 중학교에도 교육을 나가서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사진 작업을 해보았어요. 아이들이 다양한 상자 모양을 그려놓고 ‘니 몸의 크기가 어떻든 우린 너를 안아줄 수 있어.’라고 쓰더군요. 재미있고 좋았어요.

 

예술 교육이란 게 일상화되어야 해요. 특별한 시간을 내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요구가 문화예술로 접근될 수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할 수 있게.”

 

혜영은 은평에서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진교육을 올해부터 시작했다.

 

“저는 은평에서 나고 자란 향수가 많고 애정도 많아요. 은평 주민들은 부자가 아니고 고만고만하게 그동안 큰 변화 없이 살았어요. 그런데 짧은 순간에 폭력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진 데 대한 상처와 상실감이 커요. 마음을 달랠 겨를도 없이 개발현장을 목격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풀어낼 자리가 필요해요.

 

마을에서 사진 작업을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이나 똑딱이(콤팩트) 카메라로 주민들이 직접 마을을 촬영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 이야기를 담게 되고 우는 분도 계시고. 사진의 역할에 이런 것이 있는 거예요.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공감이 있고 자신을 내어놓은 방식으로 사진이 아주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어요. 이것으로 소통하고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어요.”

                                        ▲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 (2010, 지역기록)    © 혜영  

 

길은 춤추며 만들어진다

 

혜영은 인터뷰 전에 아직도 자신의 길을 잘 못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혜영은 즉흥춤을 추듯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무엇보다 진솔하게 길들을 만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할 수 있는 일, 공감할 수 있고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온 것이다. 지금 생계를 위해 공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남성 중심적인 조직에서, 불안한 고용 상태에서 남들처럼 고민하고 때때로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길을 찾아 계속 춤추며 나아간다.

 

“살면서 그랬어요. 난 적응 못 하는 사람인가? 내가 사회에 적응을 못 하나? 하지만 나쁘게 살지 않고 괜찮게 살았고 다를 수 있는 거고 대부분 사람들이 적응하는 그게 아닌 걸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해요. 남자들 판에 끼려고 애쓰기보다는 대신 내가 지지 받을 수 있고 온전히 나로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어요. 내 커뮤니티를.

 

그리고 사진 예술 교육을 할 땐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단상을 꺼내놓으면서 다들 수많은 자기 이야기를 하게 돼요. 그게 하나하나 만나면서 조각들이 전체의 그림으로 되어가는 것을 느껴요. 내가 그걸 돕고 있구나, 약간의 자극을 주고 있구나 생각하면 되게 즐겁고 보람되고 내가 원하는 다음 상을 생각하게 되니까 좋아요.”

 

혜영은 웃었다. 나는 그이가 원하는 다음 상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전 여성주의 사진이 뭔지 정확히 몰라요. 하지만 그런 사진을 마을에서 하고 싶어요. 상을 그려본다면 마을 안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어느 대상이라도 같이 만나서 사진을 가지고 놀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늘어놓을 수 있는 쉼터 같은 장소예요. 그런 일에 내 역할을 하고 싶고 누구든지 와서 자기 사진을 담아가고 카메라를 가지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마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얘기하다 보니 정리되는 것도 같다며 혜영은 특유의 큰소리로 웃었다. 인터뷰 중 가끔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고 내 손과 스친 손이 따뜻하기도 했다.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아이가 조금씩 자라났다. 기억을 마음에 품고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사방에는 온통 떠나고 허물어지는 것들이 있었고, 그 굉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기웃거리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걸어왔다. 때로 고개를 흔들고 때로 끄덕이며 샛길을 두려워 않고 자신의 길을 타박타박 그려나갔다. 이제 그 길목에서 함께 살아온 이웃들과 하나 둘씩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다. 제각기 손바닥에 놓인 사진 한 장씩을 펴 보이는데 그것은 손금처럼 깊고 짙고 펄떡이는 이야기였다.

 

문득 멈춰 선 그녀는 사진과 사진을 이어주는 온기를 꿈꾼다. 빈 집들이 기억의 곳간이 되고 열심히 살아온 차곡차곡한 걸음들이 지나온 길 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춤출 수 있게. ▣ 안미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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