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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로제 와인인데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매력적인 로제 와인의 세계
여름이 이제 떠나려고 한다. 매미 소리도 하루가 다르게 잦아든다. 아직은 낮이 무덥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지난 가을이 떠오르는 바람이 분다. 어떤 날은 조금, 어떤 날은 아주 많이.
계절마다 으레 찾게 되는 음식이 있다. 무더운 여름엔 더운 기운 쓱 밀어내는 무심한 콩국수 한 그릇이 최고다. 여름에 마시기 좋은 와인은 드라이 로제다. 왜? 섹시하니깐. 여름날 마시기에 레드는 너무 걸죽하고 화이트는 밋밋하다. 로제는 알쏭달쏭 야릇한 여름 밤 애인 마음속 같다.
여름에 마시는 와인으로 드라이(달지 않은) 로제를 꼽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색도 곱고, 가벼운 향도 매혹적이다. 무엇보다 알코올 농도가 낮은 편이라 다른 와인만큼 취하지도 않는다. 뭐, 취하려고 술 마시는데 이게 뭐야 하면야 할말이 없지만.
▲ 마당의 와인포도는 포도송이에 붉은 기운이 돌더니 하루가 다르게 금방 까매졌다. 그러더니 새들이 덤빈다. 맛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 알씩 따서 맛을 보는데, 이눔쉬키들이 더 부지런히 쪼아먹어 포도알 수가 줄었다. ㅠㅠ © 여라
사실 로제 와인은 레드나 화이트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색깔만 보아도 분홍, 오렌지, 빨강, 그리고 자주 빛까지 여러 가지인데다, 아주 어린 아이의 보드라운 뺨처럼 옅은 색부터 검은 체리주스처럼 제법 진한 색까지 있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사이에 놓을 수 있는 색은 다 있는 셈이다. 어느 포도 종으로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향도 여러 가지다. 게다가 스파클링 와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당도 또한 만든 사람 맘대로다.
로제 와인은 남부 프랑스나 스페인같이 여름이 더운 곳에서 아무래도 수요가 크다. 스파클링 와인은 무언가 축하할 일이 있거나 특별한 날을 연상케 하듯, 로제 와인은 여름 해변에서 즐기는 바캉스 와인 같다. 프랑스 루와르 지방에 있는 앙주, 론 지방 타벨, 남쪽 프로방스 지역처럼 로제 와인이 유명한 생산지도 있지만, 전세계 어느 와인 지역이든 로제 와인을 생산한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레드 와인 포도 종으로 로제 와인을 만들 수 있다. 껍질 빼고 포도알 자체에는 붉은 빛이 없으니 레드 와인용 포도종이라 해도 포도즙 자체는 투명한 액체다. 레드 와인을 만들 때에는, 터뜨린 포도알을 껍질째 통째로 2-3일 발효시키면 붉은 물이 든다. 이 공정이 짧을수록 당연히 와인 빛과 맛이 가볍다. 진한 색깔과 진한 과일 맛을 주는 성분은 탄닌과 함께 와인의 수명을 길게 하는데, 로제 와인은 이런 성질을 갖지 못하고 야리야리하니 상대적으로 명이 짧다. 예외는 있지만, 과연 미인은 박명이다.
로제 와인에 붉은 빛이 살짝 들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레드 와인 만드는 공정과 마찬가지인데, 포도즙에 붉은 빛이 조금 들 때까지만 몇 시간 혹은 하루 정도, 이왕이면 온도를 낮추어 놔두는 방법이 있다. 또 하나는 와이너리에서 레드 와인을 보다 더 진하게 만들기 위해 쓰는 방법인데, 초기 과정에서 포도즙 일부를 걷어내어 그것으로 로제 와인을 만드는 방법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만든 레드 와인도, 부산물로 만드는 로제 와인도 반칙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좋게 봐주자면 일석이조?
뱅 그리(vin gris)라는 와인도 있다. 문자 그대로는 회색 와인이라는 뜻인데, 까만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포도알을 터뜨려 포도즙에 몇 시간이라도 같이 담가두어 물들이는 과정이 전혀 없다.
▲ 피노누아 포도품종으로 만든 스페인 스파클링 와인 까바 ©여라
로제 와인을 만드는 방법이 이리 복잡했단 말인가? 물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다 빚은 화이트와인에 레드 와인을 약간 섞기도 한다. 그렇지만 로제 와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화이트 와인이나 레드 와인과 같은 수고를 거쳤기 때문이다.
물을 들이기만 하나? 들인 물을 빼는 방법도 없지는 않다. 이미 완성된 와인의 지나치게 높은 알코올 도수를 낮추기 위해 역삼투(reverse osmosis)라는 식품공학기술을 후공정으로 이용하듯, 레드 와인의 색을 옅게 하여 로제 와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약간 엽기적이긴 하지만, 와인도 식품이므로 와인공장에서는 당연히 식품공학기술을 이용한다. 많이! 기술 중에는 냉장고처럼 유용한 기술도 있지만, 로맨스 홀딱 깨는 이러한 기술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와인자연주의자들의 강조점이 여기 있기도 하다.
우연히 만들기 시작한 스윗 로제 와인도 있다. 1970-198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화이트 와인이 인기였다. 그래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진판델 레드 와인 포도품종으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와이너리에서 발효(효모가 포도즙에 있는 당분을 알코올로 만드는 과정) 중인 와인 속 효모가 돌연 모두 죽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포도즙에 아직 당분이 한참 많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를 어쩌나 고민하는 새에 이 달달한 와인의 색은 당연히 포도껍질에서 물이 들었다. 와이너리에서는 테이스팅 결과 와인이 나쁘지 않아 그대로 팔아보기로 결정했다. 시쳇말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단 음식 사랑하는 미국인의 입맛에 이 ‘화이트 진판델’이 잘 맞았던 것이다. 예전에 한 시대 사랑 받았던 포르투갈 로제처럼 말이다.
난 그런 달달한 로제가 싫은데, 이 로제 와인이 단 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대체로 여름이 서늘한 지역에서 생산된 로제 와인은 여름 태양이 뜨거운 지역보다 달지 않을 확률이 꽤 높다. 그러니까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보다는 루아르 지역 앙주에서 드라이 로제 와인을 더 많이 만든다. (생산량이 아니라 제조 스타일이) 태양이 작렬하는 중부 캘리포니아 레드 와인에다 이탈리아 북부, 오스트리아, 스위스 레드 와인을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하지만 와인 살 때 물어보고 확인하는 수 밖엔. 파는 사람이 자신이 파는 물건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안다(고 믿자).
생산지가 아닌 바에야 수요공급에 맞추기 위해 가게에서 로제 와인은 주로 여름 한철이다. 여름철에는 국내에서도 로제 와인을 구하기가 쉽긴 하지만, 드라이 로제는 상대적으로 좀 다양하지는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여름 로제 와인의 큰 장점은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다는 점이다. 그리고 계절이 지나가는 이 때가 드라이 로제 구입하기엔 적기이다. 가게 입장에서는 치우고 싶은 종류이고, 소비자 입장에선 웬만한 음식과도 쉽게 어울리는 로제 와인을 여름에만 마셔야 할 필요가 없다. 로제 와인은 다양하고 1년은 짧으니까.
여름이 다 가고 있지만, 그래도 난 널 아직 사랑해, 선풍기. 그리고 로제, 너두.
아 참, 기회를 만들어 문경 오미자로 만드는 스파클링 로제 와인 ‘오미로제’를 마셔보길 바란다. 여름 갈증을 날려버리는 시원한 오미자차를 좋아한다면 말할 것도 없고, 그 오묘한 다섯 가지 맛과 이쁜 색깔이 입안에서 만들어내는 우아한 느낌을 그대로 담은 오미로제, 꼭 드셔보시라! ▣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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