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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할머니들의 마을
<이 언니의 귀촌> 정읍서 딸기잼과 토종생강차 만드는 황미경③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귀농한 지 6년이 되어간다. 기술 없고 돈 없고 연고도 없는 여자가 딸과 함께 정착하기까지 참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웃마을에 먼저 귀농한 분들은 연고 없는 내게 지역의 연고가 되어주었다. 누구보다 마을의 할머니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앞으로 내 삶도, 꿈도 이분들에게서 본다. 며칠 전 복날 마을회관서 삼계탕을 먹는데 한 할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제 마을 사람 다 됐네!”
▲ 말복에 마을회관. 마을 분들이 모두 모여 삼계탕, 닭볶음, 닭죽까지! “시골은 할머니들이 지킨다!”(다큐멘터리 <땅의 여자> 중에서) © 황미경
“이 집에 남자 없어?”
이삿짐을 막 부리는 왁자한 시간. 돕기 위해 같이 내려온 친구들과 이웃마을 귀농인분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사이, 마을 할머니들이 와서 물어보셨다.
“이 집 남자 없어?”
“네,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지켜주셔야죠.”
이렇게 시작된 내 소개는 마을에 일파만파로 퍼졌고, 급기야 이틀 후 한 할머니가 우리집에 찾아오시기에 이르렀다.
“야! 너 제정신이냐?”
“네?”
“시골에서 여자가 남자 없이 산다면 얼마나 무시하는데! 너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래?”
“아, 네.”
“내가 알아서 다 정리해놨어! 이 집 애기가 아토피라서 시골학교로 온 거고. 남편은 키도 크고 인물도 좋은데, 내가 다녀가는 걸 봤다고 했어! 그니까 남들이 물으면 그렇다고 해! 알았지?”
“네….”
그 날 이후 난 할머니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할머니 말씀대로 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 할머니들이 물으시면 ‘애 아빠는(남편이 아닌) 멀리 어느 도시에 일 다니고 있다(사실이니까)’고 하고, 언제 다녀갔냐고 물으면 대충 얼버무리며 웃어버리고 말고….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이사 첫 날 나에게 직접 이혼했다는 말을 들으셨지만 사실이 헷갈리는 할머니는 어느 날 나를 찾아오셨다. “나한테는 괜찮아, 사실대로 말해도 돼”라고 말하며 물으셨고. “네, 할머니 저 이혼했어요”라고 말씀 드렸다. 할머니는 알겠다는 식으로, 그리고 더는 묻지 않겠다는 뜻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남자 조심해. 문단속 잘하고” 하며 걱정해주셨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할머니들 대부분은 알아서, 눈치로, ‘마을 할머니가 나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거니’ 하고 넘어가주시는 분위기였다.
이외에도 내 일거수일투족은 한동안 마을 초미의 관심사였다. 첫 번째, 남자가 있냐 없냐를 두고 할머니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두 번째, 내가 뭘 해서 먹고 살 거냐가 관심이었다.
어느 날 마을 한 할머니를 아이의 학교 운동장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제 하우스 가서 일했다며? OO네서 일하지? 내가 다 알아!”
우리 집 이사를 도와주셨던 옆 마을 귀농인 댁에 가서 일을 좀 도와드리고 받은 하우스 상추를 전날 마을회관에 두고 왔는데, 그걸 두고 넘겨짚으신 모양이다. 일을 한 건 맞지만 돈 받으며 하는 일은 아닌지라 어찌 말할까 머뭇거리는 사이,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에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젊을 땐 그렇게 가리지 않고 일하는 거야! 시골에서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부자는 안 돼도 다 먹고 살 수는 있어!”
이렇게 독려까지 하시니 더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또 어느 할머니는 “학교에서 일 할 거라며? 교장선생님이 그러시던데?” 혹은 “학교 선생님이라며?” 물으셨다. 아무래도 아이 학교 교장선생님이 할머니들이 물어보시면 뭔가 일을 내게 권할 생각이라고 말씀하신 걸 두고 그렇게 이해하신 모양이다. 궁금증이 큰 만큼 할머니들의 넘겨짚음은 급하게 앞질러 가있곤 했다.
“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할머니?”
▲ 가뭄 때문인지 우리 밭에 들깨가 싹을 다 틔우지 못했다. 할머니는 당신 밭 모종을 옮겨 심으라 하고도 양이 모자랄까 걱정이 되셨나 보다. OO집 모종을 그 집 할머니랑 같이 한 양동이 뽑아다 마당에 두고 가셨다. © 황미경
이런 궁금함 이외에도 우리 집 마당을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도 할머니들의 관심사이자 일거리였다. 길을 지나다가도 마당에 내가 있으면 들어와서 꼭 말을 붙이셨다.
이 집 빨래는 이쪽에 널어야 잘 말라.
이 나무 가지 쳐야지.
이 옻나무는 그냥 뽑는 게 어때? 얘들 옻 옮아!
그건 그렇게 심는 게 아니야!
마당에 풀 메야지.
(심지어) 새댁 머리는 파마를 하는 게 좋겠어!(까지)
난 이럴 때면 은사님의 충고를 따랐다.
“미경아, 동네 할머니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시면 ‘할머니 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이래. 그러면 할머니들이 알아서 막 해주셔. 그 다음 해에 또 그러시면 ‘할머니 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라고 그래. 그럼 작년에 가르쳐주신 거 잊어버리시고 또 막 해주시거든. 그렇게 해주시는 거 받으면 돼.”
이야기인 즉, “네”하는 마음으로 받으라는 말씀이었다.
어느 날 마당에 무화과 나무를 두고, 지나던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이거 가지 쳐야 해,”
“네, 할머니 저 근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이거 치고 이거 치고 이렇게 해야 해.”
내가 가닥을 못 잡고 멍하게 듣고 있자, 지나던 또 다른 할머니가 오셔서 말씀하신다.
“아니야, 이건 이렇게 치고 이렇게 쳐야지.”
그러자 또 지나던 아저씨가 “내가 전지가위 가지고 올게.” 이러시더니 할머니들 지휘에 맞추어, 또 아저씨 소신에 맞추어 싹둑싹둑 가지치기를 시작하시는 거였다.
‘우와~~ 진짜네! 진짜 막 해주시네!’
순식간에 빈집에서 몇 년간 방치된 무화과나무 가지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감사합니다!”
난 기뻐 인사하였으며, 이분들은 평소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는 듯 뿌듯한 얼굴로 가던 길을 마저 가셨다.
은사님의 말씀처럼, 할머니들의 충고엔 ‘실제 그렇게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네!’하고 답하면 되었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그냥 웃고 지나가시거나 “대답은 잘한다!” 하고 넘어가셨다. 중요한 건 할머니들이 참견하시고 싶어하는 맘에는 내가 잘 되길 바라는 맘이 담겨있다는 것이었고, 그 맘을 내가 알아드리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말씀을 괜한 참견이라고 싫어하거나, 내가 더 잘 알아서 한다는 식의(사실 그럴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잘난 척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할머니들도 그런 내 맘만 느껴진다면 더 이상은 바라지 않으신다고 느꼈다.
안심기에 접어들다
그러나 나에 대한 궁금증과 우리 집 마당 풀에 대한 참견이 날라가 버린 계기가 있었으니, 그건 내가 딸기잼을 만드는 걸 지켜보시고 난 뒤였다. 한 달 넘도록 하루에 열두 시간 넘게 불 앞에 앉아 잼 끓이는 걸 보신 뒤로는 이런저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아마 대략 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셨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사람 거의가 친척이거나, 어릴 적부터 친구였거나, 시집 와서 40~50년은 겪고 지낸 사람들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이 마을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 사람이 마을에 해가 되지는 않을지, 마음을 놔도 되는 사람인지 걱정도 되는 일이고, 마을사람들이 서로 웬만한 정도는 알고 사는 분위기이니 어느 정도 파악은 해야겠다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있는지, 가족관계는 어찌되며, 뭘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인지, 기본 싸가지는 있는지 정도.
어쨌든 딸기잼 이후로 마당에 풀이 있어도(난 할머니들처럼 깔끔한 풀 관리가 도저히 되지 않았다) 뭐라 말씀하시는 분들이 쑥 줄어든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마당에 들어와 이것저것 묻는 일도 뚝 끊어졌다. 그 정도 파악했으면 더 이상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 뭘 묻는 것도 조심스러워하셨다. 어디까지 물어도 되고 안 되는지 선이 명확했다. 그걸 느낀 건 마을에 들어온 지 6개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따금 마당에 풀을 뽑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내쫒기는 귀농/귀촌인들이 있다. 시골집 주인이 도시에서 살고 있더라도 마을사람들이 연락해서 세 든 사람을 내보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말을 꺼내는 건 마을사람들의 텃세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고, 그 풀이 사실 풀이 다가 아니라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 마당에 무화과가 열매를 맺었다. 집에 오신 할머니가 나가며 하나 따 드시길래 “할머니 다 따 드릴께요. 우리는 잘 안 먹어요.” “그냥 둬, 다니면서 먹게!” “네네.” © 황미경
텃세, 마을 분들이 진심으로 확인하고 싶은 건
나도 텃세를 겪었다. 그 중 한 일화.
어느 날 마을 한 분이 오셨다.
“이거 장 이 집에 있던 거 그대로야?”
“네!”
“이 가마솥은?”
“이것도 그대로인데요!”
이사 첫해, 집주인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짐을 아들인 본인이 와서 추릴 때까지 내가 잘 보관해주거나 집에 그냥 두고 쓸 것을 원했다. 웬만한 짐들은 다른 분 창고로 옮겨놓고, 옮기기 어려운 항아리나 가구, 쓸만한 농기구는 집에 두고 썼다. 그 중에서 꽤 오래돼 보이는 느낌 좋은 장과, 아궁이에 걸친 커다란 무쇠 가마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아닌데 이거! 솥단지 옛날 거랑 분명히 다른데! 이거 어디 가서 바꿔치기 한 거 아니야? 들어보니까 요즘 도시사람들은 옛날 집 부엌문도 떼어다가 비싸게 갖다 팔고 그런다는데 그런 거 아니야?”
졸지에 난 집주인 골동품(?)을 갖다 팔고 요즘 물건으로 바꿔치기를 한 도둑이 되었다. 그 날 난 억울함에 잠 못 이뤘고 이 누명을 어찌 벗어야 할 지 걱정에 걱정을 했다. 다행히 며칠 뒤 부인이 오셔서 보시고는 이 솥단지가 원래 것이 맞다며 내게 대신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일이 쉽게 끝났지만, 아는 사람 없는 마을에서 참 속 뒤집어지고 깝깝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집을 구하지 못한 한 귀농인 부부가 임시 거처로 같이 사용할 겸 같이 황토집을 수리하는데, 할아버지가 술 한잔하고 오셔서는 노발대발하셨다. 골자는 집주인 대신 집을 관리하는 당신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집에 손을 대는 게 무슨 경우냐는 것. 당장 공사를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알아서 고치고 살라”는 말을 액면가로 듣고 따로 찾아가서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는지…. 그치만 내 입장에서는 집을 알아서 고치는 일은 이사 올 때부터 시작되었고, 다 허물어져 가는 황토집을 번듯하게 고치는 일이 해가 될 일도 아닌데 그렇게 화를 내시고 공사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시는 건 지나친 억지이고 방해이고 텃새였다.
근데 마음을 찌르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었다.
“여기다가 찻집을 할라고? 여기서 장사를 할라고? 아니, 돈 있는 도시사람이 와서 시골 돈을 싹 긁어가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먹고 살라고? 내가 여기 관리인인데 지금 나를 시골사람이라고 무시해 지금?!”
오래 전부터 옆 마을에 귀농해 살고 계신 한 아저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기 오는 도시사람들에게는 시골이 로망이지만… 누군가에는 모두가 떠날 때 떠나지 못한 곳이기도 해. 막연히 도시사람은 시골사람보다 돈이 많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들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공사를 하게 해달라는 간청보다도 할아버님의 경계와 오해를 푸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찾아가 내가 일 다니는 곳은 여기서 먼 면에 당시 4만원짜리 일당 주는 밭이나 하우스이고, 열심히 벌어야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황토집은 고쳐서 장사를 할 게 아니며, 집을 구하지 못한 부부가 잠시 머무르기 위해 겸사겸사 같이 고치는 것이라 말씀 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기뻐하셨다.
“4만원? 우리 동네는 5만원 밭일도 많아! 내가 소개시켜줄까?”
이 일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지난 시간 마을 분들이 진심으로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내가 맘속으로 그분들을 무시하는지 존중하는지’였다는 걸.
어르신들은 내가 가진 게 없으니 더 친숙해하셨다. 시골엔 대농이라 불리는 큰 규모 농사를 짓는 분, 고부가가치 작물만 전문으로 하는 분, 축산업으로 여유가 있는 분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인구수로 볼 때 대농보다는 소농이, 부유한 이들보다는 시골살이로 별탈 없이 사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시빈민이었던 나보다는 대부분 여유가 있었다.
할머니들의 마을에서
▲ 할머니들을 보며 내 미래를 그려본다. © 황미경
마을회관에는 동네잔치가 있을 때 정도만 간다. 그곳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함께 밥지어 드시고, TV보고, 화투치고 술 마시며 노시는 곳인데, 나이든 분들과 어울리기엔 서로 코드가,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귀농자가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은 마을잔치가 아닌 다음에는 따로 삼삼오오 모이게 된다.
요즘은 회관을 지날 때면 ‘나이가 들면 내가 마을회관에 할머니들처럼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려면 마을에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숙제다. 내 시골생활이 좀 더 무르익으면 그걸 위해 뭘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 싶다.
난 주로 이웃한 귀촌한 언니들과 놀게 되었다. 세월호 시민모임을 하게 되니 자연스레 시내의 연령대 비슷하고 맘 맞는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할머님들은 택배 보내실 일이 있거나 핸드폰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내게 찾아오신다. 서로 밭에서 많이 나는 걸 철마다 나눠먹는 일은 기본이다. 그리고 한 할머님과는 특히 가까이 지낸다.
이사 온 첫해,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겨울 밤. 한 손엔 소주병, 한 손엔 담배를 들고 누가 보건 말건 거나하게 노래하며 골목을 지나시는 모습에 반해버렸던 할머니. 어디에서 저런 포스의 할머니를, 저런 자유로운 여성을 본 일이 있던가! 라며 감탄해마지 않았던! 할머니는 우리 집 일에 온갖 잔소리를 마다하지 않으신다. 내가 얼토당토않게 일을 해놓으면 어느새 나타나 큰 소리로 호통치시고는 ‘에구, 몰라서 그러지! 알면 그렇게 하나!’라며 하나하나 가르치고 거들어주신다. 난 장 담그는 것도 농사일도 모두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아름다운 설경을 잊지 못하듯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이사 온 다음날 한 할머니가 내게 김장김치 다섯 통을 주셨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이게 뭔 일인가! 어안이 벙벙한데…. 다른 할머니들도 툇마루에 뭔가를 툭툭 올려놓고 가시기 시작했다. 된장, 고추장, 들기름, 감자, 상추, 빵…. 어디 나갔다 오거나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툇마루에 그렇게 올려져 있었다. 워낙 시골인심이 살아있기도 하고 작은 거라도 받으면 꼭 보답을 하는 문화이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마음을 더욱 쓰신 말 없는 친절들이었다.
우리 마을은 새로 이사를 오면 떡이나 술을 돌리는 대신 마을회관에서 마을분들께 식사 한끼를 대접하는 것이 인사절차이다. 가구수가 적어서 30-40인분 정도를 준비하는데, 이사 온 이가 비용을 치르고 식사도 직접 준비한다. 내 경우 이사 얼마 후 이장님께 여쭈니 상 차릴 값을 노인회장님께 드리라고 하셨다. 노인회장님은 가져간 돈을 덜어 돌려주시면서 ‘내가 덜었다고는 말하지마’ 라고 이르셨다.
그러더니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할머니들이 손수 음식을 마련하시고는 나와 딸을 부르셨다. 나중에 마을 돌아가는 걸 보며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모든 과정이 배려였다. 혹여 나 혼자 회관에서 일하며 애태우고 어려울까봐 당신들이 모든 걸 준비해두고 우리를 초대하시려던 것이었다.
내 꿈은…
▲ 할머니가 우리 딸 먹으라고 막 따신 걸 들고 오셨다. 땡실하고 새침한 이쁜 자두! 맛도 딱 그랬다. © 황미경
지난 가을 어느 날, 수확한 들깨를 마당에 부려놓고 섞여있는 나부랭이들을 걸러보려고 소쿠리에 들깨를 담고 흔들고 있는데 친하게 지내는 할머니가 오셨다.
“너 지금 뭐하냐?”
“들깨 가려요.”
“키질을 해야지!”
“할머니, 전 아무리 해도 잘 안돼요.”
“키 갖고 와라!”
“네!!”
척척척척
촥촥촥촥
거짓말처럼 들깨는 안쪽으로 가고 나부랭이들은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이따금 키를 휘듯이 올렸다 내리면 들깨들이 다시 휘리릭 넓게 펼쳐졌다. 그러고 나서 키질 몇 번에 다시 알맹이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나부랭이들은 떨어져나갔다. 할머니의 현란한 키질을 보면서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들깨 가리기가 끝날 무렵 난 다짐했다.
나도 저런 할머니가 돼야지!
키질을 겁나 멋지게 하는 할머니가 돼야지!
그래서 마을에 누가 새로 들어오면 짜잔 하고 그걸 가르쳐주는 할머니가 돼야지!
그러려면 하나하나 잘 좀 해야되는데…
이건 뭐… ^^;;; ▣ 황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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