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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살 수 있겠구나’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낡은 한옥을 세 얻다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새로운 땅, 경주

 

수련원에서 알게 된 지인을 따라 두어 번 와 본 경주는 아름다웠다. 나지막한 산과 고층 빌딩 없이 확 트인 너른 벌판, 오래된 기와집과 소나무들…. 무엇보다 묘한 땅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시내 한복판에서 문득 거대한 무덤을 만나는 곳. 시끄러운 자본의 온갖 수다스러움 한복판에서 천년의 침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분(古墳)들, 그 위에 자라고 있는 키 큰 나무들.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 자리하고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땅. 인간의 오랜 문명과 역사가 세월에 씻겨 풍광(風光)이 되어 버린 곳.


▶ 경주 봉황대.  신라시대 고분과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 김혜련

 

이 땅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나는 텅 비어 있는 폐사지에서 깊고 낮은 숨을 쉬었다. 작은 둔덕 같은 온화한 곡선의 무덤가를 걷고 또 걸었다. 무언가 한 없이 그리웠다. 그리운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보다 더 크고 넓어서 아니 사람보다 더 낮고 낮아서, 사람인 자신에게 스스로 속은 내 영혼을 고요히 눕히고 치유할 곳이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나를 품어줄 공간, 내가 기대어 깃들 따스한 ‘어떤 곳’을 찾고 있었다.

 

‘괜찮아~’

 

폐허의 땅에서 부는 바람 소리였다. 천여 년 전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문명이 풍경으로 퇴적된 자리에 햇빛이 비추고, 바람이 지나갔다.

 

경주에서 내가 본 것은 인문(人紋) -인간의 무늬 결, 삶의 쓰라림의 기록이었는지 모른다. 거대한 무덤을 바라보며 인간됨의 어떤 비극적 공통성을 느꼈는지 모른다. 인간은 결국 삶에 질(敗北)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이 주는 장엄한 위로.

 

고작 백년도 채 안 되는 세월 위에 서 있는 부박한 삶이 아니라 천년 이상의 깊은 뿌리가 내 발밑에 뻗어있는 느낌, 어쩌면 나는 그 뿌리와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가슴 설렘. 내 삶의 ‘근원적 두터움’에 대한 느낌이 신생의 땅에 싹이 트듯, 터 올랐다. 그러자 뿌리도 근거도 없이 막막히 유랑하는 삶에 어떤 위엄 같은 것이 생겨나는 듯도 했다.

 

‘여기서 살 수 있겠구나, 외로움 속에서도 기쁨이 있겠구나.’ 내면의 황량한 자리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갔다.


▶ 경주 계림(鷄林).  첨성대와 반월성사이에 있는 울창한 숲.    ⓒ 김혜련

 

불국사 아랫마을에 1970년대식 낡은 한옥을 세 얻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네 안쪽에 마치 알처럼 쏙 들어간 그 집에서 백일 동안 칩거했다.

 

두렵고도 어두운 시간이었다. ‘헛살았다’는 것은 알겠으나 ‘제대로’ 사는 게 뭔지는 모호하기만 한 불안과 우울의 시간들. 캄캄한 밤에 좁은 낭떠러지 바닷길을 달리는데 헤드라이트가 없다. 브레이크를 밟으려했는데 브레이크도 없다. ‘아, 아, 이제 죽는구나…’ 절망하며 기진할 때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었다.

 

오십 여년의 내 삶이 드러나다

 

고분(古墳)의 비밀문서가 해독되듯,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십 여년을 살아오면서 일관되게 해 온 질문이 있다. 그건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 질문은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인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거창한 철학적 주제를 잡고 이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첫 날 밤에 들어선 웬수!”

“천덕꾸러기는 목숨도 질기지~”

 

별로 환영받지 못한 생명으로 태어난, 나의 환경과 기질이 만나 이루어진 질문이었다. 나를 세상에 내놓은 존재가 나를 부정하니, 나는 왜 살아서 숨 쉬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그 물음은 사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물음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의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장차 되어야만 할 ‘이상적 존재로서의 나’였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가?’였다. ‘그런 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엄마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얼굴없는 정령 ‘가오나시’

 

그러니 ‘아름답고 이상적인 나’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만 했다. ‘지금의 나’는 부정되고 ‘미래에 올 진정한 나’를 향해 성장해가야 했다. 오십 여년의 내 삶은 ‘현실의 나’와 ‘이상적 나’ 사이의 한없는 괴리를 일치시키려고 한, 자신과의 기나긴 투쟁이었다.

 

‘평생 나를 만나기 위해 애썼으나, 단 한 번도 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 황당한 역설이라니! 그러나 사실이었다. 구원처럼 매달렸던 문학, 심리학, 성찰과 치유를 위한 모임들, 지리산에서의 수행…. 이 모든 행위들을 통해 나를 더 깊이 만나는 듯 했지만, 만남은 즉시 다른 방향으로 비껴갔다. ‘그래, 난 이렇게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그러니 이런 나를 변화시켜야만 해.’ 재빨리 내가 만든 ‘환상의 나’를 향해 달려갔다.

 

‘아, 나는 엄마가 했던 것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거부했구나.’ 내가 만든 이상에 맞지 않는 나를 향해 “넌 고작 이것 밖에 안 돼?” 닦달하고 “인간이 되라!”고 잔인하게 내몰았다.

 

그것은 나를 향한 가혹한 학대였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세계

 

내게로 돌아오는 길은 쓰라리고 비참했다. ‘난 너희를 몰라’ 두려워 외면하고, 죽여서 몰래 파묻고 싶었던 것들. 상처받고 뒤틀린 내 안의 온갖 ‘병신’들을 만나야하는 기막힌 길이었다.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가/ 장성하여 돌아와/ 무서운 얼굴로 서있듯’(박노해의 <건너뛴 삶> 일부), 그토록 멀리 달려와 이제는 영영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고스란히 살아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드러났다.

 

때리면 맞고, 뺏으면 뺏기고, 그저 벌벌 떨기나 하는 어리버리 바보, 건드리면 눈물만 터져 나오는, 자존감이라곤 ‘눈을 뒤집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거렁뱅이, 버림받을까 두려워 알아서 설설 기는 노예, 세상이 낯설고 막막한, 외로움과 공황감에 사로잡힌 우주의 미아, 자기혐오로 온 몸이 오이지처럼 쪼그라든 소녀….

 

할 줄 아는 건 떠는 것밖에 없는 ‘벌벌이’를 만나는 것도 처참했지만 이 바보를 안 만나려고, 성장이란 이름으로 내가 만든 ‘괴물’을 만나는 일 또한 비참했다. 바보는 울고, 괴물은 악을 쓰고, 바보는 “괜찮다” 하고 괴물은 “억울하다!” 소리치고, 바보는 간디처럼 너그럽고 괴물은 히틀러처럼 잔인하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그냥’ 만나고 ‘그냥’ 경험하는 수밖에.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달아나려는 몸짓을 그치고 속수무책 뒹굴고, 울고, 찢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개념도 없던 세계로 들어선 거였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하려고 하지 않았던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세계, 늘 ‘저 높은 곳’을 향해 가기 바빠 단 한 번도 제대로 밟은 적이 없는 땅. 그건 매 순간 ‘나는 이러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픈 자아의 죽음이기도 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무 것도 아님’의 무덤 속에 갇히는 일이었다. 어둡고 깊은 터널 속에서 누에고치처럼 꼼짝 말고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 김혜련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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