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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혐의, 불기소되기 쉬운 데이트 강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9. 데이트 성폭력의 법적 쟁점들 
 

※ 일다의 신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발간 기념으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미진(가명, 38세, 여성)씨는 온라인 게임을 즐겨한다. 요즘은 자기 캐릭터를 꾸미고 커플도 맺을 수 있는 게임에 빠져있다. 최근 게임 상에서 커플을 맺게 된 동갑내기 남자가 있었다. 오프라인 정모에서 이 남자를 만난 미진씨는 상대와 성관계를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오프라인 정모 때마다 성관계를 가졌다.

 

다섯 번째 정모를 하는 날, 두 사람은 따로 2차를 갔다. 이 자리에서 미진씨는 이혼한 전력이 있으며 애들도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그동안 왜 미혼 행세를 했느냐고 화를 내면서 미진씨의 핸드폰을 던져 부수고, 오늘 그냥 집에 보내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차를 타고 모텔로 가면서도 차 안에서 남자는 미진씨를 때렸고, 모텔에 가서는 미진씨를 강간했다. 미진씨는 다음 날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고 남자는 ‘강간’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013년 사건)

 

이 사건은 데이트 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으로 법정에서 ‘강간’으로 인정받아 가해자가 처벌된 사례이다. 피해 직후 신고를 한 점, 모텔에서 강간당한 후 피해자가 황급하게 뛰어나오는 장면이 찍힌 CCTV가 있었던 점 등이 참작됐다.
 

▲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한 < 여성폭력 예방캠페인> 중에서   © 한국여성의전화 
 

그러나 데이트 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고소해서 가해자를 강간죄나 강제추행죄로 처벌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재판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가 돼 불기소처분(검사가 사건 수사 후 재판에 회부하지 않겠다고 판단해 사건을 종결하는 것) 되는 경우가 많다.

 

데이트 강간은 흉기, 폭행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 많아

 

우리나라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하여,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된 강제적인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신진희 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는 “피해자가 싫다고 거부 의사를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가해자를 강간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는 것, 피해자가 반항을 했다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고 말한다.

 

현행법에 의거하면 강간죄를 판단할 때 ‘피해자가 항거를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의’ 강도 높은 폭행, 협박이 있었는지를 따지게 된다. 즉 피해자가 극도로 저항을 했음에도 항거가 어려웠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데이트 관계에서는 흔적이 남을 만한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강간이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남성이 상대를 눈빛이나 표정으로 제압해 심리적으로 위축시켰거나, 다른 폭력 없이 자기 몸으로 여성을 눌러 강제로 성관계를 한 경우, 강간으로 처벌받기 어렵다.

 

바텐더로 일하는 경숙(가명, 26세, 여성)씨는 2년 간 사귀다 헤어진 남자에게 스토킹을 당했다. 상대는 이별을 원하는 경숙씨에게 헤어질 수 없다면서 폭탄 문자를 보냈고 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기다렸다 쫓아오곤 했다. 길거리에서 싸우다보면 서로 언성이 높아져서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서 싸웠는데 그때마다 남자는 경숙씨를 때렸다. 참다못한 경숙씨는 경찰서에 가서 스토킹과 폭행 건을 신고했다.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경숙씨는 남성과 헤어진 후에 상대의 강요로 성관계를 했던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고 망설임 끝에 성폭력 건까지 같이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단계로 가자 검사는 어차피 불기소 처분될 것이라며 경숙씨에게 성폭력 건 고소를 취하할 것을 권했다. 증거가 없는데다가 당시 모텔에 자발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냐는 것이다. 남자가 끌고 간 건 아니고 경숙씨 발로 들어간 건 맞지만, 당시 경숙씨는 스토킹과 폭행 피해를 입고 있었고, 남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아서 억지로 따라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검사 앞에서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한 채 경숙씨는 검사의 권유대로 고소를 취하했다. (2013년 사건)

 

미국 대학가에서 벌어진 데이트 강간에 대해 다룬 책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미디어 일다, 2015)의 저자 로빈 월쇼는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강간 사건에서 대부분의 가해자는 흉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피해자를 때리지 않을 수도 있다. 피해 여성 또한 대개 자신을 공격하는 남자에게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이는 공포심 때문이다.) 그리고 심각한 상흔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유리화영 소장도 “데이트 강간에는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가해자는 상대를 어떻게 제압해야 되는지 알고 있어요. 만약 이전에 폭행이 있었다면 상대 남성의 표정이 폭력이 일어날 조짐이라는 걸 여성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면 상대가 쌍욕을 하거나 굳이 뭘 집어던지거나 때리지 않아도 공포심을 느껴서 성관계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되죠.”

 

데이트 관계의 이러한 특수한 맥락은 법률상의 ‘강간’ 규정 앞에서 고려되기 힘들다. 채팅을 통한 만남 등 일회적인 만남에서 성폭력이 있었던 경우는 그나마 기소될 확률도 높다. (물론 이 경우에도 폭행, 협박이 수반됐음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연애 관계에서 일어났던 성폭력을, 연인 관계가 끝난 후에 고소하길 원하는 경우에는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거가 남아있지 않으면 강간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형량 감경 사유가 돼

 

이미지 © ClkerFreeVectorImages 
 

더 심각한 문제는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 데이트 강간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거나 형량이 감경되는 사유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작년에 발간한 <여성․가족 관련 판례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 및 입법과제Ⅲ>은 2013년 한 해 동안의 강간죄 판결에서 ‘가해자의 피해자와의 관계’에 따른 형량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최종심을 기준으로 한 '강간죄 평균 형량'은 '가족 및 친척 90.3개월, 모르는 사람이 77.3개월, 아는 사람이 60.3개월, 애인이나 이성친구인 경우 33.5개월'로 나타났다. 데이트 관계였을 경우 강간으로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관계가 형량을 감경하는 사유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재단법인 동천의 김차연 변호사는 “연인 관계였기 때문에 형량을 줄이는 건, 재판부가 데이트 강간을 연인 사이에서 스킨십 하다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판결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둘이 연인 관계였거나 피해자가 성폭력 후에 가해자에게 연락을 했다고 하면 폭행, 협박이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 피해자 진술만으로 강간인지 아닌지 판단하게 되는데, 이 때 ‘유형력(有形力, 신체에 물리적 힘을 가함)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한다.

 

그런데 많은 재판부가 과거 또는 현재 연인 관계나 부부 관계에 있었다는 점, 피해여성이 여관에 따라 들어갔다는 점, 술을 함께 마시며 함께 있었다는 점,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점, 성폭력을 전후하여 구조를 요청하지 않은 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후에 연락한 점, 범행 즉시 신고하지 않은 점 등을 ‘폭행 협박이 없었다’는 근거로 삼아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가족 관련 판례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 및 입법과제Ⅲ>, 2014.

 

무고, 명예훼손으로 역고소 당하기도

 

고소를 해도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 이외에도, 데이트 성폭력 피해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소를 망설이게 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차차 활동가는 “데이트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소를 결심하기엔 피해자 앞에 놓인 장벽이 많다”고 전한다.

 

“사귄 사이라면 개인적인 정보가 다 공유된 상태잖아요. 가해자가 찾아올 수도 있고 가족한테 다 알리거나 보복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어요. 또 증거가 없기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걸 사람들이 믿어줄까 하면서 망설이게 되죠.”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유리화영 소장은 “데이트 성폭력 피해를 오픈했을 때 본인에게 오는 파장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고소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감금을 하는 등 극심한 폭력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 가해자는 합의 하에 성관계였다고 주장할 텐데, 그 사람과 내가 했던 성관계와 성폭력 피해를 구분해서 얘기해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가해자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이후에 계속 마주쳐야 하는 현실에서 고소를 쉽게 결심하기 어려워요.”
 

▲  2014년 5월 14일,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성폭력 피해 고소인에 대해 무고죄 혐의로 법정 구속한 서울서부지방법원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데이트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를 망설이는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무고죄(타인을 처벌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고소하는 경우 성립하는 범죄)로 거꾸로 고소를 당해 처벌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가해자들이 “합의된 성관계였다”면서 무고죄나 명예훼손죄로 피해자를 맞고소한다.

 

성폭력 사건이 무혐의 처분된다고 해서 바로 고소인이 무고죄로 처벌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데이트 성폭력을 고소하는 피해자에 대해 “꽃뱀일 수 있다, 헤어진 후 복수심에 허위로 신고한 것일 수 있다”는 의심부터 갖고 사건에 접근하는 수사관들도 있으며, 검사에 의해 무고죄로 인지되는 억울한 피해자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대가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는 성폭력이다  

 

이런 법적 한계 속에서, 현행 법률에 ‘비동의간음죄’(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간음죄)가 신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피해자가 분명히 동의하지 않았지만 폭행, 협박의 증거가 남아있지 않은 성폭력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 자연스럽게 추정되지만 강간만큼은 그 예외가 된다. 유독 강간죄에 대해서만큼은 피해자가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음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그 배경에는 ‘강간 피해자는 강간을 내심 원한다’거나 ‘여성의 NO는 사실 YES’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통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유정 ‘비동의간음죄의 신설에 대한 논의’, <성폭력, 법정에 서다> 중에서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동의하지 않는 성행위 = 성폭력’이라고 이미 앞서 가고 있는데 현행법은 폭행, 협박이 수반되어야만 성폭력으로 인정하고 있어, 법이 사람들의 인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들린다. 이미 미국, 영국 등의 사회에서는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강간을 규정하고 있어 우리 법 집행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아무리 연인 관계에 스킨십이 전제되어 있다고 해도, 상대가 동의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은 성폭력이다.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방적인 성행위를 성폭력이 아닌 ‘거칠고 난폭한 성관계’ 쯤으로 정당화시키는 사회적 인식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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