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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⑥ 결혼이라는 화두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결혼적령기, 혹은 적령기를 지난 이성커플

 

올해 32살 여성인 나는 작년에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30대에 들어와서는 처음 하는 연애다. 나보다 3살 연상인 애인과 나는 20대에 만나 친구로 긴 시간을 지내왔다. 우리는 20대를 함께 지나온 공통의 친구들에게 우리의 연애를 알리고, 짓궂지만 애정 섞인 놀림과 축하를 함께 받았다. 둘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서로의 다른 친구들을 함께 만났다. 연애가 시작될 때면 으레 하는 일이다.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결혼은 내게 현실보다 농담에 가까웠다.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해본 적 없었고, 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결혼이 대화의 주제가 되면 “오늘 아침에 결혼하려고 했는데 너무 바빠서 못했네” 같은 썰렁한 농담을 던졌고, 이야기는 대충 다른 주제로 넘어가곤 했다. 바이섹슈얼이지만 오랫동안 동성과 연애해 온 애인에게도 결혼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우리가 연애를 하게 되자, 더 이상 결혼은 농담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결혼은 언제 할 것이냐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물음들에 어떻게 답변할까 고민하다가, 왜 갑자기 이 질문들이 나에게도 중요해졌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쨌거나 사회적으로는 결혼적령기, 혹은 적령기를 지난 이성커플이었다. 우리 역시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일수록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혼이 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했다.

 

▶ 친구 아이의 돌잔치에 애인과 동행했다. 내가 경조사에 함께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구루미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대학에 입학한 나

 

간략하게나마 내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자라나 어떻게든 소도시 커뮤니티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대학에 온 수많은 여성들 중 하나다.

 

나는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그녀에게 욕설을 하는 것을 보며 스무 살까지 자랐다. 그런 경험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긴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자가 되었다. 비교적 여러모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예술계열 학부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여성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기도 했다. 때문에 주변 동료와 친구들 대부분이 여성주의자이며 그들 중 다수는 비혼(非婚)주의자이기도 하다.

 

가정 내의 폭력은 이제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불행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부모는 나의 미래에 크게 참견하지 않는 편이다. 십 여년 전 나의 필사적인 희망대로 가족과의 물리적 거리가 감정적 유착을 해소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학자금부터 생활비까지 해결해가면서 약간의 경제적 자유를 얻은 덕인 것 같다.

 

지금은 직장이 없다. 오랫동안 미뤄온 일을 새롭게 시작하여, 여기저기서 작은 일들을 한 대가로 푼돈을 받아 생계를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작년에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고, 올해는 새로운 빚이 생겼으며, 최근의 가장 큰 고민은 동네 집세가 점점 오른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폭력을 참고 견뎌온 엄마의 소망

 

▶ 속이 답답할 땐 평양냉면이 최고지.  ⓒ구루미 
 

나는 엄마의 말을 빌자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진 못한 듯하다. 대학은 남들보다 늦게 들어가서 8년 만에 졸업했고, 졸업한 후 다닌 이름도 긴 직장(여성단체)이라는 데서는 돈은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강간이니 추행이니 하는 험악한 꼴이나 보고 다니고, 굽 높은 구두 한 켤레 없이 허름한 옷차림에 민낯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단다. 예전에는 엄마의 이런 이야기에 반감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적당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사교육 다 받아가면서 성적을 유지하고 타 지역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제공해준 자원 덕이었다. 힘든 가정환경 속에서 엄마는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애썼다. “남들보다 예민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딸은 살갑지도 무던하지도 않았고 엄마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견뎠다. 자식들 생각에 이혼도 못했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엄마는 어린 딸 둘의 고사리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지역의 가정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담사가 엄마에게 말했다. ‘이런 어린 애들을 혼자 어떻게 키우려고 하세요, 조금 더 참아보시지.’ 애들 다 크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다. 엄마는 눈물을 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1980년대 후반 경상도 지역이었다. 엄마의 지금 내 또래 젊은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다. 남들처럼 살고 싶었을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는 이제 60대다.

 

나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된 최근에 엄마는 질문이 많아졌다. ‘네가 만난다는 애는 뭐하는 애니, 부모님은 뭐하시니. 얼굴 한 번 보자.’ 한 달 전 엄마가 병환 중인 외할머니를 뵈러 서울에 왔을 때 버스 안에서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했다. 엄마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 너도 결혼해야지. 이제라도 하면 좋겠다. 엄마가 이렇게 사는 것만 봐서 너희가 결혼을 안 하려는 것 같아 항상 마음이 아프다. 결혼하고도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결혼을 하려면 아빠 퇴직 전엔 해야지.’ 흠, 아빠의 퇴직은 내년 2월이다. 어쩌면 엄마를 위해 “남들처럼”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일은 결혼밖에 남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의 몇몇 여성주의자들의 결혼은…

 

여성단체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생각보다 결혼한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여성주의자라면 비혼주의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들의 결혼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내가 신임하는 이들이 선택한 사람은 어떤 이들일지, 왜 결혼했는지 궁금했다. 만나 본 그들의 파트너들, 그러니까 남편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들은 서로에게 현재의 좋은 지지자였다.

 

파트너십은 여성주의자들 뿐 아니라 요즘 주위의 내 또래들이 결혼에 대해 갖는 가장 큰 희망인 것 같다.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성장할 동반자. 같은 분야의 공부나 일을 함께 해나가는 동료이자 지지자. 게다가 여성주의 이상을 가진 여성이 최소한 거기에 동의라도 하는 남성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결혼은 모범적인 결합의 사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결합이 최근 갑자기 생겨난 결혼에 대한 관점은 아니다.
 

▶ 최근 결혼한 친구가 꼽은 결혼의 이점 중 하나는 늦은 밤중에도 내키면 함께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루미 
 

결혼의 이유는 다양했다. 출산과 양육의 경험을 원해서 선택한 이들도 있고, 안정적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결혼을 결정하기도 했다. 또,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원 가족으로부터 독립 혹은 탈출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미혼(未婚)이 미성숙으로 표상되는 한국에서, 어쩌면 결혼은 여성들에게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것을 보장해주는 보험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신의 가족을 설득하고 바꾸기가 그 누구에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안다. 나 역시 가족과의 관계에서 오래 무력감, 괴리, 죄책감에 시달렸다. 현재 가해지는 직접적인 억압과 폭력들-여성들에게 행사되는 유무형의 차별을 포함하여-로부터 벗어나 당장 살아남는 과정은 나의 의지나 이상과는 다른 선택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는 그런 선택들도 존중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결혼은 가족과의 분리인 동시에 확장이기도 했다. 명절 즈음이나 시댁, 자식 이야기를 할 때 주변의 여성들이 전통적 규범과 타협하면서 생겨나는 고충과 불만을 토로할 때에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화가 났다. 명절 연휴면 고된 노동으로 고통 받고, 원치 않는 출산을 강요당하고, 또 그때마다 해명해야 하는 부모는 두 쌍이 되고, 야근을 하더라도 제사는 치르되 음식을 사가면 타박 받았다.

 

양육의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조절하는 법을 새로이 배워가야 했다.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은 끈질기게 정리되지 않는 두 사람 간의 이슈였다. 어떤 때에는 결혼도 할 만 하겠다 싶다가도, 내가 만난 중 가장 똑똑하고 장한 여자들이 결국 며느리, 엄마, 딸, 부인으로서의 불합리를 감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혼을 통한 이익과 불이익의 적정한 거래 가격은 어느 정도일까.

 

더이상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하게 된 걸까

 

작년 여름에 퇴직금을 털어 미국에 갔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던 날, 밤하늘에 무지개색 폭죽이 터졌다. 퀴어문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한 공원에서 관람했다. 출연진 하나 하나가 등장할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이 요란한 제1세계에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 생각이 많이 났다. 권리로서의 결혼은 아직도 한국의 동성애자에게 요원한 쟁취의 대상이다.

 

나의 애인은 남성이고 자신을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하지만, 그의 지난 애인들 모두 남성이었다. 우리가 사귄다고 하니 그의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얼마나 갈 지 지켜보겠단 이들도 있고, 여자랑 섹스하면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고(나의 신체가 여성대표로 퉁쳐지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지) 다 덮어놓고 빨리 결혼하라고도 한다.

 

애인의 어떤 친구들은 이제 그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한다. 여성과 섹스를 하는 순간 너 이제 ‘탈반’(동성애자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의미)했구나, 결혼하고 애 낳겠구나, 나는 삼촌이 되는 건가, 돌잔치는 언제냐는 식이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생면부지의 택시기사도 우리가 언제 결혼하는지 궁금해 하는 마당에, 돌연 여자와 연애하는 친구에게 던지는 그 정도야 뭐. 바이섹슈얼에 대한 광범위한 편견에 지친 것을 제외하면 이런 말이 나오는 형편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바이섹슈얼은 이성과 연애할 때 결혼이라는 권리-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애초에 잘못됐지만-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셈이다.
 

▶ 작년 내 생일에 애인과 한 컷.   ⓒ 구루미  
 

그러나 이성애자 여성으로 30여 년 살아온 나에게 결혼은 권리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비혼(非婚)이 거기에 가깝다. 여기에 미치자 결혼이라는 것을 현실적 고민의 대상으로 지나치게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은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분명 비혼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한 때가 있었다. 친구, 동료, 동지들과 다 같이 살아가는 삶을 꿈 꾼 적이 있다. 덜 자본주의적으로, 더 여성주의적으로, 반차별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함께 나눈 적이 있다. 같은 꿈을 꾸었지만 결혼을 일찍 해버린 친구들에게, 내게 여성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선배들의 결혼 소식에 얼마간 쓸쓸함과 배신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애인의 친구들이 던지는 말들을 곱씹는다. 결혼에 대해 씁쓸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내가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보려는 노력에 점점 소홀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반성 때문인 것이다. 적어도 방향성을 갖고 서로의 불안을 모두의 것으로 인식하고 싸울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거기에 속해 있었더라면, 지금 내가 결혼에 대해 이리 저리 고민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어떤 상상은 누군가에겐 불가능하다. 출산과 육아를 전담하는 여성의 경력단절, 갈수록 분화되고 심화되는 비정규직 차별, 여성노동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통계, 이겨 내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과도하게 요구되는 ‘노력’을 쥐어짜며 우리는 지쳐간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바빠서”라는 말은 한국에서 비유나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포기와 체념에 익숙해지면서 어느 새 새로운 꿈을 꾸기는 번거롭고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불안하다

 

나의 가장 큰 불안은, 희미한 나의 희망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구체적인 형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빈곤이다. 건강을 잃은 노년의 빈곤이다. 폐지와 쪽방, 편지를 놓고 목숨을 끊는 노인이다. 나의 불안은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불안이다. 나는 나의 불안을 매일같이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며 차례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지금으로선 건강을 잃어선 큰일이다. 시간은 자꾸 간다. 나는 더 이상 20대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20년 후, 30년 후의 나에게 다른 애인과 사랑은 가망이 있을까? 내면화된 차별의식과 낮아진 자존감이 내게 속삭인다.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매력이 없어지면 나의 쓸모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불안하다.

 

하지만 나는 겨우 서른 두 살이다. 겨우, 라는 말을 쓰며 조금 고민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왜 나는 먼 미래의 불안마저 미리 끌어다 쓰고 있을까. 20대에는 빨리 서른이 되길 기도했다. 더 현명하고, 돈이 있고, 안정적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서른이 넘어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어떤 때에는 결혼이 어쩌면 이런 불안한 삶을 바꿀 수 있을 전환점이 될 수 있진 않을까 고민에 매달려 보았지만, 법적으로 고정된 파트너가 있음 외의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나의 미래만큼 결혼 이후도 불투명한 건 당연한 일이다.

 

▶ 힘내서 살아가보자.   ⓒ 구루미 
 

‘결혼’에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결국 ‘불안의 구체적인 해소 방안 모색’으로 끝난다. 지금 우리에게 결혼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 시간이 지나 필요한 시기가 온다면 다시 논의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최근 계획 목록에 ‘해외이주’ 항목 추가를 고려하는 중이다. 빨리 이 나라를 떠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은 시간이 갈수록 확신으로 기운다. 해외 이주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 만큼 우리가 원하는 시기에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일수록 좋다. 그러나 자꾸 주저하게 된다. 분명,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 지난한 현실 속에서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 넘어 미친 듯이 뜨겁고 열렬한 사랑을 확장하고 싶지만, 몰두하지 못하는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과거의 나와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듯이 지금은 삶의 많은 부분들이 각개전투처럼 느껴진다. 나는 혼란 속에서 이 연인과의 사랑에 먼저 충실하기로 한다. 불안은 여전하지만 우리는 일단 함께 걷는다.   구루미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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