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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적이지 않은 유기농의 덫을 넘어서

‘농생태학’ 현장, 태국 수린 농민협동조합 방문기


※ 필자 김신효정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계간지 <귀농통문> 2016년 봄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왜 유기농은 비싼가?

 

현재 세계 식품시장에서 상위 10개 기업이 약 30%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또 10개의 초국적 기업이 전세계 종자시장의 50% 이상을 통제하고 있으며 세계 농약시장의 80%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화된 농식품 시장 속에 한국인의 밥상은 GMO(유전자변형작물)와 수입 먹거리로 점령당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한살림, 아이쿱과 같은 생협과 <언니네 텃밭>과 같은 공동체 지원 농업, 도시형 장터 ‘마르쉐’와 로컬푸드 직매장 등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지속가능한 농업과 밥상을 만들기 위해 대안을 모색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애써 만들어온 대안에 대한 돌아보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왜냐면 비싼 돈을 주고 사먹는 ‘유기농’ 음식이 모두 유기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기농이란 단순히 생산할 때 농약이나 제초제, 화학비료 등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 인증을 받은 농산물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유기농은 생산과 유통, 소비에 있어 유기적인 순환이 가능한 총체적인 ‘시스템의 유기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는 유기농은 주로 생산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 태국 수린 지역의 다양한 토종씨앗들.   ⓒ 김신효정

 

게다가 생산 과정에 있어서도 유기농이라 부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두 명의 농민이 수급물량을 맞추기 위해 한 작물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경우, 모든 투입 요소는 외부에서 공급된다. 유럽에서 수입해온 유기종자와 벌,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유기비료와 친환경 자재, 비닐하우스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석유 등 외부투입 요소들은 유기농 음식을 비싸게 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더욱이 대량생산을 위해 외부투입 요소에 의지하는 유기단작 방식의 농사는 땅의 힘을 잃게 만든다. 땅심을 잃어버린 토지에는 친환경 비료를 더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 생산량을 맞출 수 없게 된다.

 

생산하는 인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고된 농업 노동력을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차지한지 오래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20대 이주여성노동자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인종차별과 인권 침해로 시달리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농민들이 어렵사리 생산한 유기농산물도 대형마트와 대량유통체인들의 가격후려치기와 덤핑으로 인해 제값을 받기가 쉽지 않다. 결국 소비자들은 유기적이지 않은 먹거리 시스템 속에서 유기농산물을 더 비싼 가격에 사먹고 있는 것이다.

 

유기적인 먹거리 시스템을 찾아서

 

지금의 유기농이 대안이 아니라면 과연 대안은 무엇일까? 유기적인 생산과 유통,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일까?

 

조금은 거창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지난 12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의 여성농민활동가들과 함께 농생태학 연수 사업의 일환으로 태국 수린 지역을 방문했다. 전여농은 식량주권운동을 펼치며 여성농민들을 위한 농생태학 교육과 실습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태국 수린 지역의 <타논 여성공동체> 농민들과 함께.   ⓒ 김신효정

 

태국 수린 지역은 방콕에서 차로 7~9시간 떨어진 태국의 대표 곡창 지대로 농민들 대부분이 쌀농사를 짓는다. 우리는 수린 지역에 있는 ‘공동체 농생태학 재단’(Community Agro Ecology Foundation)에서 일주일 간 지내며, 지역 농민들과 만나 농생태학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나누었다. 우리가 머무른 교육센터는 전세계 소농조직인 ‘비아 깜페시나’(Via Campesina)에서 2012년에 처음으로 농생태학을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사실 수린 지역에 농생태학 재단이 만들어지기까지 농민들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한국의 농민들처럼 태국의 농민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 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진 ‘녹색혁명’과 정부 주도의 개발 독재로 인해 상당한 면적의 농지를 수탈당했다. 그리고 대량생산을 위한 농약과 화학비료, 개량종자를 사용하는 농업으로 전환해야 했다.

 

처음에는 무료로 보급되던 개량종자와 농화학제품은 이후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빚을 지게 되었고,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농민들은 다량의 농화학제품을 사용하면서 건강을 잃게 되었고, 많은 농가에서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떠났다. 빚은 늘고 땅은 잃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특히 많은 양의 쌀을 수출하는 태국의 경우, 쌀 판매와 유통이 민간기업에 맡겨져 있는데 기업들의 횡포가 심했다. 기업들은 농민이 생산한 쌀의 무게를 속이거나 가격을 후려쳤다. 수린의 농민들은 생산한 쌀에 대한 공정한 가격을 받기 위해 쌀을 정미하는 중고기계를 함께 공동으로 구매하고, 정미소를 중심으로 1992년 단체를 설립했으며 1996년에는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 협동조합에서 공정무역으로 판매하는 유기농산물    ⓒ 김신효정

 

수린 농민들은 협동조합을 통해 유기농과 자연농법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더 이상 기업이 판매하는 외부투입 요소에 의존하는 농사가 아닌 토종씨앗과 농민의 지식과 기술에 기반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0명도 채 되지 않았던 조합원 수는 현재 579명이 되었다. 농민들이 공동으로 경작, 가공하여 생산된 유기농 쌀은 공정무역을 통해 좋은 가격으로 전 세계에 판매되고 있다. 현재 협동조합을 통해 매년 약 3천 톤의 쌀이 판매된다.

 

농민들을 위한 다양한 모임과 교육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의 목표는 단순히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수익을 나누자는 게 아니다. 조합의 목표는 농민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일하며 삶의 질을 높이고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수린 농민협동조합의 비전은 “지속가능한 길로 함께 나아가자”이다.) 그 중심에는 농생태학이 깃들어 있다.

 

생태과학이자 전환운동인 ‘농생태학’ 이야기

 

농생태학(Agroecology)은 농학과 생태학을 합친 말로, 과학이면서도 실천이다. 농생태학은 생태 과학의 적용이자 지속가능한 농생태계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농생태학은 농사에 있어 순환 가능한 영양과 에너지를 사용하여 기존의 기업 중심, 산업 중심의 농업 시스템을 전환하는 운동이다. 

 

유기농도 농생태학의 일부분이지만, 유기농과 농생태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농생태학은 외부 투입재에 기반한 유기단작이 아닌,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소농 농민의 지식과 실천을 중심으로 한다. 농생태학의 원리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 왜냐하면 지역의 독특한 현실에 따른 다양한 원칙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각 지역마다 기후와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김치와 장을 담는 것처럼, 농생태학의 레시피도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 토종벼를 수확하고 있는 타논 여성공동체 대표  ⓒ김신효정


농생태학에서는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아왔던 여성농민의 지식과 기술이 중요한 자원으로 다루어진다. 강원도의 할머니들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두엄을 만들고 좁은 땅에 옥수수와 깨를 같이 심고 밭고랑에 콩을 둘러 심어온 것은 그냥 해온 것이 아니다. 농생태학의 측면에서 섞어짓기를 통해 땅의 힘을 기르고, 계절의 온도와 기후에 맞는 작물들을 적절히 배치한 오랜 노하우와 지식의 보고이다. 자연농업, 무비용 농업, 퍼머컬쳐, 자립유기농, 비산업적이고 외부 투입이 없는 유기농, 생태농업, 지속가능한 소농의 농업 등이 농생태학의 다른 이름들이다.

 

농생태학은 ‘투입물’ 중심의 농업에서 ‘다양성’과 ‘통합’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운동이자 전환운동이다. 20세기 녹색혁명과 21세기 초국적 농기업에 의존해온 농사를 이제는 농민의 지식과 지역 자원에 기반한 농사로 전환하고, 적은 돈을 들여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토양을 복원하는 운동이다.

 

결국 농민 생산자가 더 건강하고 좋은 노동 조건을 확보하고 소비자는 더 안전하고 나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식량주권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목표인 것이다. 따라서 농생태학 운동은 현재의 농업 현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사회 변화를 위한 의식의 전환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여성농민 공동체의 힘을 느끼며

 

이번 연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성농민 공동체를 방문한 것이다. 사실 수린 지역은 과거 모계사회였던 크메르 부족이 살았던 지역으로, 여성과 남성의 지위과 다른 지역보다 평등한 편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의 변화 속에서 여성의 권리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의 리더십과 참여가 활발하다.

 

마지막 일정으로 태국 수린 지역 ‘타논 여성농민 공동체’를 방문했다. 협동조합이나 단체와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약 100여 농가의 여성농민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임이었다. 여성농민 공동체의 대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여성들이 함께 모여 배우고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태국의 여성농민과 한국의 여성농민이 서로 만나 토종씨앗 하나로 길고 긴 수다가 이어졌다. 태국 수린에서는 결혼식 때 보석과 씨앗을 함께 넣은 함에서 눈을 가린 채 신랑과 신부가 씨앗을 선택하는데, 풍요를 상징하는 가지 씨앗을 뽑는 게 제일 좋단다. 결혼 후 씨앗함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달한다. 여성이 대대로 종자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그린마켓에서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는 농민 ⓒ김신효정


여성농민들은 공동체 안에서 농생태학의 원리를 토대로 유기농 쌀, 과일, 채소 재배와 유기축산을 위한 지식과 경험을 함께 공유했다. 외부 투입을 줄이고, 토종씨앗을 심고, 가축의 분뇨로 퇴비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니 빚이 줄어들었다. 생산된 작물은 기업에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에 판매하거나, 매주 열리는 유기농직거래 시장인 그린마켓에서 판매하니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린마켓은 매주 열리는 지역 전통시장의 한 켠에 녹색 앞치마를 입은 유기농민 생산자가 직접 생산한 유기 농산물을 판매하는 직거래 시장이다. 수린 지역 농민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그린마켓은 농민들에게 안정된 수익을 보장한다.

 

“빚이 줄고, 땅과 가족을 지킬 수 있게 되었어요.”

 

태국 수린에서 만났던 농민조합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농생태학으로의 전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빚이 쌓이고 땅을 잃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고 가족이 흩어지는 삶을 위해 농사를 짓는 농민은 없을 것이다. 생산자인 농민을 불행하게 만들고 나의 몸을 병들게 하기 위해 음식을 사먹는 소비자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농업과 밥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그러나 앞으로 더 큰 위기들이 도래할 예정이다. 현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이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진행되면서, 유사한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작년에 GMO 쌀을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는데, 태국 정부 또한 지난 12월 GMO 상용화 법 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GMO 콩, 옥수수 상용화를 위한 정부 공청회가 지난 달 개최되었다. 아시아 지역 정부들의 GMO 상용화 법을 제정하는 배후에는 TPP와 같은 국제무역협정과 몬산토, 카길, 듀퐁과 같은 초국적 농기업의 압력이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 결국 지역 안에서, 공동체 내에서 함께 연대하며 새로운 길을 일구어 가는 방법밖에는 농업과 밥상의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 김신효정.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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