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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도, 죽음의 승리, 죽음의 기술
<이경신의 죽음연습> 유럽의 ‘죽음예술’을 들여다보며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이! 갑자기 원무를 춤추다 말고

서로 밀치며 도망가네. 닭이 울었군.

오, 불쌍한 군중을 위한 아름다운 밤이여!

죽음과 평등이여, 만세!”

-앙리 카잘리(Henri Cazalis, 1840-1909)의 시 “평등-형제애” 중에서

 

프랑스 음악가 카미유 생-상(Camille Saint-Saëns, 1835-1921)은 1874년 앙리 카잘리의 시를 가지고 교향시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opus 40)라는 곡을 지었다. 이 교향시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자정이 되자 사탄이 무도회를 열고 죽음이 나타나 바이올린을 조율한다. 처음에는 원무가 슬그머니 시작되다가 점차 활기를 띤다. 진정되는 듯하더니 다시 격렬해진다. 첫 닭이 울 때까지 격렬한 춤이 이어진다. 동이 트면서 광란의 무도회도 끝이 난다.

 

카미유 생-상의 ‘죽음의 무도’ 감상하기  http://bit.ly/1JwHGC6

 

이처럼 ‘춤추는 죽음’을 표현하는 ‘죽음의 무도’라는 주제가 19세기 음악의 영역까지 확장되었지만, 사실 그림이나 텍스트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독일 예술사학자 울리 분덜리히는 <메멘토 모리의 세계>(길, 2008)에서 분석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죽음의 무도’

 

특히 내 관심을 끈 ‘죽음의 무도’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에서 유행했던 마카브르 예술(l’art macabre, 죽음예술)에 속하는 묘지 장식화이다. 이 ‘죽음의 무도’는 납골당의 벽, 교회 예배당의 천정 아래 회랑의 기둥머리를 덮고 있던 부분, 묘지 담장에 그려졌다. 

 

▲  15세기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케르마리아 예배당의 '죽음의 무도' 일부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케르마리아(Kermaria) 예배당 안에서 전형적인 ‘죽음의 무도’ 프레스코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15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에는 교황, 황제, 추기경, 왕, 총대주교, 총사령관, 대주교, 기사, 주교, 시종, 사제, 대법관, 점성가, 샤르트르회 수도사, 중사, 의사, 여자, 고리대금업자, 가난뱅이, 연인, 깽깽이연주자, 노동자,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아이가 당시의 위계 질서에 따라 차례로 그려져 있다. 이 사람들 사이에 죽음을 나타내는 미라가 자리잡고 있다.

 

“죽음의 무도란 죽은 자와 산 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끝이 없는 원무를 말한다. 죽은 자들이 이 게임을 주도하며 이들만이 춤을 춘다. 벌거벗고 부패되고 성별을 알 수 없지만 활기 넘치는 미라 하나와, 각자 신분에 따라 옷을 갖춰 입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자 혹은 여자가 한 쌍을 이룬다. 죽음은 산 자에게 손을 뻗쳐 그를 끌고 가려 하지만, 그는 아직 말을 듣지 않는다.”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에 선 인간>(새물결, 2004) 중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묘사한 ‘죽음의 무도’와 케르마리아 예배당의 ‘죽음의 무도’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죽음은 춤추듯 몸을 움직이는 데 반해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 굳어 있다. 다들 죽음이 이끄는 춤을 억지로 추며 원치 않는 죽음을 맞기 때문이리라. 죽음 앞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 따위는 아무 소용없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모두 누구나 죽는다. 앙리 카잘리의 시 마지막 구절대로,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결국 ‘죽음의 무도’가 주는 메시지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 구절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뜻한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니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것이다.

 

집단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 ‘죽음의 승리’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무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또는 조금 앞서서 ‘죽음의 승리’라는 주제가 등장했다고 한다. 유럽의 중세 말에 수많은 사람이 기근, 전쟁,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거침없이 목숨을 거두어가는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사람들은 성서의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지옥)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네 명의 기사들)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전염병)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요한계시록 6장 8절

 

울리 분덜리히는 요한계시록 6장 8절에 나오는 전쟁, 기근, 전염병, 짐승의 기사들이 바로 ‘죽음의 승리’란 테마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   피터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1562-1563) 일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피터 브뤼겔(Pieter Brueghel(Bruegel) de Oude, 1525-1569)의 ‘죽음의 승리’(1562-1563)라는 작품을 본 기억이 난다. 그림 아래 부분에 죽음에 직면한 황제와 추기경, 죽음에게 목이 잘리는 순례자, 도망치는 광대복장의 도박꾼, 저항하는 기사, 걱정근심 없어 보이는 연인이 보인다. ‘죽음의 무도’에서처럼 누구나 죽는다는 ‘죽음의 보편성’의 주제가 이 작품에도 담겨있다.

 

그런데 ‘죽음의 무도’에서는 죽음이 한 사람씩 손잡고 춤추며 사람들을 이끌고 가지만, ‘죽음의 승리’에서 죽음은 살인, 전쟁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뼈만 남은 해골로 표현된 죽음은 광포하게 사람들을 덮친다. 죽음은 낫뿐만 아니라 칼, 도끼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하고, 그물을 치며 수레를 끌고 떼 지어 한꺼번에 목숨을 거두러 온다. 화면 전체의 분위기는 음울하고 무겁고 종말론적이다.

 

떼지어 몰려드는 해골부대와 희망 없이 도주하는 인간 무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분명 죽음의 완승을 부인할 수 없다. 피터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는 사람들이 갑작스런, 집단적인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감을 생생히 전달해준다. 14세기 중반 이래 18세기 중반까지 수 차례 반복해서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 인구의 3분의 1은 족히 앗아갔다고 평가하는 페스트, 이 끔찍한 전염병을 겪은 유럽인은 세상의 종말이 온 듯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 분명하다.

 

영국 역사학자 필립 지글러는 자신의 저서 <흑사병>(한길historia, 2004)에서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인한 충격보다 더 격렬한 것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병의 원인도 치료법도 알지 못한 채, 엉터리 처방과 종교적 기적에 매달리거나 우왕좌왕 도주하거나 죽은 다음이라도 구원받기 위해 기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가족, 친구, 이웃이 차례차례 죽어가는 동안에도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죽음은 거침없이 목숨을 거두어갔다. 전 주민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어, 마을 자체가 송두리째 없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문했을지 모른다. “세상의 종말이 온 걸까? 천벌을 받은 걸까?”

 

사후 삶을 위한 ‘아르스 모리엔디’

 

▲ 울리 분덜리히 <메멘토 모리의 세계>(길, 2008) 표지 이미지 
 

로마서 6장 24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에 의거할 때, 성서적 의미에서 ‘인간의 죽음’은 하느님의 계율을 어긴 대가인 천벌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문화 속에서 죽음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죄값이다. 14세기 유럽인들은 ‘죽음의 무도’를 보면서도 나쁜 짓을 해서 페스트라는 천벌이 내려졌다고 믿었다 한다.

 

중세 교회가 이용한 ‘죽음의 무도’는 모든 사람은 죽을 운명이라는 인간의 필멸성을 알리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다음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울리 분덜리히는 ‘죽음의 무도’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넘어 내세의 삶을 염두에 두도록 했다는 점에서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 즉 ‘죽음의 기술’과 만난다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지만 사후 심판을 대비해서 죽음은 준비할 수 있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잘 죽는 법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후에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법, 즉 천국에 가는 법이다.

 

필립 아리에스에 의하면 14, 15세기 유럽인들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보다는 심판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이들은 육신이 죽고 난 후 영혼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즉 영혼이 영원히 구원받아 천국에서 편히 지내게 될지,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지 염려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죽음이 개개인의 목숨을 거둘 때,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천사는 영혼을 하늘로, 악마는 지옥으로 데려 가려고 다투는데,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 직후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사후 심판을 잘 통과하는 것이 큰 관심사였고 죽음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렇다면, 잘 죽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아르스 비벤디’(Ars vivendi), 즉 잘 사는 법과 다르지 않다. 현세에서 잘 사는 법이 내세에서 잘 사는 법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따르자면, 현세에서 잘 사는 법이란 종교적 규율을 실천하면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페스트를 천형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과연 ‘죽음의 무도’의 교훈을 따르려고 애쓰면서 ‘아르스 모리엔디’를 실천했을까?

 

페스트 이후 삶의 집착은 과도해지고…

 

아리에스는 중세 말부터 오히려 ‘가진 것’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한다. 죽어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대한 과도한 애착을 드러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웃이 파괴되는 것을 본다면… 더욱 겸손해지고 덕을 쌓아 가톨릭교도가 되리라고 여겨졌다. 아마도 사람들은 죄악에 벗어나 서로 사랑과 자선을 베풀리라. 그러나 페스트가 끝나자마자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구가 줄어들고 유산으로 부자가 되자 이들은 과거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양 망각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수치스럽고 무질서한 삶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무위도식하면서 타락하여 진탕 탐욕에 취해 축제를 즐기고 선술집에서 퍼 마시고 진수성찬에 탐닉했다. 위험과 호색에 다시 빠져 기이하고 낯선 패션을 만들고 상스러운 옷을 걸쳤다.” -피렌체 역사학자 마테오 빌라니의 글, 필립 지글러의 <흑사병>에서 재인용.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흑사병 이후 유럽인들은 페스트가 인간의 죄를 응징하기 위한 신의 처벌이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치지 않으면 신이 다시 벌을 내릴 것이라고 믿었음에도 오히려 도덕적으로 더 타락해갔다고 한다. 돈을 추구하고 범죄율이 높아지고 신성모독이 만연하고 성윤리가 무너지고 예의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하고 사후 삶을 걱정하면서도 현세의 향락, 탐욕과 사치, 방종을 멀리하지 못했다.

 

14세기의 페스트 이후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현세를 중시하는 세속화 경향이 두드러지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회는 죽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로서 ‘죽음의 무도’를 이용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신의 심판으로 떨게 만들고 영혼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중세식의 ‘죽음의 무도’는 사라진다. 죽음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인 천벌이 아니다. 급기야 19세기가 되면 ‘죽음의 무도’는 인형극의 ‘유령의 춤’과 같이 희화화되어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정치적 여론몰이에 이용되었다.

 

19세기 말 생-상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는 애호가들을 위한 19세기 영국 일러스트레이션 화보집에 나오는 ‘공동묘지에서 사자들이 추는 윤무’와 다르지 않다. 해골들이 묘지에서 추는 춤에서 사람들은 더는 내세의 불안과 사후의 심판을 고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춤추는 사자들을 모습은 앙리 카잘리의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평등과 형제애’라는 정치적 이상의 재미난 비유로 보인다. 이제 ‘죽음의 무도’는 죽음을 조롱하며 죽음의 불안을 걷어내고 현세의 삶에, 삶의 향락에 집중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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