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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학살자가 되기까지
[죽음연습] 집단학살과 전쟁이 야기한 죽음을 보며①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은 어떤 사회에서나 큰 범죄로 간주된다. 게다가 여러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이라면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정치적, 종교적 이념을 내세운 살인, 게다가 다수의 생명을 해치는 집단학살은 어떤가?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 집단학살의 재구성

 

얼마 전 미국의 참여 다큐작가로 알려져 있는 조슈아 오펜하이머(1974-)가 만든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2012,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과 <침묵의 시선>(2014, 덴마크)을 보았는데,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갖은 이념으로 포장한 채 무고한 사람들을 집단학살하는 일이 인류 역사 속에서 낯설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소름끼치고 절대로 무덤덤해질 수 없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1968년에는 수하르토 정권이 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군은 공산당 쿠데타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걸고 무려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학살했다. 이때 살해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인들, 노조원, 농부, 그리고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동료와 함께 웃으며 교살 장면을 재연하는 안와르 콩고.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 중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과 <침묵의 시선>(Senyap, The Look of Silence)에서 우리는 1965년 군부 쿠데타 당시 대학살의 잔혹한 실상을 엿볼 수 있는데, 학살 현장이 40여년의 세월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된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대학살에 직접 가담한 처형자이자 오늘날에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안와르 콩고’를 통해, <침묵의 시선>에서는 형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도살당한 ‘아디’라는 인물이 만난 학살 관련자들을 통해 끔찍한 집단학살의 비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학살을 지휘하고 가담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영상을 통해서 듣고 있으려니 잔혹하고 비정한 학살자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학살을 부추기고 지휘했던 최고위층, 그리고 중간 단계의 명령자, 마지막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 처형자들과 같은 학살자들은 대학살에 대해 책임지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끊임없이 고집스럽게 자신을 변호하고 정당화한다. 뻔뻔한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심지어 학살자의 가족도 학살자를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학살자의 아내와 또 다른 학살자의 딸이 겨우 사과의 말을 꺼내놓았지만 영상을 의식한 것으로 보여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이들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가차 없이 잔인하게 빼앗고도, 이후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죄의식에도 시달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부심까지 느끼며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 도대체 이 학살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정신질환자인가? 공격형 사이코패스인가?

 

살인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  데이브 그로스먼 <살인의 심리학>(플래닛, 2011) 
 

미국의 군사 심리학자인 데이브 그로스먼은 <살인의 심리학>(이동훈 역, 플랫닛, 2011)에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데 심리적 거부감이 있고, 이 거부감은 본능이라고 적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전쟁터의 군인들조차 적을 살해하길 주저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로 총을 쏜 군인은 15-20%에 불과했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는 살인의 거부감이 너무 커서 심지어 자기보호 본능까지 포기하면서 적을 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군인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적을 직접 살해한 군인은 심각한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다큐멘터리 속의 학살자들은 잔인한 살인 행각을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재현해 보일 수 있는 것일까?

 

데이브 그로스먼은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을 인용하면서 미국 일반 남성의 3%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이중 1%는 권위에 반항하기 때문에 군인이 될 수 없지만, 2%는 뛰어난 사냥꾼 기질을 군사 훈련을 통해 발휘케하면 군인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남성들은 타인에 대한 자기 행동이 야기하는 결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살인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지만, 살인을 즐기는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은 아니다.

 

어쩌면 안와르 콩고와 같은 처형자는 이 2%의 남성에 포함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학살자들 모두가 특별한 유전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오히려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처형자들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로 간주하는 것이 더 사리에 맞는 것 같다. 그로스먼의 지적대로 어떤 사회도 평범한 사람이 다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유대인 전체의 몰살을 추구한 체계적인 나치 정책의 집행 과정에 가담했던 101 예비경찰대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국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진모 역, 책과 함께, 2010)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에 가담한 101 예비경찰대대를 분석하면서 이들이 지극히 평범한 독일인이라는 사실 앞에서 불안감을 내보인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밀그램의 실험, 살인자가 되는 과정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비정하고 잔혹하게 살해하는 처형자가 되는 것일까?

 

20세기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은 예일대학 재직 당시 복종과 공격성에 대한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잘 통제된 실험실에서 65% 이상의 사람이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해 낯선 사람에게 치명적인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아디(오른쪽)는 형을 잔혹하게 죽인 학살자를 만나러 가지만, 그들이 아무 죄의식도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시선>(2014) 중 한 장면. 


결국 밀그램은 “살해 행동에 영향을 주거나 살해를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기본적 상황 요인”으로 ①권위자의 명령 ②집단 면죄(책임 희석) ③피해자와의 거리를 제시한 바 있다. 바로 이 밀그램의 실험 결과에서 그로스먼과 브라우닝은 대답을 찾는다.

 

먼저, 집단 학살의 처형자들은 권위 있는 존재의 명령이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목숨을 빼앗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극소수의 사디스트가 학살 집행자 중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명령이라서 따랐을 뿐 즐기지는 않는다.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인도네시아 처형자들 가운데 학살에 가담한 후 돌아버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돌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처형한 사람의 피를 받아 마시는 엽기적 행동까지 했다니, 끔찍하다. 아무튼 학살자는 살해 명령을 받고 임무 수행만 생각했고 자신이 떠안은 임무가 역겹고 불쾌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살해가 잘못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처형을 명령하는 자와 직접 처형하는 자가 분리되어 있어서 살인에 대한 책임감이 약화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살해 명령을 내린 자는 직접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학살이 벌어진 다음에도 살해의 트라우마에서 보호받는다. 그리고 살해 명령을 수행한 자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죄의식이 없다. 학살의 책임은 명령을 내린 자에게 떠넘길 수 있다. 따라서 서로의 책임이 희석되는 것이다.

 

또, 집단 속에서 익명의 개인으로 학살에 가담함으로써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집단 심리가 살해 히스테리를 촉발시키고 책임감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게다가 동료들 간의 유대감도 무시할 수 없다. 동료의 시선을 의식하고 동료를 염려하는 마음이 학살을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즉 ‘강한 사나이’로 동료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체면을 유지하고 ‘나약한 겁쟁이’라고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하지 않은 ‘궂은 일, 더러운 일, 역겹고 불쾌한 일’을 동료에서 떠넘기지 않기 위해, 학살자의 역할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희생자와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상대를 타자화시키고 비인간화시킨다. 이제 희생자는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로스먼은 인종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는 ‘문화적 거리’로, 도덕적 우월감과 열등감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차이를 ‘도덕적 거리’라고 이름 붙인다. 나치가 ‘우월한 독일인, 열등한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인종관에 기초해서 유대인을 비인간화한 것이 바로 문화적 거리두기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중국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군부가 농민, 지식인, 노조원, 중국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것은 바로 도덕적 거리두기이다. 인종이나 민족적 차이가 분명치 않은 내전의 경우는 문화적 거리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강한 믿음에 기초해서 거리를 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공산주의자들이 잔인하게 사람들을 살해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니(죄가 있으니)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공산주의자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복수, 보복을 해야 한다면서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잔악성에 대한 거짓말을 널리 유포하기 위해 영상을 제작하고, 어린이를 포함한 전 국민이 그 영상을 보도록 강요했다. 편향된 자료를 사용해서 공산주의자를 인간 이하로 매도하는 문화적 거리두기도 함께 시도되었다.

 

요컨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국가나 상관처럼 권위 있는 존재나 끈끈한 유대감이 있는 동료들이 처형을 요구하면 거의 거부하지 못한다. 이때 문화적, 도덕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희생자를 인간 이하로 간주해 비인간화한다.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자신의 살인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고 선하다고 믿는다. 평범한 사람도 반복적으로 살인을 하면서 차츰 살인 행각 자체에 무감각해지고 잔인해져 희생자에 대한 죄의식도 사라진다.

 

101 예비경찰대대의 경우도, 처음에는 10-20%의 대원이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살인이 반복되면서 살인의 거부감, 살인의 충격이 약화되고 살해가 습관이 되어 사람 죽이는 일에 무감각해졌다. 이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이 광적인 살인마가 된다.

 

부끄러운 인간…그래도 희망은 있다?
 

▲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1965년 인도네시아 민간인 학살, 2차 세계대전 당시 101 예비경찰대대의 유대인 학살은 전쟁 중에 군인이 처한 상황, 즉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벌인 살인이 아니었다. 처형자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무력한 자들을 일방적으로, 조직적으로 바로 눈앞에서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다.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서 집단학살을 명령한 자는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을 보는 내내 인류의 폭력성에 환멸을 느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한 군인의 말대로, 또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이라서 부끄럽다’는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수치심만은 아니었다.

 

나는 현재 우리가 전쟁과 인종주의가 만연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국가가 대중을 동원하고 또 그들의 명분을 정당화하는 힘 또한 막강할 뿐 아니라 계속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는 전문화와 관료화 때문에 개인의 책임감이 점점 더 희박해져가고 있으며, 집단이 개개 구성원들에게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며 도덕적 기준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우 두렵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만약에 어떤 근대적인 정부들이 집단 학살을 자행하기 위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그들의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하고자 시도하기만 하면 여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적어도 오늘날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학살에 동원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시도가 좌절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브라우닝이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이 내게도 엄습했다. 이미 우리 현대사에도 집단학살의 핏빛 흔적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밀그램의 실험대로라면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로스먼이 <살인의 심리학>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 속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학살자가 되길 거부한, 잔학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도덕적 자율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101 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 다수가 자율적으로 유대인 살해를 회피하고 거부할 수 있었음에도 처형자의 역할을 선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면서도 말이다.

 

동료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은 본능과 이성, 환경, 유전, 문화, 사회적 요소들이 강력하게 결합된 결과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거부감은 강력한 힘을 지닌 채로 존재하며, 그 존재는 그래도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믿을 만한 여지를 남겨준다. -데이브 그로스먼 <살인의 심리학> 중에서

 

결코 크지 않는 희망이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진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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