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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복동녀의 생애를 그리다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 북청 아지미의 소소해서 소중한 이야기


※ 노년여성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해 온 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까만 밤에 일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어봤어. 까만 밤에 검정 고무신이 보이지도 않는데 얼마나 신어보고 싶었으면 까만 밤에 일어나 검정 고무신을 신어 봤을까?”

 

며칠 전 잠결에 어머니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검정 고무신을 사다 놓고 무척 설레던 어린 소녀 때 어머니가 생각이 난 게다. 그렇게 소녀였던 어머니가 지금 90세가 되셨고 몸에 여기저기 병이 났으니 돌아가실 날도 멀지 않았다고 느끼고 계실 것이다. 그렇게 10대 소녀의 마음을 아직도 한편에 가지고 있는데 돌아가실 생각을 하니 서글프고 아쉬우신 것이다.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해져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제 저녁부터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와서 꼼짝 않고 누워계신다. 왔다 갔다 하며 살펴드리는 것밖에 아무것도 해드릴 게 없다.

 

▶ 외할머니 회갑연에서 20대의 어머니. (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김은성

 

943장의 판화 같은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

 

나는 내 어머니 이야기를 10년에 걸쳐 만화로 그렸다. 내 어머니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보천리에서 1927년에 태어나신 분이다. 6.25 한국전쟁 때 거제도로 피란 와서 충청도 논산땅에 정착해서 20여 년을 살다가 서울로 이주해서 나머지 생애를 살고 계시다. 내 어머니 이복동녀의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나이 마흔에 만화가가 되었고, 만화가가 되자 데뷔작 한 편을 그리고 바로 어머니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해서 10년을 그려 네 권의 만화로 2014년 완결했다.

 

거칠고 단순한 그림. 사람들은 판화 같은 그림이라고 말한다. 판화 같은 그림으로 그려진 943장의 만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그릴 수 있었나 싶다. 거의 미친 짓이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뭣 모르고 했으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의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작업을 이런 장편으로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렇지만 무모한 나는 그리기 시작했고 완결까지 했다.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그리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창작에 대한 어떤 심한 갈증과 열망에 시달렸다. 그 열망을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할까 영화로 할까 어떤 것으로 할까 생각하다 대학원에서 그래픽디자인 공부도 했고 영화를 하겠다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영화를 만들 돈을 벌어보겠다고 회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만화와 관련된 어떤 기관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만화를 접했고 2년 반을 다니고 그 기관을 그만두면서 영화를 하겠다는 마음을 만화로 바꿔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거다.

 

▶ <내 어머니 이야기>(새만화책)의 한 컷. ⓒ김은성


작업을 하겠다는 욕구. 창작을 하겠다는 열망에 대한 이유는 잠시 접어두겠다. 해결해야만 했던 내 인생의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정도만 말해두겠다. 창작을 위해서 길을 찾았고 그러다 만화를 만났고 만화를 그리게 되자 그 문제를 그리고 싶었지만 그릴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그럴 때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리고자 열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라면 그리고 싶기도 했다. 여성으로서의 어머니 삶의 역정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억울함에 대한 공감이 컸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이야기하기를 무척 좋아하고 재밌게 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으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머니가 살았던 경험을 듣게 되었다.

 

참 이상했다. 어머니의 경험을 크면서 귀가 무르게 들었는데, 어머니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게 되자 무척 흥미로웠다. 거기다 꼬치꼬치 물어가며 상세히 알게 되자 어머니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이 보였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어머니뿐 아니라 어머니 세대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커졌다. 그렇게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머니와 나의 대화는 ‘어머니 삶’ 전문가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이야기의 양과 질이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그렇게 네 권의 만화를 그렸다. 그리면서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너무도 쏠쏠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역사책에서 보고 별 감흥을 못 받고 암기하고 넘어갔던 예전과는 달리, 이야기가 살아서 생생하게 다가왔다. 100년의 세월에 피가 흐르고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역사라는 온기 없던 단어가 따끈하게 다가왔다. 100년의 역사가 평범한 북청 아지미의 입을 통해 살아났다.

 

어머니의 80대, 나의 40대를 보내며

 

만화를 그리면서 혹시 완결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많았다. 중간에 잠시 어머니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하고 염려도 했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게 넘어가기도 하면서, 어머니는 80대 10년을 당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시며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그래도 80대이니 기억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나는 늘 조급한 마음으로 작업을 했고, 다행히도 만화는 끝을 보았다. 만화를 마친지 2년이 지난 요즘, 어머니는 기력이 급격하게 약해졌고 기억도 많이 안 좋아지셨다. 조급해하며 서둘지 않았다면 만화를 완결 짓지도 못할 뻔했다. 지금은 내가 어머니보다 어머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상세히 기억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40대를 어머니에 대한 만화를 그리면서 지냈다.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얼마 안돼서 아프기 시작했는데, 만화를 다 그리면서 어느 정도 회복되어가고 있다. 아프면서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만화였다. 엄마의 80대 나의 40대를 다 보내며 그린 만화였다. 엄마는 엄마 인생에서 가장 느긋하고 마음 편한 시간을 가진 거였고, 나는 병이 나서 육체적으로는 아팠지만 내가 원했던 작가로서의 삶, 창작자로의 삶을 살기 시작했고 살아냈다. 그 중간에 큰오빠네와 같이 살다가 엄마와 내가 따로 나와 살게도 됐다. 엄마와 나는 둘이 지내게 되면서 그야말로 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 아버지와 40대의 어머니.  ⓒ김은성

 

그 사이 나는 어떻게 먹고살고 생활을 했을까? 독신이어서 나에게 말고 따로 들어가는 돈이 없었고, 어머니와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으니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 놓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간간이 근근이 버는 돈은 거의 병원비로 다 쓰면서도 만화를 그렸다. 만화를 그만두고 돈을 벌면서 건강을 챙기는 게 보통의 삶이었는데도 나는 만화를 그만둘 수 없었다. 당시에는 돈이 안 돼도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많이 만화를 그만뒀다.

 

철이 좀 난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식구들은 참 무던한 사람들이다. 이런 나를 내치지 않고 가족으로 챙기려 했는데, 나는 내 욕심으로 만화를 계속 그렸고 끝을 보았고 완결했다는 성취감마저 느끼고 있다. 그렇게 식구들이 봐준 덕에 살 수 있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만화가로서 내 입지를 스스로 확보했다고 느끼고 있다. 입지라는 게 별게 아니고 나는 이러저러한 만화를 그린 사람이니 앞으로는 이러저러한 만화를 그리려고 한다고 하면 관심 있어 하는 출판사들 몇은 된다는 정도를 말한다.

 

아마 <내 어머니 이야기>를 그리다 그만두면 이도저도 아니라는 판단도 내심 있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그런 판단의 무모함과 고집이 오히려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됐다는 모순된 생각도 든다. 현재 만화는 웹툰이라는 영역이 새롭게 생겼고, 몇 년을 거치며 웹툰의 수요가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덩달아 최근 들어 공공적인 성격의 출판만화를 지원하기 위한 공모가 그나마 많이 확대되었다. 내 만화 같은 만화도 그런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 지금은 만화를 가지고 생활을 하면서 만화를 그리는 것이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낙관적인 생각도 해본다.

 

어쨌든 나는 10년을 버텨왔고, 내가 그리며 무척 재밌어 했던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는 이미 그렸고 준비 중인 차기작은 거의 그려간다. 어쨌거나 나의 그런 단순함, 고집스러움, 무모함으로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만화를 그려왔다.

 

노년여성들의 말에는 힘이 있다

 

내 만화가 세상 속으로 나왔을 때 독자들 대다수는 만화를 재밌어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우린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접할 수 없었다는 게 큰 이유일 것이다. 대중예술매체 어느 장르에서 이런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10년을 공을 들여 듣고 알짜를 뽑아내는 일을 할까? 또 누가 반듯한 글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게 방송에 내보내고 몇 권의 책으로 출판을 할까?

 

내가 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할 때까지는 이런 좋은 재료들을 채집하고 기록해서 대중에게 보여주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담담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대중예술매체에 소개된 예를 거의 볼 수 없었다. 한 개인의 생애 이야기를 구술받아 만화로 그린 예는 내가 만화를 그리기 전에 한국에서는 본적이 없다. 미국이나 유럽에 자전적 만화의 조류 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같은 만화가 그런 만화다.

 

사람들이 그전에는 접해보지 못한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로 된 만화를 보게 됐고, 그런 낯설고 생소하고 진솔한 만화를 보게 되면서 거기에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노년여성들의 말에는 힘이 있다. 생각으로 오염된 말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말이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다행히도 말에 글로 세상을 배운 사람의 쓸데없는 꾸밈과 거짓이 없다. 그래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소중하다. 최근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글로 쓰거나 만화로 그리는 작업이 많아졌다. 나도 외국의 그런 만화의 영향을 받았고, 또 내 만화의 영향을 받고 그려지는 만화도 있다고 생각한다.

 

▶ 외숙모와 이모와 함께 60대의 어머니.  ⓒ김은성

 

나는 만화의 1부를 마치고 나면서 ‘이 만화 참 뜻밖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라고 느꼈다.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나에게 선물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그리는 만화이지만 만화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랄까.

 

난 그동안 역사를 교과서에서만 배웠고 역사 과목을 매우 좋아했지만, 나와 연결된 사람으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국사를 학교에서 배웠지만 어떤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생생한 연결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쯤까지 피가 흐르는 느낌, 생생하게 뭔가 알게 됐다는 느낌, 100년 전의 사람들도 하루는 기뻐하고 하루는 슬퍼하고 온갖 감정을 가지고 산 붉은 피가 흐르고 따뜻한 체온을 가진 인간이라는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내 폭이 넓어지는 느낌, 갇힌 세계에서 벗어난 느낌이라면 너무 과장일까? 나라는 사람이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는 나를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는 공간적으로 확장시키는 경유지이자 문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결국 인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인데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도 모르게 ‘인간의 시간’ 속으로 한 발 내딛은 것이었다. 그런 근대사 속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다가오게 되는 경험을 하면서 어머니 이야기를 계속 들어나갔다.

 

엄마와 내 이야기들의 주도권 싸움

 

▶ 어머니와 나.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는 2부, 3부를 거치고 4부로 오면서 현재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현재로 오면서 진지해지고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4부는 1980년대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시절에서 시작된다. 어머니 위주로 흘러오던 만화에 내가 주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도 성인이 되었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내가, 어머니가 주도하는 집안에서 어머니의 막내로 사랑받으며 조용히 커오던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고 반란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1980년대를 그리려고도 했지만,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인생 최대의 평화 시절을 맞으셨고 인생의 굴곡진 시기는 이미 많이 겪은 상태였다. 솔직히 나는 대학생활 내내 어머니가 뭘 하고 사셨는지 거의 알지도 못하고 지냈다. 알지 못했지만 물어물어 가며 만화를 그려나갈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말해보자면, 어머니의 인생에서는 이제 더 나올 뭐가 없어 보였고, 그 다음으로는 내 이야기가 막 삐져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상한 얘기일지 몰라도 엄마 이야기와 내 이야기의 주도권 싸움이랄까. 엄마의 인생이야기는 말미를 향해 달려가고 쇠잔해졌다면, 내 얘기는 아직 풀어놓지도 못하고 에너지가 쌓여 있었다고나 할까. 엄마의 이야기가 뒷전으로 밀리게 생긴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야기의 본질을 흐트러뜨리지 못하는 게 만화가인 나의 중립적(?) 입장이라 나는 엄마 이야기와 내 이야기의 중재자 역할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에둘러 얘기하는 선에서 엄마 이야기에 배치하면서, 내 이야기도 하긴 하되 엄마 이야기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엄마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나갔다. 이보다 좋은 결말은 나의 인생 문제와 엄마의 문제가 만나서 싸우고 부딪히고 해결하는 것이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엄마와 나의 경우 이런 담판은 적절해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엔 나와 엄마가 지어야할 짐이 너무 컸고, 그 내용을 해결해서 만화에 넣자면 만화의 비중이 나에게로 넘어와야 했다. 재미있어서 시작한 만화였지만 엄마 만화는 엄마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것도 있었고, 또 내 이야기의 문제를 해결할 용기도 없던 게 진심이라면 진심이다. 그 두 가지 사정으로 만화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의 친구가 되어 어느 정도는 그 대상의 문제를 같이 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그린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느 정도는 합체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서야 거기서 나와서 자신의 문제를 푼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누군가를 그린다는 것은 전면적으로 나를 던지는 일임을 알았다. 그린다는 것은 세밀하게 본다는 것이고, 세밀하게 본다는 것을 마음을 쏟는 것이고, 마음을 쏟다 보면 힘든 것을 같이 해결해나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로 파트너가 되고 같이 싸우고 같이 울고 같이 웃는 동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의 진정한 동지를 만든다는 것은 다른 많은 진정한 동지를 만들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말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나’에게로 이르는 길

 

어머니 만화를 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나’에 도달했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 이제 겨우겨우 뱃속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낯설고 두려운 세상에 홀로 놓인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한 설렘과 번뜩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제 나와 남이 정확히 구분되는 않는 세계, 불명확한 세계에서 나와서 불명확함과 연결된 탯줄을 끊고 세상의 바람 앞에 홀로 서 있다. 나를 남과 확연히 구분하기 시작했고 구분하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너무나 놀랍게도 오히려 이제야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했고 내가 그토록 풀고자 했던 내 문제, 내 이야기로 된 만화의 출판을 앞두고 있다. 어머니와 동지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동지라는 타인의 실체가 분명해지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된 느낌이다.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게 되자 비로소 나는 내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내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을 그릴 수 있게 됐다.

 

▶ <내 어머니 이야기>(새만화책)의 마지막 컷.  ⓒ김은성

 

10년 동안의 네 권의 만화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그린 것이다. 그 자궁에서 나오는 일을 10년을 한 것이다. 참 길게 했지만 그 작업이 없었다면 오롯이 내 이야기라고 할 만한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길었지만 통과해야할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인생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충만한 기쁨과는 다를지라도, 어느 정도의 상쾌한 기쁨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인생의 목표점에 도달한 풍부한 기쁨보다 인생길의 자그마한 이정표들 앞에 앉아서 쉴 때 불어오는 한 줄기 상쾌한 바람이 더 꿀맛일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는 어머니와 딸이란 인연으로 만나 동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그런 상쾌한 바람을 같이 맞았다. 그 바람은 어머니와 나만의 은밀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고, 독자들에게도 보여줬고, 내가 살아가는 힘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엄마의 경험을 만화로 그리면서 엄마의 경험을 듣는 것만으로 즐거웠고, 그걸 또 만화로 그리는 행위는 더 큰 축복이었다. 만화로 전달하는 행위는 노년의 경험을 주의 깊게 듣고 추리고 해석하여서 내 생각으로 다듬고 정리하게 하였다. 어머니 일생의 경험을 나라는 여과기를 통해서 전달하면서, 나라는 여과기가 거듭나는 과정을 덤으로 얻게 되는 기대하지 않은 성과를 보았다.

 

처음에 내가 하려던 만화는 어머니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연으로 어머니의 만화를 그리게 된 것 같지만 어쩌면 그것은 꼭 내가 그려야만 했던 만화였다. 곁길로 가는 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가려고 했던 길과 만나는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 엄마는 무척 힘들다. 엄마는 이제 내가 동생 같이 느껴지신다고 한다. 긴긴 여행을 준비하고 계시다. 나는 옆에서 그 긴긴 여행을 하려는 여행 선배를 지켜보는 다정하고 담담한 친구가 되려 한다.   (김은성)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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